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강좌 알림터
중1 온라인수업 수업소감
학생글 일부
헬렌올로이를 읽고 - 민*
로봇이 사람에 감정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교감하며 사랑을 하는 건 먼 미래가 아니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개발된 아기물개를 모델로 한 로봇 ‘파로’가 사람들의 감정회복에 도움이 된다거나 감정 전달이 어려운 자폐 어린이들이 보다 쉽게 자신의 감정 상태를 표현할 수 있도록 고안된 카스파등 여러 로봇들이 사람에 감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아마도 사람들이 쉽게 의지할 수 있는 수단이고 내 말을 가장 잘 들어주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데이브와 필은 가정용 로봇 레나의 성능에 만족하지 못해 헬렌이라는 새 로봇을 구매하게 됐다. 헬렌은 레나보다 요리 실력도 뛰어나고 훨씬 사람 같았다. 그러나 헬렌의 전원을 켜자마자 로맨스 영화에 노출시켜버린 탓인지 헬렌이 사랑이란 감정에 심하게 노출되어 버렸다. 데이브는 처음에는 그런 헬렌을 보고 그녀를 혐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사인 필이 중간에서 둘을 잘 다독여주었고 데이브도 그녀를 버리고 오니 점점 그녀를 혐오하는 감정이 사그라들었다. 그러다 결국 그녀를 다시 사랑하게 되어 같은날에 같이 죽게 된다.
헬렌과 데이브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보기엔 어려움이 좀 많다. 왜냐하면 따지고 보면 사람이 결혼을 하는 이유가 번식을 하기 위해서인데 로봇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 사람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못하고 시간이 낭비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 로봇은 어디까지나 프로그래밍 되어있는 프로그램 안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결국 프로그램이 명령하는 대로 말하다 보니 진심어린 말 한 마디 할 수 없기 때문에 헬렌과 데이브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본다.
인간의 마음에 따라 로봇을 좋아할 수는 있겠지만 로봇과 사랑한다는 감정까지 가게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로봇은 공감이라는 것을 못하니 고성능 프로그램에서 나온 가짜 공감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로봇에 관심을 가지는 것까지는 좋지만 만약 사랑이라는 감정까지 가게 된다면 그 사람은 서로 조금씩 맞춰가는 사랑이 아니라 그냥 내 기준에 로봇이 맞춰주는 사랑에 익숙해지기 때문에 로봇과 사랑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처럼 로봇을 실제 반려자처럼 다루면 인간과 로봇의 정의가 흐려지고, (다른 인간관계 속에서도) 내 말을 잘 안 들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자신을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착각하여 굉장히 불쾌해질 수 있다. 이 말을(?) 사람들의 다양성을 이해할 수 없게 되고 최악의 경우엔 사회를 바라보는 측면이 좁아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로봇과 인간과의 사랑이 가능한 세상이 온다면, 로봇 반려자를 선택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관계 모두는 돌이킬 수 없이 변화할 것이다. 서로 맞춰가고 성장하는 우정과 사랑이 아니라 (이 부분 채워보기), 인간은 지금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린 히말라야시다 그림 - 윤*
선규와 여자아이의 삶의 태도는 각각 어떻게 다른가? 어떤 삶이 더 편안한가? 어떤 삶이 더 행복한가? 그리고 나는 어떤 삶의 태도로 살고 싶은가? 선규는 한 사건 때문에 자신을 계속 의심하면서 살고 여자아이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산다. 선규는 계속 노력하며 살고 여자아이의 삶은 노력, 모험과는 거리가 멀다.
두 삶의 태도는 분명한 단점이 있다. 선규의 삶의 태도의 단점은 한 사건에 얽매여서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아이의 삶의 태도의 단점은 자신의 원래 모습에서 발전하려는 노력을 안 하는 것이다. 두 삶 중에 더 편안한 삶은 당연히 여자아이의 삶이다. 선규는 자신을 의심하면서 살아가므로 편안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 반면에 여자아이는 사생대회 장원을 ‘귀찮음’, ‘스트레스’ 때문에 바로잡지 않았을 만큼 굉장히 편안하고 느긋한, 어떻게 보면 게으른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두 삶 중에 더 행복한 삶은 선규의 삶일 것 같다. 선규는 열심히 노력한 끝에 우리나라의 최고의 화가가 되는 것에 성공했다. 반면에 여자아이는 그냥 편안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딱히 이룬 것이 없고 자랑할 만한 것도 없다. 따라서 두 삶 중에 더 행복한 삶은 선규의 삶일 것 같다. 만약 선규와 여자아이의 삶 중에 하나만 고르자면 나는 선규의 삶을 살고 싶다. 왜냐하면 선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화가’라는 것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선규가 편안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해도 나는 노력해서 무언가를 이루는 삶을 살고 싶다.
***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삶의 태도는 매사에 노력하는 편안한 삶이다.
나는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 다른 말로 해서 두 삶의 장점만 닮고 싶다.
열심히 노력하되 자신을 인정하고 편안하게 살되 게으르지 않는, 그런 삶을 난 살고 싶다.
'점퍼' 시점 바꿔쓰기 - 소*
“마지막으로 주말 잘 보내고 와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선생님께서 말씀을 끝내시자마자 친구들은 가방을 메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수업에 무관심하던 아이들이 왜 이렇게 빠르게 뛰어가는지 궁금했다. 학교에서 나가자 아까 반에서 보았던 친구들이 운동장 옆에 앉아서 스마트폰(이라고 했던 것 같다)으로 팡팡 소리가 나게 계속 무언가를 열심히 누르고 있었다.
“너희들 뭐해?”
그러자 걔네들이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나도 같이 해도 되냐고 물어보려 할 때 한명이 나한테 소리쳤다.
“야! 니가 방해해서 다 이긴 판에 졌잖아! 이 XXX야!”
나는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욕을 먹어서 엄청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고 미래의 창식이네 집으로 향했다. 가면서 아이들이나 어른들 할 것없이 다 스마트폰을 보면서 우두커니 서있었다. 미래의 세상에서는 나 빼고 다 스마트폰에 빠진 것 같았다.
그러다 또래 여자아이들 서너명이 모여서 스마트폰을 보면서 소리지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무슨일인지 가보았더니 아주 시끄러운 노래를 틀고 잘생긴 남자들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도 같이 보려고 했을 때 한 여자얘가 나를 보면서 물어보았다.
“너도 이 그룹 좋아해?“
“이게 뭔데?”
그러자 걔가 나를 잠깐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 후 말했다.
“그럼 말고”
그러고는 다른데로 갔다. 뭐야? 그것을 모르는 것이 잘못된 일이었나? 나는 억울해서 집으로 빠르게 갔다. 집에 들어가자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 다녀왔습니다!”
“그래. 우리 손주 학교 잘 다녀왔어?”
”네“
그러고 어제 박창식의 아버지가 나에게 화를 냈던 이유가 궁금해진 나는 할머니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창식아, 기억안나니? 어제 아버지가……”
그러고는 모든 일을 설명해주셨다. 창식이는 아버지가 일하다가 회사의 비리를 신고해 내부고발자로 몰려서 따돌림을 당하고 술을 많이 마셨다고 하셨다. 그래서 결국에는 회사를 그만두었으며 어머니와 이혼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어제 창식이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화를 내서 아버지가 창식이에게 화가 많이 나 있었다는 사실까지 알게된 후 할머니께 고맙다고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창식이는 자신이 미래에 와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어 한숨을 쉬었다.
트로이 이야기를 읽는 이유 - *혁
내가 처음 트로이 전쟁 이야기를 접한 것은 정확히 언제였는지 또렷하지 않다. 아마 어린 시절, 만화로 각색된 그리스 로마 신화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그때의 트로이는 거대한 목마와 불타는 성벽, 분노에 찬 영웅들의 이름으로 기억된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그 이야기의 깊이보다는 화려함과 비극적인 결말에 더 끌렸다. 특히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아킬레우스가 친구의 죽음에 오열하며 전장으로 돌아오는 대목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이 또 다른 죽음을 부르고, 분노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그 장면은 어린 나에게도 묘하게 무거운 울림을 주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일리아스]를 단순한 영웅담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기록한 오래된 목소리로 다시 읽게 되었다. 4–5천 년 전의 사람들이 노래한 이야기를 지금 우리가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독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건너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시 묻는 일이다. 같기 때문에 읽고, 다르기 때문에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일리아스의 첫 구절은 “분노”로 시작한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개인적인 모욕에서 비롯되지만, 그 파장은 공동체 전체를 흔든다. 그는 명예를 빼앗겼다는 이유로 전투를 거부하고, 그 결과 수많은 그리스 병사들이 목숨을 잃는다. 이 장면이 명장면인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자존심’과 ‘공동체’ 사이의 갈등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비슷한 상황을 살아간다. 조직에서의 인정, 개인의 자존감, 공정함에 대한 감각은 오늘날에도 예민한 문제다. 누군가의 상처 입은 자존심이 집단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수천 년이 지났어도 인간은 여전히 상처받고, 분노하며, 그 분노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면은 지금도 살아 있다.
트로이의 성벽 위에서 헥토르가 아내 안드로마케와 어린 아들을 만나는 장면은 전쟁 서사 속 가장 인간적인 순간이다. 영웅 헥토르는 두려움을 감추고 아들을 안아 들지만, 그의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예감한다.
이 장면이 명장면인 이유는 전쟁의 영웅담을 잠시 멈추고, 그 이면의 평범한 삶을 비추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전쟁을 ‘역사적 사건’으로만 기억하지만, 그 속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하는 한 가정이 있다. 헥토르는 나라를 지키는 영웅이지만 동시에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다.
이 장면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전쟁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고, 뉴스 화면 속 숫자로만 보이던 희생자들은 사실 누군가의 가족이다. 트로이의 성벽 위 장면은 우리가 잊기 쉬운 사실을 조용히 상기시킨다. 역사는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의 삶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가 적장 아킬레우스를 찾아가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달라 애원하는 장면은 [일리아스]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원수의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원수는 그를 보며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리고 결국, 아킬레우스는 시신을 돌려준다.
이 장면이 명장면인 이유는, 복수와 증오로 가득한 이야기의 끝에서 ‘연민’이라는 감정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잔혹할 수 있지만, 동시에 공감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적과 나를 가르는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우리는 서로의 슬픔을 이해한다.
지금의 시대에도 갈등은 끊이지 않는다. 정치적 대립, 세대 갈등... 우리는 너무 쉽게 서로를 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우스의 만남은 묻는다. 원수의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트로이 이야기에는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가치들이 있다.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 공동체를 향한 책임감, 그리고 인간적인 연민. 인간은 기술적으로는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지만, 감정의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인정받고 싶어 하고, 사랑을 잃으면 무너지고, 부당함에 분노한다. 이처럼 트로이 이야기는 인간의 근본을 건드린다. 그래서 시대가 달라도 여전히 읽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