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환상인가?


                                                            인권실천시민연대 (cshr)  


[장면 1] 환자복을 입고 휠체어를 탄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법원으로부터 200시간 사회봉사명령과 함께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됐다. 법원을 나서는 김 회장은 수염을 깎지 않아 여전히 초췌해보였지만 안도감 때문인지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심야에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사람을 폭행하고 더구나 폭행과정에 쇠파이프 등의 흉기를 사용했다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해 최소 징역 5년 이상의 중형이 선고된다는 것이 변호사들과 인권단체 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하지만 김승연 회장에게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 같은 법률이 적용되지 않았다.

대신 재판부는 “피고인은 그동안 재력으로 사회에 공헌한 바가 크다 해도 재벌그룹 회장으로서의 과도한 특권의식을 버리고 사회공동체 일원으로서 화광동진(和光同塵.빛을 부드럽게 해 속세의 티끌에 같이한다는 뜻으로, 자기의 지덕(智德)과 재기(才氣)를 감추고 세속을 따름을 이르는 말)의 자세를 갖춰 복지시설 및 단체 봉사활동, 대민지원 봉사활동 200시간의 사회봉사를 이행할 것을 조건으로 형의 집행을 유예하기로 한다”고 판시했다.

‘너의 땀을 통해 속죄하라’. 법에도 인간의 얼굴이 있겠지만 김승연 회장에 대한 법원의 판결문은 문제아를 지도하는 교사를 연상시킨다.

자상한 판사님. 게다가 문장력은 또 얼마나 뛰어난가. 화광동진이라는 절묘한 사자성어까지 동원한 문장력이란. 하지만 판사가 아버지야 선생님이야? 검찰은 집행유예가 선고될 정도로 적당히 수위를 낮춰 구형하고 재판부는 재벌회장에게 훈계성 멘트를 마구 날리며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법을 이렇게 자신들 임의대로 주무르는 법원과 검찰을 우리는 어떻게 통제할 도리가 없다.


[장면 2] "미국에서도 교포들이 미국산 쇠고기를 먹는 것처럼 국내 시판 미국산 쇠고기 역시 이상 없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재개된 이후 수입위생조건 위반 사례가 계속 발생하고 심지어 광우병 위험이 있는 특정위험물질이 포함된 경우까지 있었지만 우리정부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 미국사람도 먹고 재미동포들도 먹는데 뭐가 문제냐는 투다. 농림부 방역과장의 얘기다.
어떤 유력 일간지의 한 데스크는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 광우병 위험을 거론하며 철저한 검역을 요구하는 주장에 대해 ‘반미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행동’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언론의 분석과 주장이야 각기 다양할 수 있으니 그냥 넘어가자.
하지만 민의를 대변하고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에 둬야할 정부가 이렇게 ‘무대뽀’로 나오면 어떡하나. 미국의 약속위반은 내버려두고 갈비뼈도 수입할 수 있도록 수입위생조건을 바꾸려고 하는 정부의 입장은 상식을 가진 시민으로서 이해하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다.  
광우병에 대한 철저한 검역과 안전장치를 요구하는 국내 소비자들의 주장은 자국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이기적인 주장이 아니다. 소비자로서 내가 먹는 음식이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를 알고 싶다는 것은 국경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요구이며, 경험적으로 확인된 위험요소를 최대한 피하자는 것 역시 합리적인 수준의 요구일 뿐이다.

광우병이 발견된 국가들 중 미국처럼 광우병 검역을 소홀히 하고 여전히 동물성 사료를 사용하고 있는 나라가 지구상에 또 있는가. 그 뿐인가 미국은 아직 쇠고기에 대한 이력추적제도 제대로 실시하지 않고 있다. 이런 엉성한 제도를 고치는 건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는 나라들뿐 아니 미국 내 소비자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 아닌가. 두 나라의 소비자를 위한 일이 어떻게 반미가 될 수 있나?

17년 전 존 검머 영국 농무부 장관이 “영국 쇠고기는 안전하다”며 자신의 딸과 함께 텔레비전에 출연해 쇠고기 버거를 먹었다. 다행히 당시 검머 장관의 딸은 아버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쇠고기 버거를 먹지 않았지만 검머 장관의 이 시식행사 이후 영국에서는 엄청난 광우병 파동이 불어 닥쳤다. 현재까지 18만 두가 넘는 소에서 광우병이 확인됐고 약 400만 마리가 도살됐다. 그 뿐인가. 1995년 인간 광우병으로 19세 청년이 사망한 뒤 143명이 인간 광우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어떤 전문가는 광우병의 잠복기간이 짧게는 10년 길게는 50년에 이른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2015년쯤부터 해마다 약 2만 명 정도의 영국인이 인간광우병으로 사망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영국에서는 지난 2001년까지 동물 사료를 먹은 애완용 고양이 100마리가 광우병으로 죽었다. 확인된 것만 그렇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동물성 사료를 먹은 다른 애완동물들도 광우병의 위험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 위험은 현재 진행형이다.

영국을 휩쓴 광우병 파동이 재연되질 않길 바라지만 마냥 안심하기에는 모든 게 너무 불확실하다. 미국은 광우병의 공포가 유럽을 휩쓸던 지난 1997년 동물성 사료 규제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 동물성 사료 규제 조치는 반추동물에게 반추동물의 부산물로 만든 사료를 금지했을 뿐 다른 동물의 부산물로 만든 사료는 계속 허용했고 이런 사료정책은 지금까지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영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광우병은 반추동물에게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다른 종 사이에서 교차 감염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미국의 상황은 불안하기만 하다. 미국의 경우 광우병은 밍크에서 처음 발견되었는데, 모피를 만들기 위한 가죽을 벗겨내고 남은 살코기와 부산물은 동물성 사료로 만들어져 소에게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교차 감염의 위험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몬태나 주에서 축산업에 종사했던 하워드 리먼의 얘기는 충격적이다. 하워드 리먼은 “성난 카우보이(Mad Cowboy)”라는 책을 통해 우리에게도 알려진 인물이다.

“농장에서 나온 가축 이외에 사료업자가 좋아하는 또 하나의 재료는 안락사 시킨 애완동물이다. 전국의 동물 수용소에서는 매년 6-7백만 마리의 개와 고양이가 죽어간다. 예를 들어 로스앤젤레스만 하더라도 매월 약 2백 톤의 안락사한 개와 고양이를 사료 공장으로 보낸다. 이런 섬뜩한 혼합물을 빻아서 증기로 쪄내는데, 무거운 단백질 원료는 말려서 갈색 가루로 만든다. 그 중 4분의 1 정도는 배설물이라고 보면 된다.
이 갈색 가루는 가축의 사료뿐만 아니라 대부분 애완동물의 사료에 첨가된다. 축산업자들은 이것을 ‘농축단백질’이라고 부른다. ... 미국에서는 9천만 마리의 육우 가운데 약 75퍼센트의 육우에게 ‘영양가를 높인’ 동물성 사료를 일상적으로 먹인다.”
섬뜩한 광경이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97년 동물성 사료 규제정책을 실시한 뒤에도 이런 현실에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소의 피는 여전히 소의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서는 지난 2003년 광우병 소가 발견된 뒤 지금까지 모두 세 마리의 소가 광우병에 감염된 것으로 확인됐다. 9천만 두에서 1억 두에 이르는 소를 사육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확률적으로 아주 낮은 가능성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미국의 경우 광우병 검역체계가 유럽연합이나 일본에 비해 대단히 허술하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 2003년 12월 첫 광우병 소가 발견되기 전까지 전체 축우의 0.1 퍼센트에 대해 광우병 검사를 실시했다. 광우병 소가 발견된 이후 광우병 검사 대상이 1퍼센트로 확대되었지만 최근 다시 0.1 퍼센트로 축소되었다.

이에 비해 유럽연합에서는 전체 축우의 25퍼센트에 대해 광우병 검사를 실시하고 있고 일본은 모든 축우에 대해 검사를 실시하고 있다. 만약 유럽연합이나 일본처럼 광우병 검사 대상을 늘리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미 농무부가 자체 조사를 통해 밝혀낸 도축과정의 문제도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미국에서 처음 광우병이 발견된 2003년 12월 이후 14개월 동안 도축과정에서 광우병 검역과 관련해 모두 829건의 위반사례가 확인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미국 산 쇠고기를 과연 안심하고 먹을 수 있을까?

더 큰 문제는 앞으로 뼈를 포함해 미국 산 쇠고기에 대한 전면적인 수입개방이 이뤄질 경우 쇠고기 가공품이나 소의 피로 만든 사료 등도 수입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럴 경우 광우병 쇠고기가 수입될 가능성뿐만 아니라 광우병이 국내에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국민을 가르치려고 하는 재판부와 국민의 합리적인 문제 제기와 요구에도 ‘무대뽀’로 마이 웨이를 고집하는 정부. 국민의 의견과 법이 이렇게 무시되는 현실에서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사기’ 아니면 ‘환상’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이광조씨는 CBS PD로 재직 중에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7.09.20 2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