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e   김경주  첨부파일

Subject  나와 아이들-기질로 알아보자.(퍼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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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체질에 따른 아이들 이해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사상의학을 창시한 이제마 선생은 음양론을 바탕으로 사람을 네 가지 체질로 구분했습니다. 태양, 소양, 태음, 소음, 이렇게 사람마다 타고난 체형과 기질에 따라 자주 걸리는 병도 다르고 성격이나 생각하는 방식, 행동양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다름"은 근본적으로 음양(陰陽)과 태소(太小)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곧 사람 중에 양기가 많은 사람을 양인이라 이르고 음기가 많은 사람을 음인이라고 하며, 그릇의 크기에 따라 다시 태인과 소인으로 나눈 것이죠.
흔히 양기의 상징은 "하늘"이고 음기의 상징은 "땅"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성질은 변화무쌍합니다. 흐렸다가 맑았다가 눈이 오다가 비가 오고.... 양기도 하늘처럼 흩어지고 변화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땅은 그렇지 않죠. 어지간해서는 잘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땅은 만물을 키워냅니다. 싱그런 풀과 나무, 그것들을 먹고사는 온갖 짐승들을 키워냅니다. 땅은 생명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기도 땅과 같이 언제나 그 자리에서 만물을 키워내면서 스스로는 변화되지 않는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늘의 양기를 타고난 태양인과 소양인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기 안의 것을 밖으로 분출하려고 하고 공격적이며 날카롭고 자유롭습니다. 이에 비해 땅의 음기를 타고난 태음인과 소음인은 상대적으로 고요하고 방어적이며 부드럽고 뚜렷한 형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따금 "그럼 땅같은 사람이 좋은 거네요?" 하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과 음은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성질이 사람에 따라 좋게 나타날 수도 있고 나쁘게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지, 양의 성질은 나쁘고 음의 성질은 괜찮다는 식으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양과 음은 서로가 상대적인 것으로, 양이 없으면 음도 없고 음이 없으면 양도 없습니다.
양인과 음인의 성질을 자아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음인들은 기본적으로 자아가 자기 내부에서 작용하는데 반해 양인은 자아가 자기 밖에 있습니다. "자아가 자기 밖에 있다구요? 세상에 그런 사람도 다 있나?" 그런데 있습니다. 음인들은 살면서 즐겁거나 괴롭고 가슴 아팠던 일, 기쁘거나 슬펐던 일들을 주로 자신의 내면 세계에 저장하는데 비해 양인들은 그러한 모든 기억들을 자신의 내부가 아닌, 타인과의 관계 속에 저장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을 만나서 큰 상처를 입었다 할 때, 그 사람이 음인이면 상처를 쉽게 잊지 못합니다. 자신의 내면에 상처를 간직하고 안으로 삭이다가 불쑥불쑥 떠올리는 것이죠. 그러나 양인은 다릅니다. "이 못된 자식아!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네가 죽을 때까지 잊어버리나 봐라." 그러나 말이 그럴 뿐입니다. 상처 입힌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얼마 안 가 잊어버리죠. 애써 잊으려고 하거나 사람이 멋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내부에 상처를 간직할 저장 구조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할 때, 소양인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기억할 뿐 감정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 때문에 소양인은 과거의 상처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태음인과 소음인은 다릅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자신이 느꼈던 감정까지 고스란히 떠올라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태음인의 경우는 다른 것을 생각하면서 상처를 치유합니다. "그것만이 중요한 게 아냐. 다른 것들이 많이 있잖아"라고. 소음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묘목에 상처를 내면 자라서 죽을 때까지 흔적이 남듯이 소음인은 상처를 오래 간직합니다. 소음인이 과거의 상처 때문에 괴로워할 때는 무조건 잊어버리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그 상처에 대한 느낌이나 생각을 자꾸 말하게 하여 스스로 치유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그러면 왜 같은 양인이라도 태양인과 소양인으로 나뉘고, 같은 음인이라도 태음인과 소음인으로 나뉠까? 태소(太小)의 차이 때문입니다. 태와 소는 그릇의 크기를 상징합니다. 태는 그릇이 크고, 소는 작은 것이죠. 가령 같은 음인이라도 태음인은 생각이 넓거든요. 자기 앞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을 생각합니다. 소음인은 생각의 폭이 좁아요. 그래서 자기 앞에 있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릇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오해해서 "글쎄 소음인은 속이 좁다니까요. 자기밖에 모르고 너무 이기적이에요. 우리 남편이 딱 그렇다니까요."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생각의 폭이 좁다는 것은 이기적이라거나 속이 좁다는 것과는 다른 뜻이거든요. 태음인은 생각 주머니 같은 게 엄청 커서 자신을 둘러싼 주변 관계를 비롯하여 전반적인 사고를 합니다. 반면 소음인은 전반적인 사고를 하려고 해도 생각 그릇이 작아서 앞에 있는 것밖에는 보지 않기 때문에 "좁고 깊게" 생각합니다.
그만큼 태와 소는 큰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태"라는 글자는 "유여지유여(有餘之有餘)"로 "남고 남고 또 남을 태"라는 거죠. 소양인 소음인에 들어가는 "소"는 "부족지유여(不足之有餘)를 이르는 말로 "모자라고 또 모자랄 소"입니다. 소인은 간직함을 본으로 해야 하며, 태인은 덜어냄을 본으로 해야 합니다. 태인이 헛된 욕심을 부려, 많아서 철철 넘치는데 그걸 싸안고 있으면 괜히 병만 생깁니다. 몸의 병, 마음의 병 모두가 "소인은 고갈되어서 생기고, 태인은 넘쳐서 생기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태음인 아이가 공부를 하는데 이것저것 들여다보다가 어느 것 하나 똑바로 못하는 이유는 바로 욕심 때문입니다. "이거, 오늘밤에 몽땅 해치워야지." 체력도 뒷받침되고 성실하기까지 하니, 태음인 아이가 이렇게 생각하기는 쉽습니다. 그래서 그 욕심에 치여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못하다가 어머니한테 욕만 얻어먹고 결국에는 책상에 엎드려 자는 거죠. 그러나 그 욕심을 덜어낸 태음인 아이는 다릅니다. 마음을 비우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풀어갑니다. 그러니까 태음인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면 먼저 어떤 종류의 "욕심"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그 욕심을 덜어내야 하고, 소양인이나 소음인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면 뭐가 모자라는지, 무엇을 채우고 무엇을 챙겨줘야 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사상체질로 본 아이들의 모습
태음인은 원칙보다는 다양성을 포용하는 편입니다. 만약 한 가지에만 집중해야 한다면 따분해서 잠이 오기 십상이지요. 산에 가면 풀도, 나무도, 개울도 있는데, 태음인인 아이에게 "너는 이제부터 꽃만 봐. 이제부턴 나무만 봐. 집중 안 할래? 나무는 풀을 안 다음에 보는 거야. 니가 지금 그거 볼 때냐? 이제부터 두 달 동안 수학만 하는 거다. 알았지?" 한다면 그 아이는 어떨까요.
이 아이는 강의를 들을 때 아주 산만한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졸아버리거나. 태음인은 주변을 더듬어서 전반적인 분위기 파악이 되어야 핵심이 자연스레 들어오는 인지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핵심내용 요약! 이라는 공부 방식을 태음인에게 강요한다면 잘 할 수도 없거니와, 재미없는 공부하느라 다양한 상상력마저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한편 소음인은 집중을 잘 하며 원칙을 잘 이해합니다. 태음인과는 다르게 핵심적인 중심내용을 이해하고 그것의 깊이를 바탕으로 주변의 여러가지 복잡한 상황을 이해해가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표현하거나 간명하게 풀어내야만 직성이 풀리죠. 그러나 바로 그런 만큼 상상력이 부족합니다. 순발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자신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는 능력이 다소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소음인은 한 가지 일을 깊이 있게 파는 것은 잘 하지만,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거나 생각을 다양하게 하는 것은 잘 못합니다. 소음인은 이해만 하면 무엇이든 기억합니다. 이해한 것을 잊어버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지요. 다만 소음인의 약점은 바로 이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소음인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면 그것은 암기력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 이해력의 문제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소음인으로서는 다행스러운 것이 현재 우리 나라의 교육제도입니다. 현재 우리 나라의 교육제도에서는 소음인 아이가 아주 유리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지금 진행되고 있는 교육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그래서 아이들에게 오직 순발력과 창의성만을 요구한다면 이제 뒤에서 이야기할 소양인 아이들은 득을 보지만, 소음인 아이들은 아주 고생을 많이 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 교육방식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보는 아이들이 소양인입니다. 소양인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도 그것보다 더 좋고 새로운 방식을 발견합니다. 마치 태음인이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선생님이 언제나 올바른 것만은 아니라는 의심을 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소양인은 자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러다 어른들에게 건방지다고 야단을 듣습니다. 사실 대단히 도전적이고 독창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아이인데 말입니다. 에디슨이 달걀을 품었던 예는 소양인들의 대표적인 행동양식입니다. 소양인들이 어른들에게 야단 맞을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바로 이것이죠. "왜 너는 시키지도 않는 일을 하냐."
소양인은 감수성이 발달한 아이입니다. 좌뇌보다는 우뇌가 발달한 편이죠. 따라서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성적입니다. 소음인과는 반대로,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상황에 부딪혔을 때 순간적인 기지와 임기응변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그래서 소양인 아이는 언제나 공부한 것보다는 시험성적이 더 좋습니다. 때문에 반짝이는 머리만 믿고 공부를 게을리 하는 경우가 많지요. 또 소양인은 참을성이 없어 쉽게 싫증을 냅니다. 하지만 자신이 재미있는 일을 할 때는 집중력과 인내심이 뛰어나지요. 그러므로 소양인 아이가 공부를 잘하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공부를 재미있게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나를 알고 아이들을 알아야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책에는 한 소년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베푸는 나무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렸을 때는 놀이터가 되어주고 배가 고플 때는 열매를 주며 아이가 자라서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왔을 때에는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주는 나무. 그 나무처럼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바로 이 땅의 부모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땅의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자세가 되어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고 다들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자식"보다 소중한 것은 없어서 어려운 살림에도 과외다 학원이다, 때로는 보약까지 지어 먹이기도 하죠. 그러나 무조건 헌신적이라고 아이가 부모 뜻대로 성장해 주나요? 성장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아이 자신입니다. 부모가 아무리 좋은 약을 지어 준다고 해도 그것이 아이한테 맞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상체질 얘기를 하다가 뜬금 없이 아이에게 헌신하는 부모 이야기로 넘어가니 좀 어리둥절할 텐데요. 부모들이 너무도 아이들을 사랑해서 아이에게 맞는 교육 방식을 취한다 하더라도 별로 소용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거든요. 자신의 체질이나 기질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아이의 체질만 이해하고 거기에 맞춰 대하다 보면 자신에게 스트레스가 쌓이고 화병이 생기지요. 아이한테 잘해 주려다가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여 아이를 망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자신의 일방적인 희생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에 아이한테 은연중에 부담을 주고, 겉으로만 이해하고 배려하는 척할 뿐 전보다 더 심하게 아이한테 뭔가를 강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 "엄마는 네 단점까지도 사랑한단다." 하면서 정작 자신의 단점은 사랑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 말은 거짓말이 됩니다. 이러한 거짓말이 아이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요? 뭔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간접적으로 강요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아이의 체질을 이해하고 아이의 인생을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부모나 교사 자신이 스스로의 체질을 알고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며, 나의 장단점은 무엇이고, 나의 성격이나 사고방식, 행동양식은 어떠하며, 나에게 맞는 삶의 태도나 방식은 어떤 것인가. 이러한 것을 제대로 알아야 아이한테도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고, 스스로도 무리한 배려나 행동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이를 배려할 때도 소음인 부모가 배려하는 내용과 방법이 다르고, 소양인 부모와 태음인 부모의 내용과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아가 강하고 꼼꼼한 소음인 부모가 아이의 자존심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획을 세워서 매사에 세세하게 배려하는 스타일이라면, 느긋하고 현실적인 태음인 부모는 굵은 원칙 하나만 세우고 실생활에서 필요한 것들만 배려하는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각적이고 자유로운 소양인 부모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행동하고 아이를 친구처럼 대할 것입니다.
나를 한번 찬찬히 들여다봅시다. "나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떨 때 기꺼이 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가? 나는 어떤 식으로 배려할 때 행복하며, 자연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는가? 나의 장점은 무엇이고, 또 단점은 무엇인가?" 그 답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알고 자신의 단점까지도 사랑하면서 타인과 관계를 맺는 사람은, 스스로도 행복할 뿐 아니라 타인도 행복하게 만듭니다. 바로 그러한 바탕 위에서 서로를 정확히 이해하고 교감하면서, 올바른 관계를 맺어나가고 서로의 발전을 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체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단점까지도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자신의 체질에 따른 단점을 합리화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자신의 느낌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소양인이 남한테 상처를 주고 "난 원래 소양인이라서 그래!" 하는 식으로 말한다면 단점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악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소음인이 타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채 "난 소음인이라서 그래!" 하고 말한다면 인격의 미숙에서 오는 이기적인 행동일 뿐이지요.
자신의 단점을 사랑한다는 것은 체질적으로 자신의 긍정적인 면을 낳았던 그 이면을 인정하고, 그것을 무조건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부로서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만약 소양인이 자신의 부정적인 면, 참을성이 부족하고 신중하지 못한 면이 못마땅하다고 억지로 고치려 들면, 순발력과 활동성도 동시에 억압당하고 맙니다. 태음인이면서 한 가지 일을 똑바로 하려고 기를 쓴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만의 훌륭한 장점까지 없애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타고난 본성대로 살면서 특유의 긍정적인 면을 제대로 발휘하면서 자신에게서 부족한 면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보완하고 풀어나간다"는 것이 체질론의 핵심입니다.
만약 자신의 체질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단점을 고치려고 노력한다면, 또는 아이에게 그런 노력을 강요한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괜히 남의 체질을 부러워하거나 억지로 닮으려고 하지 말고, 먼저 자신의 체질을 제대로 알고 그것을 담백하게 인정하고 자신의 본성을 갈고 닦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맑은 마음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좋은 아내, 좋은 남편, 좋은 부모, 좋은 교사, 좋은 선배, 좋은 후배, 좋은 친구, 좋은 동료로서 남을 배려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