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순서가 돌아왔다. 상자에 몇 개의 나무만이 남아 있었다. 이러저리 살펴보다 다 거기서 거기겠거니 싶어 대충 하나 골랐다. 그렇게 너를 만났다. 루뻬로 자세히 들여다보니 톱질의 자국을 따라 거칠게 표면이 일어나 있었고, 바늘로 콕콕 쑤신 듯 구멍도 보였다. 선생님께서 이제 모래종이로 부드럽게 표면을 닦으라고 하셨다. 열심히 사포질을 했다. 그리고 루뻬로 보았다. 아직 성에 차지 않는다. 거친 표면은 좀 다듬어 졌지만 숭숭 뚫린 구멍이 눈에 거슬린다. 다시 사포질을 한다. 열심히 한다. 샥샥샥샥. 그런데도 세로로 줄무늬가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줄을 따라 구멍이 나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 무심히 골랐나보다. 한참을 들여다보며 골라볼걸. 미안. 미안하다. 이런 생각은 좀 미안하다. 넌 우리의 만남을 운명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데. 주어진 시간이 점점 없어져간다. 이제 사포질을 멈추고 이름을 쓰기로 한다. 노트에 연습을 한 뒤에 푸른 색으로 이름을 썼다. 그리고 빈 공간엔 이름 "줄기"에 알맞에 초록 색연필로 덩굴같은 줄기를 그리고 빨간 열매를 그렸다. 남은 바탕엔 노란색을 칠했다. 너의 얼굴이 뽀얗지가 않아서 탁하고 짙은 색감이다. 미안. 여전히 넌 내 맘에 쏙 들진 않아. 뒤집어서 그림을 그린다. 전통 문양을 그려야한다고 생각해서 그리되 바탕이 어두워서 수성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색을 입혔다. 그리고 바탕은 푸른 색으로 했다. 나에게 파란색이 좋다고 해서 의도적으로 푸른 색을 쓰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어둡다. 난 밝은게 좋은데. 왜 사포질을 하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을까. 못내미 나무. 사포질을 다시 할까 싶었으나 너무 늦어버렸다. 이제 양초 코팅을 하는 일만 남았다. 양초 코팅을 하면 너가 반질반질 윤기가 나려나? 양초를 박박 문질러 코팅을 한 다음 초에 불을 켜서 가까이 가져다댔다. 너의 얼굴에 묻은 양초가 스르르 녹더니 곧 흡수됐다. 양초에 힘을 믿어보았으나 넌 여전히 어둡고 칙칙한데다 구멍 자국도 곰보자국처럼 남아있다. 하지만 만져보니 맨들하다. 자꾸 만져봤다. 나쁘지 않다. 제일 동그란 나무, 뽀얀 속살, 상처 없는 표면을 바라는건 나의 욕심. 언제나 이 욕심이 문제다. 기대치가 높으니 만족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가르침을 주려고 너가 나에게 온걸까. 이제 그만 미워할게. 이제 넌 내 이름표니까. 몬내미 이름표지만 내 이름표니까. 넌 나를 겸손하게 만들어주는것 같다. 히히. 고맙다. 만나서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