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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가 된 현대인
심재봉 논술교사 | sjbong21@hanmail.net
경계에선 사람에 대한 생각은 처음 윤이상과 송두율이란 인물을 접하면서부터였습니다. 이국만리에서 끝내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하고 통한의 삶을 마감한 윤이상과 살아 조국의 땅을 밟았지만 끝내 사상논쟁의 제물이 되어 입국과 동시에 감옥신세를 지다 반강제적으로 조국에서 추방당한 송두율이란 인물은, 사람의 의지와 삶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귀중한 사표였습니다. 이 인물들을 계기로 경계를 넘어서 살면서 경계의 구역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삶의 몸부림을 고민할 때 접한 서경식이란 인물의 글들은, 수많은 경계구역에서 소름끼치는 삶을 연면해가는 고통스러운 몸짓의 아우성을 느끼게 해준 소중한 계기였습니다.
다수자의 입장에서 소수자의 진정한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거대한 포효 속에서 토끼의 발소리는 묻히며, 그나마도 듣기 어려운 개미의 발놀림 소리는 존재감을 완전히 잃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거대 담론 속에서 자잘한 일상의 담론들이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어 무시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왜냐하면 소소한 목소리는 거대한 목소리에 갈가리 찢기기 때문입니다.
경계에선 사람들을 무엇이라 부르는 것이 옳을까요? 일단 서경식의 언어를 빌리고자 합니다. 경계에선 사람들은 나그네입니다. 그들은 확실한 주인도 아니고 손님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편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에도 들지 못하는 그들은 확실하게 무게 중심이 치우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위치에서 스스로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떠돌이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향수가 있습니다. 그 향수는 편성되기 이전 가르는 경계가 없었던 삶에 대한 향수입니다.
서경식의 언어는 이렇습니다. “디아스포라는 이산을 뜻하는 그리스어이자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 …오늘날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유대인뿐 아니라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타인인 등 다양한 ‘이산의 백성’을 좀 더 지칭…”하며 대부분 폭력과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로부터 이산을 강요당한 사람들 및 그들의 후손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 글을 인용하는 목적은 디아스포라를 경계에선 사람들과 동일시해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언어에서 디아스포라는 조국(선조출신), 고국(자기가 태어난 고향), 모국(현재 ‘국민’으로 속해 있는 나라)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곳에도 확실하게 편성되어 소속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의지에 의해서 결정되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강요받아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경식 씨는 이 세 가지가 일치하지 않는 삶이야말로 디아스포라적인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딘가 편입되어야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감을 찾기 위해서는 현대인은 특정 집단에 소속되거나 사고를 규정하는 이념의 틀에 자신을 안주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어디 어디 누구다’라거나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라는 명패가 있어야 합니다. 편입된다는 것은 편성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느 경계에 있다는 것을 주위에 알리고 각인시키는 작업입니다.
화제를 좁혀봤습니다. 그렇다면 마음과 몸으로 이산의 생활을 한다는 것을 우리 생활에서는 어떻게 비유할 수 있을까? 현대인은 몸과 마음이 태어난 고향, 노동공간으로서의 고향, 노동에서 벗어난 주거공간의 고향, 심리적으로 피난하는 또 다른 공간의 고향, 태어난 곳을 버리고 새롭게 정착한 고향 등이 분리된 채 살아갑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현대인은 자신이 필요로 하거나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이동할 채비를 갖추기 위해 수학합니다. 필요하다면 국적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생존하기 위해 마음의 고향으로부터 벗어나 도시로 모여듭니다. 그 도시 안에서도 또 다른 공간의 분리를 겪으며 노동과 여가의 공간이 분리됩니다. 이런 이유로 현대인은 노동과 주거와 여가 등이 통합된 공간을 갖지 못합니다. 심리적으로 마음이 당기는 곳이 있어도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몸은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디아스포라를 축소하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제가 사는 시골마을에서는 아이들이 어린 나이부터 나그네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습니다. 생산시설도 변변찮고 정체된 이 도시의 아이들은 교육의 세례를 받고 고향을 떠나 외지로 떠돌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농사가 주업인 곳에서 아이들은 이농을 하기 위해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 부모가 생활해 온 곳, 내가 태어난 곳, 현재 속해있는 공간으로서의 도시가 모두 일치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미 성인이 된 분들조차 이 공간으로부터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경쟁력 있는 대농육성의 명목 아래, 생존을 위해 노동할 곳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도시로 도시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삶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 고향으로 귀향한 제 눈엔 고향 사람들조차 나그네가 될 준비로 분주해 보입니다. 경계에 선 사람들은 늘 외롭습니다. 자신이 품에 안길 완전한 고향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디아스포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1. 윗글의 요지를 400자 내외로 정리해 봅시다.
2. 제시문에서 이야기하는 디아스포라의 생활을 하고 있는 현대인의 삶을 예를 들어 설명해 봅시다.
3.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하며 나그네의 삶과 나의 삶의 공동점과 차이점을 이야기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