하노이의 탑

    
서구의 중세는 신을 정점으로 한 위계화된 질서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과 동물, 식물 그리고 무생물인 자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런 틀 안에선 하위체계는 상위체계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식물은 동물의 먹이가 되고, 짐승은 인간을 위해서 부림을 받거나 먹히는 존재였다. 신을 축복하기 위한 인간에게, 신은 자신을 제외한 만물에 대한 주재자의 자리를 주었다. 인간이 이것들을 어떻게 다루든 개의치 않았다. 왜! 인간만이 도덕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근대에 들어와서 신과 인간의 이성은 서로 자리를 바꾸었지만 인간과 자연의 근본적인 관계 자체는 변화하지 않았다. 자연은 바야흐로 아무에게도 통제되지 않는 인간의 손에 마음대로 내맡겨지게 되었다. 이 시대를 프랜시스 베이컨은 “지식은 힘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이롭도록 지식을 활용하라. 자연은 인간에게 순종하고 정복되어야 할 존재다.”라고 했다. 이제 인간의 이성은 자연에 대한 더욱 거침없는 행보를 하게 된다. 자연에 대한 개발 아니, 수탈이 기술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무한한 가능성과 장미빛 미래를 가져올 것만 같았던 기술문명. 그러나 이에 대한 위기의 파열음은 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서구의 지성계에서 울렸다. 전쟁 중 인간의 이성은 문명과 인간의 야만이 결합한 파괴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채, 무력할 뿐이었다. 이 때 역사가 오스발트 스펭글러는 <서양의 몰락>에서 서구의 문화적, 도덕적 진보에 대한 회의를 드러냈다. 헤르만 헤세 역시 <데미안>에서 기술문명을 기반으로 한 유럽 세계의 도덕적 부패를 고발하면서 그 낡은 세계를 파괴하고,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로이드 또한 <문명과 그 불만>에서 서구의 문명, 그 자체가 내재한 파괴적 속성을 주목했다. 루카치는 이를 <이성의 붕괴>로 표현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는 그 시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20세기 후반 독일의 사회학자 한스 울리히 백은 <위험사회>에서 방사능 오염이나 오존층의 파괴 등을 들면서, 산업기술문명이 가져온 위험은 이제 한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어 초국가적이고 전 지구적인 위협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실제로 우리는 지구 온난화 현상에 의한 기상이변. 세계적인 불평등 현상에 기인한 9.11 테러나 민족간의 갈등에 의한 집단 학살 등의 사태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에 대한 해결의 방안은 무엇인가. 지금의 위기는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한 문명이 가져왔다. 이를 다시 과학기술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인류에게는 사고와 발상의 전환이 절실하다. 이 위기는 기술이 아닌 윤리적인 차원에서만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위기가 개인이나 국가의 범위를 넘어섰다는 점에서 해결방식 역시 세계적일 수밖에 없다. 이에 ‘세계윤리’가 화두로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세계윤리’에는 두 개의 상이한 입장이 존재한다. 우선, 폭풍우를 만난 대양위에 지구라는 구명선이 위태롭게 떠 있다. 이 구명선 위에 오를 수 있는 인원은 제한돼 있는데, 아직 험한 파도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때 그 표류하는 사람들을 태워서 구명선마저 침몰시키고 말 것인가?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람들이 있다. 근본적 생태주의자들이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구환경의 생태계다. 위기에 처한 지구 생태계의 보호를 위해서라면 개체가 희생되어져도 무방하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지구라는 생태계의 안전을 위협하는 인구 과잉의 해결을 위해 기아로 인한 죽음조차도 외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구가 생태학적 균형을 회복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반면, 우주선 윤리에서는 지구를 무한한 우주공간을 떠도는 우주선에 비유한다. 이 지구라는 우주선은 자원과 물자가 유한하다. 따라서 지구라는 우주선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안정적으로 운행하기 위해서는 제한된 내부자원에서 나오는 에너지 대신 태양광 등 외부로부터 획득된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 ‘우주선 윤리’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우주선 안의 인간과 인간의 공존과 조화를 적극 모색해야 한다는 윤리다.

피터 싱어 역시 이러한 세계윤리의 중요성을 ‘하노이의 탑’이라는 수학게임을 이용하여 설명하였다. 피터 싱어는 이 탑의 모양(그림)을 윤리적 세계에 적용하여 설명하였다. 탑의 위에서 아래로 내려 갈수록 이웃의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반면 위로 향할수록 자기만으로 한정하는 폐쇄적 윤리의 세계를 보여준다. 싱어는 이 탑에서 인간의 기존 윤리체계가 인간중심 특히 자민족 중심적이었다는 것을 지적했다. 인간이라는 종을 벗어나고 개별 국가를 뛰어넘은 개방적인 윤리체계를 이야기했다. 싱어는 그의 책 <실천윤리학>에서 인간이 자신들을 가장 우위에 둔 종차별주의자라고 비판하였다. 윤리 역시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동물 아니, 생명을 중시하는 형태로 윤리의 확대를 꾀했다. 궁극적으로는 세계의 모든 존재로의 확대를 이야기하였다. 싱어는 우리들의 삶이 많은 부분에서 개별국가의 틀을 벗어나 있지만 아직도 세계는 민족국가의 틀 안에서 힘의 논리에 따라 세계를 재편하고 있다고 했다. 이라크 침공이나 교토의정서의 탈퇴 등은 아직 개별국가의 이해에만 집착하는 강대국 미국의 행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윤리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민족국가 중심의 시각을 벗어난 ‘지구 공동체 윤리'를 내세운다. 이는 자민족, 자국 중심이 아닌, 세계 공동의 이익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국가간 협의를 통한 국제기구를 중심으로 세계 질서를 꾀하자는 것이다. <세계화의 윤리>에서 싱어는 세계화는 피할 수 없지만, 이것을 적절히 통제한다면 보다 희망찬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관련기출문제로는 2003년 중앙대 수시1학기에서 나온 ‘전통적인 도덕관념은 자연의 위계와 관련이 있다’는 지문을 들 수 있다. 동국대 2004년 수시2학기에서는 ‘구명선 윤리(Lifeboat Ethics)와 우주선 윤리(Spaceship Ethics)를 대비하면서 세계윤리에 대한 상이한 입장을 비교하라’는 문제가 출제됐다. 2005년 동국대 수시2학기에는 하노이 탑을 중심으로 한 세계윤리의 전반적인 내용을 물어보는 내용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