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과 비관이 공존하는 <자유로운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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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발간된 켄 로치의 인터뷰집 <로치 온 로치>의 저자 그레이엄 풀러와 감독 켄 로치가 나눈 마지막 문답은 이렇다. 그레이엄 풀러가 켄 로치에게 “당신은 세태에 관해 낙관적입니까, 비관적입니까?”라고 물으니 그가 말한다.“이 악순환적인 타락에 사람들이 직면해 있기 때문에 짧게 보면 낙관적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길게 보면 나는 낙관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늘 돌아와 싸우기 때문입니다. 내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걸 표현하게 하고 그런 탄력을 공유하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람들을 웃게 만들거든요. 그게 바로 매일 아침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겁니다”저자는 한번 더 묻는다.“지쳐 쓰러지기 전까지는 계속하실 생각이신가요?”켄 로치의 답. “글쎄요 확실히 그럴 것 같은데요.”
길게 보면 희망이 있다는 켄 로치의 대답
10년이 지났다. 켄 로치의 신작 <자유로운 세계>의 개봉에 맞춰 <씨네21>과 켄 로치가 나눈 전화 인터뷰(<씨네21> 671호, 피플, “착취 논리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 만든다”)에서 그는 “여전히 희망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이렇게 말한다. “짧게는 낙관적이라고 보기 힘들겠지만 길게 보면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중략) 미래를 기대하려면 우리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잘 조직되어 있고, 얼마나 잘 싸우느냐에 우리의 미래가 달렸다.”
10년 전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동일한 답이다. 그리고 영화 <자유로운 세계>는 낙관적이지 않다. 10년이라는 세월은 그렇다면 그가 보기에 희망을 말하기에 아직 짧은 세월이라는 뜻인가. 켄 로치가 질문의 종류에 따른 인터뷰 매뉴얼을 습관적으로 반복한 것이라고 해도 이 되돌아온 말의 의미와 가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창작자의 언변을 전적으로 신봉하기 어렵다 할지라도 그가 작품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경청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켄 로치는 세계가 얼마나 좋아질 것이냐고 묻는 질문에 지금은 참 나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비껴나 답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건 결과적으로 매번 같은 자리, 원점에서 싸우고 있음을 가리키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옛 문장을 오늘날에 다시 꺼내는 건 시대착오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켄 로치는 같은 자리에서 매번 문제를 새로 설정한 뒤, 영원한 낙관은 미룬 채 비관적인 현재와 그 현재와 싸울 힘으로서의 당대의 낙관적 징조를 껴안는다. 다시 말하지만 무구한 낙관이 아니라 낙관적 징조다.
켄 로치의 비전은 그러므로 진보를 향해 무한 질주하는 혁명적 기관차의 형상이 아닌 것 같다. 그는 혁명가라기보다 사려 깊은 풍자가이며 논평가다. 세상이 천지개벽을 한다면 혁명가의 자리는 사라지겠지만 풍자가와 논평가는 그때에도 할 일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떠나 말할 때(물론 켄 로치는 강한 신념을 지닌 좌파이며 사회주의자다) 켄 로치가 세계의 진보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운명을 따른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라면 그는 운명주의자 같다. 이런 규정이 갖는 위험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가 세상이 좋아지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이 좋아져도 여전히 사회적 모순은 남을 것이며 또한 그걸 직시하는 것은 자기의 몫이라고 믿기 때문에 운명주의자다. 이 점이 바로 <자유로운 세계>를 통해 그의 변하지 않는 비전과 영화가 어떻게 만나는지 보려는 이유다.
왜 그들이 일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가
<자유로운 세계>에 관해 얼마간의 리뷰가 나온 상황이므로 약간의 첨언을 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자유로운 세계>가 무엇에 관한 영화냐고 묻는다면 어리석고 뒤늦은 질문처럼 보일 것이다. 이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영국의 인력송출업체의 한 여직원(앤지)이 성적 희롱을 하던 직장 상사들에게 반기를 든 다음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생존의 방편으로 소규모 불법 인력송출업체를 차린 뒤 이주민노동자를 대상으로 점점 더 쓰레기처럼 변해가며 악독한 착취자가 되어가는 영화가 아니냐, 그걸 모르고 하는 소리냐고 반문하는 것이 가능하다. 맞는 말이다. <자유로운 세계>는 그런 영화다. 여기에 어떤 다른 독창적인 해석을 덧붙이기 어렵다. <자유로운 세계>가 어떤 독법을 요구할 만큼 거대한 영화적 미스터리에 둘러싸여 있는 작품도 아니다. 하지만 과연 이 영화가 눈에 보이는 것만큼 명백한 목적과 대립구조로 이루어진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나는 지금 켄 로치와 그의 지지자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화된 이해의 폭을 조금 펼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몇개의 단계를 거쳐 그걸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전적으로 이주노동현실에 대한 무엇을 다룬다고 할 때, 왜 그들이 일하는 장면이 영화 속에서 한 차례도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 것인지 묻는 것은 상식적이다. 그들이 일하는 모습은 앤지와 거래처 사장이 뒷말을 하며 감시할 때 잠깐 나올 뿐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앤지의 시선에 잡힌 풍경이다. 물론 일자리를 얻기 위해 서성거리는 그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이때에도 화면 안의 서사와 정서의 주인공은 그들에게 일자리를 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주인공 앤지이며 그들의 고통은 앤지의 악행 그 이후의 모티브가 된다. 자주 비교되곤 하는 <빵과 장미>와 다르게 켄 로치는 이 영화에서 일터에서의 장면을 거의 찍지 않았으며 인터뷰에 따르면 파업과 쟁의로 이어지는 서사는 찍었다가 도로 빼버렸다. 이주노동자 그들의 입장을 제외한 것이다. 이 영화는 앤지의 시선과 심경과 역경에 거의 모든 것을 맞추고 있다.
그렇다면 <자유로운 세계>는 이제 앤지라는 악덕 고용주의 후안무치함을 끈질기게 질타하는 영화가 될 것인가. 그렇지도 않다. 앤지는 이란에서 쫓겨나온 불법 이민자 가족을 본능적으로 돕는다. 게다가 그녀가 악해지는 과정을 묘사할 때 우리는 앤지를 욕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그렇게 만든 사회를 욕하게 될 것이다. 앤지가 나빠진 건 그녀를 부당하게 내쫓은 사회 때문이라는 생각을 마음속에 짙게 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앤지는 우리가 그녀를 포기할 때쯤 바닥에 있는 인간미를 꺼내놓고 또 그걸 믿을 때쯤 다시 우리를 배신하기를 거듭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켄 로치가 말한 것처럼 앤지를 그렇게 만든 사회 시스템을 고발하는 영화인가? 이 문제가 중요해 보이는데, 그런데 켄 로치가 추구하는 것은 사회 시스템을 논리적으로 격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서적인 호응을 끌어내는 것이다. 만약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라면 고다르의 방법보다 켄 로치의 방법이 더 적절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시스템에 관해 좀더 분석적 태도를 가질 수도 있었겠지만 영화는 그러지 않는다.
주인공 앤지는 중첩적이고 비유적인 인물
대신 켄 로치의 영화에는 논리가 부재하는 반면 우리를 인도하는 지시등으로서의 감정선이 있다. 일단 그것이 규칙적이거나 일방향적인 것은 아니다. 오프닝 신을 보면 앤지가 선인에서 악인으로 직선 이동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녀는 하룻밤 같이 보내도 좋을 만한 잘생긴 폴란드 청년에게는 일자리가 있을 거라고 그 자리에서 확언한다. 물론 그가 다른 이주민들에 비해 능숙한 영어실력을 갖고 있지만 진짜 이유가 그게 아니라는 것을 모두 다 안다. 그러니까 앤지는 처음부터 올바르거나 상식적인 선인의 형상으로 등장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녀의 사회적 고난은 처음부터 존재했다. 싱글맘으로 살고 있는 그녀를 우습게 본 나머지 직장에서의 성희롱은 가능했을 것이며 앤지의 태도로 보아 상사(또는 동료)의 얼굴에 물을 뿌린 건 참을 만큼 참다가 일어난 일이다. 앤지는 처음부터 불행했고 그녀는 어딘가 자기의 위에 있는 계층과 아래에 있는 계층들 사이에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이용하는 자리에 끼워져 있는 인물이다. 켄 로치는 지금 이 어중간한 인물에 모든 초점을 맞춘 셈인데, 그건 관객에게 지금 당신은 어느 편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혹은 시스템의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심도 깊게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애매한 주인공의 고된 일화를 신파의 감정으로 끌고 가고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세계>는 앤지라는 중첩적이고 비유적인 인물을 등장시킨 신파 영화다. 나는 신파와 앤지의 중첩성이라는 말을 한계와 긍정의 의미를 동시에 담고 쓰고 있다. 또한 이것이 앤지를 단순하게 착취자 혹은 시스템의 피해자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아 보이는 이유다. 그녀는 시스템의 당사자이며 피해자이며 시스템 그 자체이며 혹은 비유이며 연계고리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자리는 중첩적이다. 이 영화는 앤지를 포함하여 견고하게도 몇개의 계층별 층위를 먹이사슬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켄 로치의 영화에 관해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갈등에 대해 좀더 첨예하다고 말할 때 늘 이 먹이사슬이 문제시 된다. 앤지는 최상층과 직접 닿지 못하고 자신과 같은 처지라고밖에 볼 수 없는 이들을 착취해 먹는다. 성희롱하는 동료 또는 직장 상사 또는 더 높은 곳에 있는 간부들이 있고, 그들 아래 있던 것이 앤지다. 앤지의 그 밑에는 여권을 보유한 정식 이주 노동자가 있다. 그들 밑에는 다시 여권조차 없는 불법 이주 노동자가 있다. <자유로운 세계>는 극이 흘러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 계층별 구조의 먹이사슬이 쉽게 풀릴 수 없는 것임을 알아차리게 한다.
그러나 공감하지 않을 인물을 줄곧 따라갈 때, 앤지라는 인물이 켄 로치가 지지하는 인물이 아니라 경계하는 인물일 때, 그를 따라가면서도 공감과 거리두기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비로소 이때 주의 깊게 눈에 들어오는 건 이 영화에 등장하여 앤지에게 피해를 보거나, 앤지를 좋아하거나, 앤지가 좋아하는 주변 인물들이다. 앤지와 엮여 있는 그 모든 사람들. 더군다나 그들 모두가 인정받을 만한 이유와 처지와 주의주장을 갖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앤지를 비롯하여 친구 로즈, 앤지를 곤경에 빠트리는 거래처 사장, 아들 제이미, 앤지에게 돈을 떼먹히고 유괴범으로 변한 노동자들, 그들에게는 모두 나빠질 만한 이유가 있으며 그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칼 같은 말을 내뱉는다(그중에서도 유괴범들의 말이 제일 슬프면서 섬뜩하다). 영화는 전적으로 앤지를 따라가지만, 누구를 통해 이 이야기를 다시 볼 것인가의 문제가 이때 생긴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모든 인물들이 각각의 사정을 갖고 있을 때 누구라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들 각자의 사정이 켄 로치의 지난 영화 속 인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실은 이 상상의 끈이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는 켄 로치 자신의 선언보다 훨씬 강렬한 이 영화의 본령이다. <자유로운 세계>에 중요한 면모가 있다면 아마도 이 점일 것이다. 앤지의 이야기가 켄 로치의 세계에 존재해왔던 그 누구의 이야기와도 연관될 수 있다는 그 가능성 말이다.
그러므로 이하는 가정의 연속이며 이미 있어왔던 켄 로치 영화 주인공들과의 연계다. 사실 이 가정의 연속을 상기하는 것이 <자유로운 세계>를 보는 가장 철저하고 능동적인 방법론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예컨대 엄마를 욕한 친구의 턱뼈를 부러뜨렸으면서도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앞으로는 턱이 아니라 목을 부러뜨리겠다고 앙칼지게 어른들에게 대드는 앤지의 어린 아들 제이미가 몇년 뒤 나이를 더 먹어 달콤한 열여섯(<스위트 식스틴>)을 맞지 않을 것이라고 그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이 소년이 마약을 팔아서라도 엄마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앞도 뒤도 보지 않고 저속한 사회에 물들어간다면 그게 바로 <스위트 식스틴>이다. 더러는 제이미에게 친구 같은 매 한마리가 있다면 그리고 좀더 이 아이가 선명하고 순수하다면 <케스>의 주인공 빌리의 이야기로 전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는 직장을 잃은 앤지가 국가로부터 부모 자격 상실이라는 판정을 받고 아들 제이미를 잃는다면 앤지의 이야기는 <레이디버드 레이드버드>처럼 펼쳐질 것이고, 그건 바로 그 옛날 아이들과 함께 살 거처를 찾지 못하고 곤궁을 헤매던 <캐시 컴 홈>을 연상시킬 것이다. 혹은 직장을 잃은 앤지가 술과 마약에 한동안 절어 있다가 이제는 새로운 인생을 건실하게 살겠다고 마음먹고 나서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건 <내 이름은 조>의 여성 주인공 버전일 것이다.
상상은 앤지와 제이미에게서 멈추지 않는다. 만약 이곳에 온 이주 노동자들 중 이를테면 앤지가 잠깐 마음을 주었던 잘생기고 지적인 폴란드 청년이 동료들을 모아 노동자 집단을 합심시켰다가 본국으로 송환되는 장면으로 끝나게 된다면 그건 더도 덜도 아닌 <빵과 장미>가 될 것이다. 이주 노동자 중 가장 뚱뚱하고 웃기게 생긴 뚱뚱보 하나를 주인공으로 골라서 그의 집까지 쫓아간 뒤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는 분명 딸이 있을 것이고, 그 아이는 생일을 맞아야 할 것이며, 이 아비는 딸의 생일을 위해 도둑질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게 <레이닝 스톤>에서 우리가 보고 울었던 장면이다. 이런 예는 끝도 없이 가능할 것이다. 앤지의 이야기는 지금껏 보아왔던 켄 로치 연속극의 지극히 일부이며 켄 로치가 거듭해온 무수한 가정들 중 하나인 셈이다. <자유로운 세계>가 가장 가슴을 치는 건 이런 상상을 할 때다. 그러니까 켄 로치에게 세계는 아직 변하지 않은 것이다.
켄 로치가 갖고 있는 형식적 강박증은 무엇인가
<자유로운 세계>가 켄 로치의 의도를 충분히 살려낸 작품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이보다 뛰어난 작품이 많다. 그는 일인 드라마와 다중관점이라는 묘한 화합을 취하려 하고 있지만 냉혹하게 말하자면 이때 관점을 상실하고 헤매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앤지라는 인물을 원점으로 하여 사방으로 이 세계의 모든 관계들이 연계되고 있다는 것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 만약 이 영화의 구성이 효과적인가,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하기 망설여진다. 하지만 역시 그 구성의 끝에 있는 켄 로치의 라스트신까지 거부하지는 못하겠다. 그의 어떤 영화라 해도 켄 로치의 라스트신은 늘 효과적인데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그게 원점에 서서 싸우는 자의 강박증과도 같은 제스처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켄 로치 영화에는 형식의 강박증이 없다고들 말한다. 공감하지 않는다. 그는 어떻게든 라스트신이라는 마지막 귀결을 통해 인물에게 주어진 곤혹스러운 사태 또는 그 반대의 사태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상황으로 연출하려고 한다.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사회가 그렇기 때문인가? 물론이다. 하지만 형식이 그 사회의 현 상황을 반영하길 켄 로치가 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켄 로치는 영화 현장에서 모든 즉흥성을 열어놓고 연출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라스트신에서는 뭔가 꼭 정해져 있는 지점으로 가려 한다. 그건 지금껏 중단과 판단유보와 신호 정지로 가득 찬 켄 로치 영화의 무수한 라스트신을 만들어왔다. 하지만 여기서 그것들을 열거하지 않을 생각이다. 대신 <자유로운 세계>의 라스트신을 보자.
라스트신에서 앤지는 로즈와 함께 우크라이나로 날아가 영국으로 들어와 일하고 싶어하는 또 다른 사람들을 상대한다. 앤지의 파렴치함에 화가 나서 절교를 선언했던 로즈는 어느새 옆에 돌아와 있다. 앤지는 로즈를 설득한 것인가. 앞으로는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하겠노라 설득한 뒤 그녀를 다시 데려온 것인가. 확신할 수 없다. 로즈가 제 발로 다시 찾아와 그래도 돈을 벌 수 있는 길은 이것밖에 없으니 할 수 없이 같이 가자고 제안한 것은 아닐까. 역시 확신할 수 없다. 그리고 앤지는 아들 제이미를 잠시 유괴했던 자들이 요구한 빚갚기를 모두 해낸 것일까. 아니면 그걸 위해 여기 온 것일까.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빚을 갚으러 우크라이나로 날아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앤지와 로즈의 태도로 보아서 그들 회사가 망한 것은 아닌 것 같고 규모는 좀더 커진 것 같다. 그렇다면 앤지가 협박당했던 날 그 이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갑자기 생략된 이야기들 너머로 마지막 장면이 도착해 있고 우리는 변할 수도 있었지만 변하지 않은 앤지를 보고 있을 뿐이다. 켄 로치는 꼭 이럴 때가 되어야 영화를 끝낸다. 다시 판단은 멈추었고 동시에 세계도 정지했다. 아니 켄 로치는 세계의 바로 그 지점에서 자신이 멈춘다.
켄 로치의 영화는 사실 인간적이고 신파적인 기능을 하기 때문에 이 영화 <자유로운 세계>의 라스트신이 우리에게 앤지의 인간개조라는 승전보를 전해준다 해도 그건 크게 흠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가령 앤지가 돈을 갚고 개과천선하는 것을 보여준다 해도 문제될 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켄 로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앤지가 그러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될 수 없다는 확신 아래 그녀의 이야기를 전개했기 때문이다. 앤지는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이다. 그게 세계의 현실이며 켄 로치의 운명이기도 하다. 켄 로치가 10년 전과 지금 여전히 말하고 있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이 라스트신에 동석하고 있는 느낌은 그래서 생긴다. 다시 돌아와 싸우려는 희망이 있다면 그 역설의 구조도 가능한 법이다. 다시 돌아와 더럽게 물들어가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라스트신이다. 중요한 건 어떤 결과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멈추어설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의 성질이다.
이건 말할 것도 없이 켄 로치가 세계를 보는 세계관 때문이지만, 역으로 원점에서 끝을 내야 한다는 그 자체의 영화적 무의식이 형식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점을 성자 켄 로치, 무형식의 영화 작가 켄 로치라고 말하면서 늘 무시해왔다. 그러니까 그가 결코 양보하지 않는 단 하나의 형식주의가 있다면 어디서 영화를 멈출 것인가 하는 것이다. 누가 켄 로치를 성자가 아니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가 성자라고 해서 이 라스트신이 예술가로서 강박증과 요구에 부응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 온 것은 잘못된 선입견일 것이다. 켄 로치가 지겨울 정도로 고수하고 있는 이 라스트신이 바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 같은 그의 영화에서 유독 강박적으로 그의 세계관을 담는 형식이다. 지쳐 쓰러지기 전까지는 희망을 기다릴 것이라던 72살의 노인은 이렇게 아직도 원점에 서서 세계의 부당함과 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