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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다음시간 발제순서

(1) 의식주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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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본성과 양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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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뿌리깊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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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사복청 사람들

[강채윤] 궐 안의 연쇄살인 수사를 떠맡은 말단 겸사복.소심하고 여리지만 놀랄 만한 기지와 집착으로 사건을 끈질기게 추적한다.
[정별감] 부하를 방패막이로 삼는 기회주의자이지만 채윤의 열정과 순수함에 이끌려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와 이십년 전의 비밀을 밝힌다.

궁궐 사람들

[가리온] 외소주간에서 도살을 업으로 하는 반언. 도살을 통해 배운 의술로 검안을 맡지만 그 자신이 거대한 비밀에 연관되어 있다.
[소이] 학사들과의 치정사건에 연루된 의문의 여인.풀 수 없는 의혹을 던지는 그녀에게 채윤은 자신도 모르게 빠져든다.
[무휼] 내시로 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대전 호위감.사건과 관련되어 채윤의 거듭되는 의심을 사지만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윤후명] 금서를 보관하는 비서고를 지키는 장서관.오랜 세월 금서를 통해 얻은 필적에 대한 놀랄 만한 지식으로 사건 해결에 기여한다.

집현전 사람들

[성삼문] 냉정하고 이지적인 집현전 수찬. 일련의 살인사건에 불 안을 느끼면서도 채윤을 돕는다.
[이순지] 궁중 천문연구기관인 서운관 관원.산학과 천문에 뛰어나 천문학을 이용한 놀라운 추리로 위기에 빠진 채윤을 구한다.
[최만리] 집현전의 초대 학사로 최고수장인 대제학에 오른다. 경학 위주의 보수적 학풍으로 전통적 권위를 지키려는 경학파를 이 끈다.
[정인지] 집현전 부제학.전통 경학보다는 천문,기술,농학,의학 등을 중시하는 실용학파의 수장으로 최만리와 대립한다.
[심종수] 집현전 직제학으로 최만리의 뒤를 이을 경학파의 중간 거두. 시전 상인의 영수인 윤길주를 비호하며 최만리의 뜻을 실행한다.
[강희안] 자유로운 성격의 집현전 학사로 사건의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의문의 그림을 그린 장본인.

02. 지혜학교 - '대안학교 졸업생' 수능 만점…지혜학교 출신 심지환군

 대안학교 졸업생이 두 번의 도전 끝에 2018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만점을 맞았다. ‘국내 첫 미인가 대안학교 출신 수능 만점’의 주인공은 심지환(19) 군이다. 14일 광주광역시 지혜학교에 따르면 지난해 이 학교를 졸업한 심군이 이번 수능에서 만점을 받았다. 교육부가 발표한 15명의 만점자 가운데 유일한 검정고시 출신이다. 경기 광주시에 살던 심군은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있는 미인가 대안학교인 지혜학교에 2011년 입학한 뒤 올해 2월 졸업했다. 이 학교에서 중고교 통합과정을 마친 심군은 검정고시를 치르고 지난해에 이어 올해 수능에 도전했다. 
  
 심군은 공교육을 받은 것이 초등학교 6학년 때 단 1년뿐이라고 한다. 또래들과 달리 어린 시절부터 대안학교를 다녔다. 심군이 진학ㆍ졸업한 지혜학교는 6년간 교육 과정을 운영한다. 일반 중ㆍ고교가 대학 진학을 목표로 집중하는 ‘국영수’가 아닌 ‘철학’ ‘인문통합’ ‘예술통합’ 등 위주의 교육을 한다. 심군도 마찬가지였다. 지혜학교의 재학생은 약 110명, 교사는 교장을 포함해 25명이다. 

 심군은 친구, 선후배들보다 유난히 책 읽기를 좋아했다는 게 교사들의 기억이다. 특히 책을 잃은 뒤 토론을 할 때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뚜렷하게 표현하곤 했다고 교사들은 전했다. 지혜학교 장종택 교장은 “책을 잃으면 홀로 깊게 사유하면서도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장 교장은 지혜학교가 입시 위주의 교육을 하는 학교가 아닌 점에서 심군의 수능 만점 비결은 본인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장 교장은 “우리 학교에서는 수업 시간 외에 자기 스스로 시간을 활용해야 할 때가 많은데 심군은 이 시간 수능을 묵묵히 준비했던 것 같다”고 했다. 또 “대안학교 과정을 통해 수능을 잘 볼 순 없다”고 덧붙였다. 
  
 심군은 서울대 경제학과에 진학할 예정이라고 한다. 장 교장은 “대안학교에서도 심군처럼 좋은 수능 성적을 거둬 명문대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종종 있다”며 “학교가 특별히 무엇을 잘 가르친 것은 아니다. 학생들마다 다른 개성과 능력을 살릴 수 있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03.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 "학벌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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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 학벌사회 비판최근 시민단체 "학벌 없는 사회"가 자진해산 되었는데, 씁쓸하다. 이는 학벌이라는 '상징자본'을 가졌다 하더라도 취업이 녹록치 않는 각박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세간에서 더 이상 '학벌사회'라는 것이 교육문제의 중심의제로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과거 <학벌사회>를 출간한 김상봉을 위시한 많은 학자들이 학벌사회에 이의를 제기하고 이것이 민주노동당 시절 진보적인 교육정책의 핵심의제로 반영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까지 느껴진다. 최근에는 '학벌'보다는 반값등록금과 같은 '교육비'와 '대학기업화 비판'이 중심적인 의제였다. 하지만, 과연 학벌이라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해체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오히려 최근의 진보진영이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 건가? 한편 SNS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학벌에 반대하며 출신학교를 기재하지 않습니다'라는 상태표시를 띄워놓는 것을 볼 수 있다. '상징자본'으로서의 학벌에 대해 여전히 사람들이 민감하다는 지표이다. "학벌 없는 사회"라는 시민단체는 해체되었지만 "학벌"은 여전히 해체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03-2. 대학기업화시대의 학벌사회 : 학벌사회가 나쁜 가장 큰 이유는 각자의 열패감과 우월의식을 떠나서 경제적인 차원에서는 "자원의 낭비"라고 생각한다. 학벌은 기본적으로 "위치재(positional goods)"이다. 위치재란 본질적으로 콘서트 티켓과 같다. 평소 동경하던 연예인을 남들보다 가까이 보기 위해, 맨 앞자리, 그게 아니라면 그 뒷자리, 그게 아니라면 그 뒤의 뒷자리라도, 남들보다 먼저 차지하기 위해 돈 몇 십만원씩도 지출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재화라고 보면 된다. 이런 앞자리 콘서트 티켓을 얻기 위한 출혈경쟁을 낭비적 군비경쟁에 비유하기도 한다(이준구). 학벌도 본질적으로 그런 콘서트 티켓과 똑같다. 지금은 옛말이지만 SKY-서성한-중경외시와 같은 서열도 그러한 위치재의 속성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대표적으로 남들보다 한자리 석차 우위를 점하기 위해 돈 몇백 몇천만원도 아까워 하지 않은 사교육 열풍이었다(물론 이것도 호경기에서나 가능한 여유지만). 이러한 사교육 과열도 대표적인 "낭비적 군비경쟁"이다. 그런데 요즘 같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비단 경쟁이라는 것이 수험생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학벌이라는 것이 "위치재"인 것은 학생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다. 대학 그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대학도 그런 의미에서 치열한 순위경쟁, "낭비적 군비경쟁"을 벌인다. 학벌사회에서 비단 과거와 같은 "입시지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대학들도 "지옥" 같은 학벌경쟁을 한다. 무한경쟁의 시대가 개막된 이후로 과거의 SKY-서성한-중경외시 등의 서열은 이제는 더 이상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대학마다 대학평가 등의 지표로 나타나는 학벌상의 순위를 높이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해왔다. 그래서 건물도 화려하게 많이 짓고 유학생도 많이 유치하고 외국인 교수도 많이 초빙하고 국가 연구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 로비도 많이 했다. 이러한 대학 간 학벌경쟁의 궁극적인 결과는 특히 사립대학들의 "몸집 불리기"였고 결과적으로 교육비의 폭증을 가져왔다. 이게 왜 낭비인가? 개별 대학이 그 동안 자신이 잘해왔던 부분(비교우위)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서 자신의 장점을 특화하고 그렇게 해서 사회에 공헌하는 것을 가로막고,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절대우위)"는 대학간판 특유의 허울 좋은 유명세를 알리는 데 급급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분수에 맞지 않은 규모의 학생을 유치하고, 자기 분수에 맞지 않은 교수를 무리해서 초빙하고, 자기 분수에 맞지 않은 영어 강의를 의무화하고, 자기 분수에 맞지 않은 건물을 증축해왔던 것이다. 그 결과 비효율적인 교육비의 증가를 초래한 것이다. 이런 몸집불리기는 학문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학벌장사로밖에 설명을 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런데 당장의 학벌장사를 위해 돈을 갖다 바치겠다는 학생과 유학생 다 받아놓았는데 정작 그들의 복지와 편의를 위한 비용은 감당 못하겠으니, 상위권 대학들조차 이와 같은 '발전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또한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결국 고등학교 시절 자신이 무엇을 자신의 전공과 진로로 삼을 것인지를 동기로 대학진학이 정해져야지, '어느 대학을 갈 것이냐'로 정해져서는 안 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무슨 대학을 갈 것이냐'를 기준으로 성적에 맞춰 대학에 진학한다. 대학도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몸집을 불려왔다. 그렇게 해서 학벌을 득해봤자, 그 누구도 무슨 학문분야의 노벨상을 받는 것도 아니고, 지금 이 경직적이고 위계적인 노동시장을 재생산하는 데 일조할 뿐이다. 또 소위 명문대생이라는 사람들도 직장 잡고 나서는 이게 내 진짜 적성인가 하고 고민하거나 그만 둬버리는 경우가 심심찮다. 대학 진학 당시에 했어야 할 고민을 유예시켜서 뒤늦게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하는 것. 이것이 학벌사회의 가장 큰 문제이다.

03-3. 학벌사회와 대학구조조정특히 지금 진행되는 지방대 비인기학과 위주로 진행되는 대학구조조정과 학과통폐합이 나쁜 이유는, 그것이 이 학벌구조를 더 강화시키는 데 일조할 뿐 진짜 자원의 낭비가 행해지도록 부추기는 학벌구조를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낭비의 원인이 되는 학벌구조를 강화시킨다. 결국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학벌경쟁에서 도태된 대학들이지 저 학벌경쟁을 통해 몸집을 불려온 유명 사립대학들이 아니다. 예컨대, 고려대 학부생 2~3만에 대학원 재학생 수료생 1만이다. 합치면 3~4만 명인데, 과거 고대 그리스 폴리스(아테네) 인구도 이것보단 적을 것이다. 또한 현재 학령인구감소를 감안할 때 '대학이 쓸데 없이 많다'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대학생 입학정원' 수를 가장 많이 늘린 대학들은 수도권의 소위 명문 사립대학들이었다. 구조조정의 우선순위는 바로 이들이어야 한다.

04. 에머슨과 소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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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질문명을 가장 높게 사던 미국사회에서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자연문명을 지킨 정신사적 버팀목이요, 비폭력무저항주의 원천으로 추앙받고 있다. 산을 깎고 들을 밀어내어 도시를 만드는 그 사회 속에서 그는 콩코드 숲과 강을 벗 삼아 자연 속에서 살림을 꾸려나갔고, 매사추세츠에 내야할 인두세를 내지 않아 감옥에 들어가는 것도 전혀 꺼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미국 사회에서 위대한 정신사를 이끈 큰 나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 혼자의 노력은 아니었다. 그를 곁에서 식구처럼 대해주었고, 학교 교사와 연필 공장에만 전념했을 그를 미국 문학계에 뛰어들게 하여 가장 뛰어난 인물로 만들었던 한 사람이 있으니, 미국 최고의 지성인으로, 당대 '초월주의'라는 직함을 얻고 살았던 에머슨(Ralpe Waldo Emerson)이 바로 그다. 

 물론 에머슨도 소로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에머슨이 초월주의에서 점차 현실주의로 접어들게 했던 것은 그 자리에 소로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둘은 스승과 제자로 만났지만 점차 뗄 수 없는 가장 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 두터운 우정 속에도 사상적인 간격은 자리했고, 그 때문에 둘이 갈라지는 듯하면서도 또 하나가 되는 그런 일이 되풀이되기도 했다.

 그와 같은 사실들은 하몬 스미스가 쓴 <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서보명 옮김•이레•2005)에 잘 나타나 있다. 

 "소로우와 에머슨의 우정은 소로우에겐 인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에머슨에겐 매우 소중한 역할을 했다. 이 책은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다룬다. 1837년 4월 어느 오후 처음 만난 날부터 25년 뒤 소로우가 죽을 때까지 그 발자취를 따라갈 것이다."(감사의 말)

 그만큼 이 책은 다른 전기작가들처럼 독립된 소로우를 그려내는 게 아니라, 소로우가 에머슨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또 소로우는 에머슨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서로들 주고받은 사상과 그들 사이에 주고받은 우정어린 관계를 그려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들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계기는 이렇다. 에머슨이 <자연>이란 작품으로 고심하던 차에 아내와 사별하게 되고, 두 번째 아내인 리디안 잭슨 에머슨을 맞이해 보스턴에서 19마일 떨어진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숲에 신혼살림을 꾸리게 된다. 그 즈음 리디안의 언니 루시 브라운도 그곳 근처에 세를 얻어 살게 되는데, 바로 그 집이 소로우의 집이었던 것이다. 

 당시 소로우는 연필공장을 하는 집안 살림 때문에 가난한 대학생활을 면치 못했다. 그렇지만 모든 대학생들이 에머슨의 영향을 받았듯이, 그도 에머슨의 강연과 글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당시에 풍미했던 엄격한 칼빈주의 예정설에 묶여 있는 것으로부터 해방되길 원했다. 그만큼 자유롭고 멋진 한 세상을 살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소로우는 에머슨이 쓴 <자연>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고, 소로우의 집에서 세 들어 살던 리디안의 언니 루시 브라운은 자연스레 소로우와 에머슨을 엮어 주게 됐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소로우는 <자연>을 읽고서 정말로 열광했다. 갈팡질팡하던 자기 인생의 내적 방황을 드디어 끝낼 수 있게 됐다며, 너무나 흡족해 했기 때문이다.

"이미 뉴잉글랜드에서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로 이름이 날리던 그와 더 친한 관계로 발전하기만 한다면 자신의 미래가 완전히 바뀔지 모를 일이었다. 헨리를 봄방학을 마치고 케임브리지에 있는 기숙사로 돌아와 에머슨의 사상을 폭넓게 이해해보기로 작정했다. 그 해 남은 기간 내내 그는 <자연>을 대학도서관에서 자주 대출했다."(22쪽)

 그때를 기점으로 둘은 가까워졌고, 에머슨의 도움으로 소로우는 대학에서 장학금도 타게 된다. 더욱이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는 에머슨의 주선으로 좋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곳 학부모들의 간섭 때문에 소로우는 얼마 있지 않아 그 일을 그만 둔다. 그것을 계기로 소로우는 에머슨의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으니, 둘은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집에서 소로우는 집안일을 돌보며 에머슨의 자녀들과 놀아주기도 한다. 물론 시간이 나는 대로 콩코드 강변을 따라 걷기도 하고, 틈틈이 일기를 썼는데, 이는 모두 에머슨이 일러준 덕택이었다. 그 사이 에머슨은 이곳저곳으로 강연을 나가고, 그 빈 구석을 소로우가 메우기 시작한다. 강연을 나간 에머슨은 소로우가 집안에 있으면서도 속히 자신만의 가치를 담아낸 문학작품을 써내도록 편지로 다그친다.

 그래서 소로우는 몇 편의 습작을 쓰기도 하지만, 에머슨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소로우가 쓴 작품이 맘에 들지 않았던 까닭은 그가 쓴 글들이 짜임새가 없다거나 감동이 없다는 이유도 적지 않았지만 정작 더 중요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에머슨이 품고 있는 초월주의 시각과 소로우가 품기 시작한 시각들 사이에 서서히 균열이 생겼기 때문이다. 

"에머슨은 자연을 특정한 현상과 관련짓지 않고 추상적으로 다루지만, 헨리는 직접적인 관찰을 자기 스타일의 기초로 삼았다. 그러나 에머슨이 헨리의 글을 달갑게 보지 않는 건 그 이유만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헨리가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은 것은 올바른 방향이라 인정하지만, 에머슨이 놀란 것은 그 에세이에서 둘의 지적 행로가 달라질 수 있다는 실마리를 읽었기 때문이다."(121쪽)

 그렇지만 그러한 지적(知的) 틈새 때문에 에머슨도 자신을 들여다볼 기회를 갖게 되었고, 그 때문에 언젠가는 소로우가 위대한 작품을 낼 것이란 기대 또한 저버리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에머슨은 훗날 자신이 산 땅에 소로우가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는 집을 짓고 살도록 땅을 내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소로우는 1845년 7월 4일 독립기념일에 맞춰 월든 호수가로 옮겨가 살게 되었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뒤에는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의 일주일>이란 작품을 써내고, 6년이 지난 1852년에는 그야말로 불후의 명작인 <월든>을 펴내게 된다.

 그처럼 미국 역사상 정신사적인 르네상스를 이끈 거장 소로우는 에머슨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에머슨 없는 소로우는 결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에머슨에게 소로우는 둘도 없는 제자요, 소로우에게 에머슨은 둘도 없는 스승이었던 것이다. 

 둘이 그토록 위대한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겠는가? 성격도 한참이나 달랐고, 나이 차이 또한 14년이나 났던 그들이 어떻게 하나로 엮어질 수 있었던가? 제자와 스승의 관계에서 오는 오해와 불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사상과 그것을 표현해 내는 글의 짜임새 때문에 경쟁관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었던가? 그 끈끈한 밑바탕에는 도대체 무엇이 자리잡고 있었던가? 

 그것은 오로지 하나, "친구는 또 하나의 나"라는 진정어린 '우정' 때문이었다. 이는 에머슨이 <우정>이란 작품을 통해 밝힌 바 있듯이,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사는 귀족이나 귀부인과 맺은 우정들은 쉽게 변할 수 있지만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지닌 소로우와 맺은 우정은 결코 변질되거나 퇴색될 수 없다는 그 우정 때문이었다.

05. 삶을 존중하고 길을 소중히 하고 from <강의> by 신영복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 되며(不忍人之心),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溫故知新)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에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서구인들의 동양에 대한 인식을 원천적으로 결정하고 있는 막스 베버에 대하여 언급해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막스 베버는 동양 사회의 정체(停滯)가 바로 이 현실주의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버의 동양 사회에 대한 비판은 자본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한 장치적 의미 이상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이곳에서 자세하게 언급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막스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하는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는 한마디로 적게 소비하고 많이 저축하여 자본 축적을 이루어냈으며 나아가 자본주의라는 최선의 사회 제도를 가능하게 했다는 논리입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금욕주의가 바로 신의 소명(God’s calling)이라는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양적 현실주의에는 바로 이 합리적 제어 장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근검절약이라면 오히려 거꾸로 된 주장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낭비 체제를 프로테스탄티즘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양 사상이 비록 윤리적 차원의 현실주의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현실주의가 곧 현세에 대한 탐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요. 

 여기서 자본주의가 과연 프로테스탄티즘의 근검절약에 의해서 성립하고 발전해왔는가,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를 기준으로 동서양을 비교하는 방식이 근본에 있어서 비대칭적 구조가 아닌가를 논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베버는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 윤리를 개진한 것이기보다는 자본 논리를 합리화하는 맥락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동양 사상에 대해 저급한 이해의 층위를 드러냈을 뿐이지요. 다만 그처럼 예찬한 자본 축적 과정이 근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과연 어떠한 비극으로 점철되고 있는가에 대하여 베버는 최소한의 전망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만은 지적되어야 할 것입니다. 동양 사상이 비종교적이며 현실주의적이라는 점은 베버가 옳게 지적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주의를 현세적 향락과 체면의 문화로 규정하고 있는 논리적 무리인 것이지요.

 동양 사상은 물론 사후(死後)의 시공(時空)에서 실현되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현세를 신의 소명(Beruf, Calling, Vocation)과 직선적으로 연결시키는 단선적인 신학적 사유 체계가 아닙니다. 비종교적이고 현실주의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베버의 주장이 틀린 것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형식주의와 체면에 대하여 지적한 것 역시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담겨 있는 의미를 온당하게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지요. 체면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인간관계를 내용으로 합니다. 그런 점에서 체면은 사회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형식주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관계를 일정하게 사회화해야 하는 경우 필연적으로 일정한 형식이 요구됩니다. 어떤 형식을 부여하여 전범(典範)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종교적 형식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형식은 불가피하게도 어느 정도의 부정적이고 경직된 측면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베버의 체계에는 동양 사상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관계론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관점이 결여되고 있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며,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현실이 곧 소중한 가치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서양에서는 철학을 Philosophy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智)에 대한 애(愛)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양의 도(道)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beaten pass)입니다. 도(道) 자의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착(辵)과 수(首)의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착(辵)은 머리카락 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입니다. 수(首)는 물론 사람의 머리 즉 생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도의 어원에 대한 논의도 많습니다. 도(道)는 도(導)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 경우의 도(導)는 이민족의 머리를 손에 지니고 재액(災厄)을 막으며 선도(先導)하여 적지(敵地)로 나아가는 의미라고 합니다. 대단히 무서운 글자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도(道)가 도덕적 의미로 사용된 예는『서경』(書經)에 와서야 처음 그 용례가 발견되고 있으며, 도의 의미를 철학을 의미하는 이른바 존재에 대한 인식 방식이나 나아가 형이상학적 의미로 발전시킨 것은 장주(莊周) 일파의 철학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원이나 용례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도는 그것이 철학이든 도덕이든 어느 경우에나 도로와 길의 의미입니다. 도는 길처럼 일상적인 경험의 축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서양의 철학과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로댕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이 조각은 턱을 고이고 앉아서 묵상하는 자세입니다. 이러한 묵상적인 자세가 상징하고 있는 철학적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진리란 일상적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고독한 사색에 의해 터득되는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란 이미 기성의 형태로 우리의 삶의 저편에 또는 높은 차원에 마치 밤하늘의 아득한 별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그것을 사랑하고 관조하는 구도 속에 진리는 존재합니다. 

 이것은 매우 큰 차이입니다.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도재이(道在邇),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 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 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

06. 서울역 노숙자 200명 환경 미화원으로 승격

 최근 6년 동안 서울역 노숙인 200명이 청소원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서울시는 코레일ㆍ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와 함께 진행하는 ‘희망의 친구들’ 시범사업을 통해 지난 2012년부터 노숙인 200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고 28일 밝혔다. 

 ‘희망의 친구들’은 자립 의지가 있는 노숙인 20명을 6개월 간격으로 추려 청소 일거리를 제공하고 주거, 자립 등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시는 선정된 20명에게 6개월간 월 25만원 이하 월세를 지원한다. 코레일은 서울역광장 일대 청소 일자리를 줘 하루 3시간, 월 20일 근무로 식비 포함 월 53만원을 준다. 내년에는 최저임금 상승에 따라 임금을 월 60만원 이상으로 올릴 방침이다.

 아울러 '다시서기 종합지원센터'는 주거, 업무, 안전, 소양 등 필수교육을 담당한다. 또 노숙인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자활과정을 운영하며, 지속적인 상담으로 상위 일자리에 진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로 인해 실제로 200명 중 일부는 코레일 승하차 요원으로 뽑히기도 했다. 시 관계자는 '희망의 친구들' 사업으로 연 평균 서울역 일대 거리 노숙인 수는 2011년 204명에서 올해 125명으로 40%가량 감소했다”고 설명했다. 

 김용복 시 복지본부장은 “노숙인들도 기회를 주면 우리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며 “향후 보다 많은 노숙인의 사회복귀를 지원하는 다양한 사업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2011년 8월 22일 코레일 - 노숙인들 강제 퇴거조치]에 대한 의견들

 노숙인들은 도심의 비둘기와 닮았다. 비둘기는 행인들의 발걸음과 인기척에 신경쓰지 않고 이리저리 날개를 퍼덕이며 먹잇감을 구하러 다닌다. 이들도 사람들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쓰레기통에 몸을 반쯤 접어 걸치고 뭔가를 찾는다. 그 속에서 반쯤 탄 담배꽁초도 건지고, 때로는 먹을거리도 건져 올린다. 보행자들은 이들과 마주치면 멀찌감치 돌아서 간다. 지저분한 행색과 지독한 냄새, 거칠고 무례한 행동 등 모든 게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우리 사회의 노숙인 이야기다.
 
노숙인 바라보는 시각 바꿔야

 대전에서 순대볶음 노점상을 하다 실패해 서울로 올라온 박아무개(37)씨는 서울역 대합실에서 먹고 잔다. 이따금 건축공사장에 가서 하루 이틀 허드렛일을 해주고 돈을 벌기도 했는데, 요즘은 건축경기가 없어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노숙생활 10년 째, 몸과 마음은 지칠대로 지쳐있다.박씨는 "시민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노숙자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며 "서울역에서 노숙자들 모두 나가라고 하던데, 여기서 먹고 자고 일하러 나가는 사람들이 당장 어디로 가느냐"고 말했다. 코레일이 이달 22일부터 서울역 노숙인들을 강제퇴거 조치하기로 결정하자 노숙인들과 시민단체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코레일은 노숙인들의 구걸행위와 소란 등으로 끊이지 않는 민원을 해소하고 서울역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 300여 명에 달하는 노숙인을 역사 밖으로 내보내기로 했다. 

 20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공동대책위원회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노숙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오갈데 없는 사람을 쫓아내는 것은 반인권적 처사"라고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서울역 노숙인 강제퇴거 철회ㆍ공공역사 홈리스지원 대책 마련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조직해 강제퇴거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여성 노숙인 쉼터인 수선화의 집 김기혜(젬마) 원장은 "전 세계가 노숙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서울역사처럼 몇백 명이 모여있는 곳도 드물다"며 "서울역에서 강제퇴거시키면 이들은 다른 곳으로 몰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서울역에서 2년간 노숙생활하다 자립한 김아무개(36)씨는 "노숙인을 보기 싫다는 이유로 쓰레기처럼 수거하는 것"이라며 "돈 벌 능력이 없어서 내 몸 하나 쉴 곳 없는 사람들을 어디로 가라는 거냐?"고 물었다. 서울역은 노숙인 사이에서는 '정보센터'로 통한다. 쪽방촌 등 다양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고 무료급식소가 많아 적은 비용으로도 노숙생활이 가능하다. 지방에서 올라온 무일푼의 노숙인들은 대부분 서울역사로 몰린다. 

 서울시는 서울역에서 강제퇴거당하는 노숙인들을 위해 임시주거지원 100호, 일자리 200명 지원, 상담인력 증원 등의 대책을 내놨다. 그러나 노숙인들과 시민단체들은 "그건 대책이 아니라 서울시가 노숙인들 동사(凍死)를 막기 위해 겨울마다 시행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홈리스행동 집행위원장 이동현(36)씨는 "노숙인은 질서 이탈의 문제가 아니라 빈곤의 문제이므로 사회복지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면서 "공공역사에 위기개입센터(가칭)와 같은 긴급구호센터를 만들어 사회복지사를 배치하고 노숙인들에게 적절한 도움을 줘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어 그는 "미국이나 프랑스는 터미널과 공공역사에 상담소를 설치해 노숙인을 위한 다양한 복지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덧붙였다.
 
단속•통제가 아닌 지속적 관심과 지원을

 IMF 외환위기 극복 이후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 있던 노숙인 문제가 다시 사회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당장 코레일 측과 노숙인들 간의 충돌이 불가피해 보인다.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IMF 외환위기 때에 비하면 정도는 덜 하지만 노숙인 문제는 여전히 사회적 관심과 대처가 필요한 현안"이라고 말한다. 보건복지부는 전국 노숙인 수를 430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1만여 명에 달한다는 게 관계자들 말이다. 극심한 빈부격차는 말할 것도 없고, 구조조정이나 사업 실패로 한 번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기 힘든 사회구조에서는 노숙인이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 때처럼 정부와 민간단체는 임시보호소 설치, 무료급식 등의 응급구호 성격의 대처 외에 달리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가톨릭교회도 IMF 외환위기 당시 실직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자 가톨릭실직노숙자복지협의회를 조직해 다양한 복지사업을 벌였지만 지금은 뜸한 편이다. 3년 전 무료급식사업을 중단하고 쪽방촌을 운영하고 있는 사랑의 나눔회 박대성(바르나바) 원장은 "초창기에는 노숙인들에게 무료급식이 필요했지만 어느새 하루 열 끼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무료급식소가 늘어났다"고 우려했다. 따라서 "이들을 노숙생활에서 구제하려면 다른 방식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톨릭 사회복지 관계자들은 "이제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노숙인 복지사업에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시적인 무료급식이나 일방적인 쉼터 수용 차원에서 벗어나 그들이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맞춤형 복지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지시설 '마더데레사의 집' 시설장 김옥봉(사랑의선교수사회) 수사는 "노숙인들은 마음의 상처가 많아 쉼터에서 갇혀 지내는 것을 힘들어하고, 일자리를 구해줘도 일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며 보다 세심한 맞춤형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가톨릭행려인복지협의회 하태욱(미카엘) 회장은 "거리에서 생활하는 노숙인의 90%는 만성질병과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다"며 "노숙인을 병원에 입원시킬 경우 정신과 치료도 받을 수 있도록 연계 프로그램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07.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우리 안의 옥시덴털리즘 from 민족문화연구원 by 염운옥

패권국의 이동

 역사가가 아니더라도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역사상 어느 국가도 패권국의 지위를 영구히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거대한 원형경기장에서 정복 전쟁을 재현하는 모의해전과 검투시합을 관람하며 열광했던 로마시민들에게 로마제국의 번영은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고 불렸던 고대 로마제국의 번영은 200년을 넘기지 못했다. 19세기 중반 영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며 인도를 비롯해 광대한 식민지를 거느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군림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영제국도 미국에 패권을 넘겨주어야 했다.
   
 최근 미디어에서는 현재의 세계 패권국은 미국이지만 짧게는 10여년 길게는 50여년 정도 지나면 중국이나 인도가 패권국이 될 것이라는 예단이 자주 보인다. 저널리즘에서 자주 보이는 이런 상투적인 주장은 중심국의 권력이 탈중심화되고 서구와 미국의 지배가 끊임없이 도전받고 있는 현실을 일면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중국은 머지않아 일본을 앞지르고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 주도권을 장악할 것이며 나아가 미국의 아성에 도전할 것으로 보인다. 인도 역시 눈부신 경제성장 속도를 자랑하며 급속하게 산업화, 근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2015년 영국 국회의사당 광장의 처칠 동상 옆에 간디 동상이 세워졌다는 사실은 구(舊) 식민지배국 영국과 피지배국 인도 사이의 역학관계 변화의 단적인 사례다. 이렇게 되면 다음 세기의 주인공은 중국이나 인도가 되지 않겠느냐는 예측은 타당성이 있게 들린다.

 그러나 9.11 테러 이래 도전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미국의 지배는 여전히 견고하다. 미국은 세계의 경찰국가를 자처하며 자국에서는 테러와의 전쟁에 열을 올리며, 세계 여러 지역의 분쟁에 개입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좌파 사상가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가 공저 『제국』 Empire 에서 치밀하게 분석했듯이, 미국의 지배는 근대 국민국가를 기반으로 했던 지난 세기의 제국주의 현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 권력이다. 미국이 구축하는 것은 식민지를 보유한 ‘제국주의’가 아니라 국가의 경계를 넘나들며 유동하는 자본과 노동력, 유엔 등 초국가적 국제분쟁 조정기구, 생명정치(biopolitics)의 규율과 통제를 특징으로 하는 전(全)지구적 주권으로서의 ‘제국’이다. 어디에나 존재하며 동시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탈중심화되고 탈영토화하는 지배의 장치가 바로 경계를 알 수 없는 ‘제국’이라는 것이다.

 제국에 관한 네그리와 하트의 분석을 염두에 둔다면 패권국의 중심이 중국이나 인도로 이동할 것이라는 저널리즘의 상투적 주장은 탈중심적이며 전지구적인 현대 권력의 성격을 간과한 순진한 발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순진해 보이는 발상’의 밑바닥에 무언가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패권국의 이동이라는 관념은 근대주의와 거기서 파생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과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에 그 뿌리가 닿아 있다. 오리엔탈리즘 개념과 변형된 오리엔탈리즘으로서 옥시덴탈리즘 개념은 말할 것도 없이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것이다.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을 넘어서
 
 우리의 안에 존재하는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의 모순적이며 기묘한 결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선, 우리의 인식 속에 뿌리깊이 자리한 옥시덴탈리즘에 관해서 이다. 패권국의 이동이라는 발상은 ‘힘이 곧 정의’라는 사회진화론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에 깔고 있다. 19세기의 강대국이 영국이었다면 20세기는 미국의 세기이며 21세기는 동아시아와 중국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주장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사회진화론에 그 논리적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진화론적 사고는 서구가 경험한 근대화의 경로를 우리도 뒤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다름 아니다. 이 때 서구는 ‘근대의 화신’이자 ‘문명의 표상’으로 신화화된다. 실상과는 달리 서구를 이상화하고 따라야 할 모델로 설정하는 인식이 옥시덴탈리즘이다. 서구가 행한 식민지 지배를 혐오하는 감정과는 별개로, 우리도 힘을 가지려면 제국주의 국가를 모델로 해서 ‘조국 근대화’를 달성하고 따라잡아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옥시덴탈리즘에 갇혀 있다는 말이다.
   
 옥시덴탈리즘적 사고에는 왜 영국이나 미국의 특수한 예가 ‘보편적인 모델’이나 ‘역사의 바른 길’로 인식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반성이 없다. 선진 유럽 국가들과 미국이 성취한 근대 문명에 감탄과 부러움의 시선을 보내면서도 이들 국가들이 식민지와 관련된 온갖 악행을 저지른 장본인이라는 사실은 쉽사리 망각된다. 16세기 이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은 원주민 학살과 노예무역을 수반했으며, 19세기 영국은 중국과의 차(茶)무역에서 발생한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밀매하는 범죄도 서슴없이 저질렀다. 또한 옥시덴탈리즘의 서구중심주의적 사고 속에서는 16세기 유럽의 팽창이 본격화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과 인도의 경제력은 서양을 능가했으며, 근대 자본주의 경제로의 이행기에 서양은 동양의 인프라와 부에 무임승차했다는 사실 역시 포착되지 않는다. 안드레 군더 프랑크(Andre Gunder Frank)의 『리오리엔트』 Reorient 같은 연구는 근대 자본주의 성립기에 서양은 동양의 우월한 경제력에 의존했었다는 주장을 구체적인 통계로 입증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오리엔탈리즘이다. 강대국의 패권이 미국에서 중국이나 인도로 바뀔 것이라는 전망에 한국인들이 각별한 공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구 제국주의의 피해를 입었던 아시아 지역에서 다음 세기의 세계질서를 주도할 강대국이 출현할 것이라는 예상은 약소국으로서 설움을 당해온 한국인들에게 통쾌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에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 지배를 당했던 아시아인으로서의 동질감과 피지배의 경험자이기 때문에 평화 공존의 세계질서를 구축할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기대감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런 감정이야말로 또 다른 오리엔탈리즘, 즉 ‘긍정적 오리엔탈리즘(positive orientalism)’의 산물에 다름 아니다.

 인도는 200여 년간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으며, 중국 역시 1840년 아편전쟁 이래 서구 열강의 반(半)식민지 상태를 경험했다. 가야트리 스피박(Gayattri Spivak), 호미 바바(Homi Bhabha) 등 포스트식민주의 주요 이론가들이 인도 출신이며, 포스트식민주의 역사학을 주도하고 있는 서발턴(subaltern) 그룹과 같은 역사가 집단이 인도에서 배출된 것도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에서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있듯이,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이 제멋대로 그려왔던 동양의 모습을 탈피하고 원래부터 있었던 동양의 우월한 저력을 보여주겠다는 것이 ‘긍정적 오리엔탈리즘’이다. 서양이 동양을 타자화하고 비하하는 서구중심주의적 인식이 ‘부정적 오리엔탈리즘(negative orientalism)’이라면 이에 맞서 동양이 자신을 이상화하는 인식이 ‘긍정적 오리엔탈리즘’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문제는 긍정적 오리엔탈리즘이 민족주의와 결합할 때는 타민족, 타종교, 타인종에 대해 매우 억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1992년 아요디야에서 벌어진 참극은 민족주의와 결합된 흰두 근본주의가 낳은 비극이었다. 아요디야 유적지는 힌두교도와 무슬림이 서로 자신들의 종교 성지라고 주장하는 곳이다. 아요디야는 힌두교의 영웅신 라마의 탄생지다. 그러나 1528년 이슬람 세력인 무굴제국이 이곳을 점령한 뒤 바브리 사원을 지었으며 이후 500여 년 동안 양측이 성지 연고권을 주장하며 갈등을 겪어왔다. 흰두교도들이 1992년 바브리 사원을 파괴하고 힌두교 사원을 세우려 한 뒤 종교 집단 간 충돌이 빚어져 2,000여명이 숨졌다.

 과거의 약소국이 패권국가가 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공생과 공존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오히려 힘을 가지게 된 약자의 폭력은 더욱 위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과거의 피해와 상처가 현재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면 칼날을 마구 휘두르는 것을 더욱 제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자가 강자로 전환하는 힘의 논리의 추종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얻어지지 않는다. 21세기 우리가 새로이 경계해야 하는 것은 강자로 올라선 과거 약자의 폭력이 아닐까?

 한편 ‘미래의 강자’ 중국이나 인도를 상상할 때와 현재의 중국과 인도를 대할 때 우리의 태도는 어떻게 달라지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지만 정작 우리는 오리엔탈리즘을 갖고 있지 않은지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미래의 성장 저력은 있지만 아직 한국만큼 근대화되지 않은 중국이나 인도에 대해 갖는 환상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것이다. ‘불결하고 불편하지만 영혼이 살아 숨 쉬는 신비의 땅 인도’라는 식의 모순된 인식이 인도에 대한 환상의 내용이다.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이 ‘원조’라면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은 ‘복제 오리엔탈리즘(copy orientalism)’이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복제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를 생각하면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동남아시아나 중앙아시아에서 보이는 한국 기업의 ‘새끼 제국주의적’ 행태가 이해된다.

 요즘에는 한국이 지향해야 할 미래에 대해 한국은 패권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노골적인 주장을 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미래지향적 국가모델은 무엇인가를 논할 때 빠짐없이 보수언론의 지면에 등장하는 단어가 강소국(强小國)이다. 남한 단독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남북한을 합치더라도 영토상 대국(大國)이 될 수는 없는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에 차라리 내실있는 소국(小國)으로 가자는 것이다. 패권국 지향 보다는 세련된 논리이지만 이것 역시 대한민국이 이웃 국가보다 강해져야 한다는 전제에는 변함이 없다. 강소국 역시 강국(强國)임에는 틀림없으니 규모가 작다고 해서 억압적인 국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한국이 나아갈 길에 대한 논의가 서양과 동양의 이분법,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의 이분법, 그리고 이런 이분법을 배태한 근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의 패권국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강소국이든 강대국이든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대한민국도 역시 타국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국가가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근대의 잘못을 넘어서는 미래국가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08. 한(恨)은 일본이 만들어서 주입시킨 정서이다

 우리는 ‘공무도하가-정읍사-가시리-진달래꽃-초혼’으로 이어지는 한의 정서를 우리 민족의 고유의 정서라 배워왔다.  사전에 따르면 한(恨)이란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거나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으로 나온다. 이 ‘한(恨)’의 정서가 외세의 침입을 받고, 전통적인 가부장적인 사회에서의 여성들이 겪었던 심정을 울분을 토하지 못해서 생긴 것이라 한다. 그러나 한(恨)의 정서가 과연 한국인의 정서가 맞는 것일까?

 '조선 역사의 운명은 슬픈 것이다.  선(線)의 아름다움은 실로 사랑에 굶주린 그들 마음의 상징이라 생각한다.  오랫동안 참혹하고 처참했던 조선의 역사는 그 예술에다 남모르는 쓸쓸함과 슬픔을 아로새긴 것이었다. 거기에는 언제나 비애의 아름다움이 있다. 눈물 넘치는 쓸쓸함이 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가슴이 메이는 감정을 누를 길이 없다.'

 이 글의 토대로 '조선의 미=비애미'라는 등식을 광범위하게 유포시킨 것은 20세기 초반 일본의 미술사가 야나기 무네요시였다. 특히 3.1운동의 실패는 야나기로 하여금 상처받은 조선인의 영혼에서 빚어진 비애의 미, 한의 미를 더욱 강조하게 만든 직접적 계기가 됐다. 결국 따지게 보면 한과 비애의 정조는 기껏해야 20세기 초반의 산물일 뿐더러, 조선인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자연스런 '우리' 정서라기보다는 20세기 일본인의 머리에서 창안된 그럴듯한 허구이다. 이런 한의 정서가 조선의 전통으로 등극하게 된 배경은 피식민 조선의 패배를 가슴 아프게 바라보았던, 역사의 승리자 일본의 우월감이 자리잡가 있다. 그러나 동정은 공감은 아니다. 더구나 동정한다고 해서 이해를 하는 것은 아니다. 패배자를 바라보는 승리자의 도취된 시선은 잘 해야 연민이다. 

 이렇게 이식된 한을 '우리 전통예술의 본질'로 키워낸 것은 1920년대 이후 한국의 문화적 풍토 자체이다. 1900년대(애국계몽기라하는)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의 민족주의는 상무정신에 의해 고취되었고, 이 시기에 유행한 것은 수동적 비애미라기보다는 단호한 비장미였다. 이 시기에 범람한 <을지문덕전>, <이순신전>등의 각종 영웅, 위인전은 영웅과 초인의 전투적 이미지를 드러내는데 고심했다. 근대화에 대한 열정과 민족애가 영웅대망론의 형태로 표출된 것이다.

 그러나 국권 피탈로 인한 상실감이 심화되고 이에 따른 애특한 민족감정이 증폭되었던 1920년대 이후의 담론에서, 민족을 선도할 초인적 '영웅'은 떠나서는 돌아올 줄 모르는 원망스런 '님(연인)'으로 대체된다. 더구나 '님'과의 결별은 숙명적인 것이다. 기울어가는 국운을 회복하는 일이 요원해질수록 '님'과의 절대적 거리에서 빚어지는 비탄은 심화됐다. 우리 운명을 송두리째 좌우하는 영웅이 아닌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김소월의 <초혼>이나 '부질없는 이 머리털 이낭 베어서/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 서정주의 <귀촉도>는 이런 의미에서 민족고유의 비애의 정조를 계승한 것이라고 보다는 20세기 초반 한국의 민족주의와 한이 만들어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주변은 자발적으로 중심을 지향한다. 지배/피지배 관계에 놓인 피지배자가 진정 경계해야 할 것은 지배자의 가시적 폭력이나 억압이 아닌, 지배적 가치를 내면화하는 피지배자 자신의 욕망이다.(친일로 돌아서는 이광수와 같은 예처럼) 일본에서 들어온 '조선의 미=한의 미'라는 등식이 한국고유의 전통으로 탈바꿈한 것일까? 1910년대를 지나면서 1920년대의 문화통치기에서 내면화는 폭압에 의한 굴복만큼이나 처절하고 더 위태롭다. 1920년대에 이르러 <아리랑>의 유포, 김소월, 한용운, 서정주의 '님'계열 작품의 영향력이 광범위하게 침투하면서 한(恨)은 어렵지 않게 조선의 전통으로 둔갑한다. 서구인이 동양에 대해 품었던 환상이나 그것에 대한 폄훼를 의미하는 오리엔탈리즘은 1920년대 일본과 조선의 관계 속에서도 은믈히 작동하고 있었다., 즉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오리 엔탈리즘적 시선과 조선에 의한 그것의 철저한 내면화가 교차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비애와 한은 한국 전통으로 뿌리 내린다. 이와 더불어 20세기 초 조선의 습속을 바꾸는 데 결정적 영향력을 발휘한 기독교는 '원죄의식, 속죄의식'을과 결부된 숙명론을 강조함으로써 한의 토착화에 막대한 기여를 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짐 져야 할 원죄의 무게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 비애, 한의 정서와 닮았다. 

 하지만 한이라는 정서는 고유한 것이 아니라는 말을 인정하더라도 김소월의 시나, 가시리 같은 고전시가는 슬프다. 즉 '공무도하가-정읍사-가시리-진달래꽃,초혼'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정서는 한이라 할 수 있다. 편의상 슬픔을 '눈물'로 한을 '돌'이라 했을 때, 망부석 설화의 전통을 잇는 작품들에서 스며 나오는 정서는 슬픔보다는 한에 가깝다. 그러나 바로 여기까지이다. 한의 정서는 결코 우리 전통예술의 정서와 외연이 같지 않다. 한이라는 정서는 우리의 민족성이나 전통과 결부된 실체가 아니며, 절실한 한을 노래한 작품은 그야말로 일부이다.

 2002년판 월드컵 응원가인 <아리랑>은 슬프기 보다 흥겹다. <아리랑>이 전통적 한의 대명사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20세기 초반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 기인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21세기 한국의 현실에서 <아리랑>이 '축제'와 '신명'의 상징으로 거듭났다는 사실 또한 이상할 것도 어색할 것도 없다.

09.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화들짝 놀라는 8가지

대중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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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어락 (터치식 자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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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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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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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소지품 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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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 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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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를 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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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안가리고 재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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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한국만의 세계 최강 행복 도구 - 이웃사촌

 우리 민족은 이웃과 함께 사는 공동체적 생활 철학을 유지하며 오랜 역사를 지내왔다. 특히 농경 중심의 사회기반에서는 거의 모든 일이 공동체 내부에서 이루어졌고, 서로 협동하지 않고서는 생산활동을 영위할 수 없었다. 우리의 다양한 풍습들 중에는 그런 공동체 생활의 특징이 나타나는 것이 많다. 이러한 공동체 문화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과 특색은 다음과 같다.

 공동체 삶의 모습은 나와 남이 ‘우리’가 되어 한 마을을 이루고 사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적절한 수의 사람들이 적절한 크기의 장소에 모여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단위를 그리스 사람들은 ‘도시국가(polis)’라고 했고 로마 사람들은 ‘공동체(civitas)’라고 했다. ‘공동체’는 ‘성벽을 구축하여 요새를 만드는 데 공동 참여한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 나와 남을 ‘우리(we)’로 만들어 주는 공공의 장소가 ‘우리(울타리)’라는 사실, 그리고 한국어의 ‘우리’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 말이 공동체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런 사고에서 ‘운명공동체’라는 말이 생겨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동체 삶에 대한 원초적 사고는 동양과 서양이 다를 리 없다. 

 농경사회 유산으로서의 공동체문화

 공동체 삶은 기본적으로 농경사회와 관련이 깊다. 원시 농경사회에서 고대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세 가지 큰 요소는 가뭄과 질병, 그리고 도적의 침입이었다. 풍년이냐 흉년이냐, 그것은 생존과 직결되는 중대 문제였다. 또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아내는 것, 질병을 몰아내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은 중요한 문제였다. 고대인들은 ‘공동 대처’를 통해 이 문제들을 슬기롭게 극복하고자 했다. 공동체 삶은 이렇게 시작됐다.

 농경사회에서 생산은 가족 간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규모가 커짐에 따라 가족을 넘어 마을 단위의 협력이 요구됐다. 이에 마을 단위의 노동조직 및 수자원의 공동관리 등의 관행이 생겨났다. 두레•품앗이 등의 노동조직은 공동체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이다. 농경사회에서 노동력은 곧 생산으로 직결된다. 노동과 생산의 효과를 제고하기 위해 풍물놀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오락과 유흥이 생겨났다. 이것은 마을 구성원 사이의 유대를 강화하고 결속을 높이는 구실을 했다. 또한 구성원 상호간의 분화된 사회적 관계에 따라 공동체적 생활양식이 정립됐다.

 우리나라 전통적 향촌사회에는 마을이 공동체 조직으로 움직이게 하는 정신적 배경으로 공동체 신앙과 의례 행위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동제(洞祭)다. 아직 일부 농촌에 남아 있는 당산제(堂山祭)•성황제(城隍祭) 등 마을의 수호신에 대한 제사는 공동체를 통합으로 이끄는 긍정적 기능을 했다. 이와 함께 관혼상제, 특히 상례 때 공동체 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풍속은 향촌 사회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하나의 운명공동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런 풍토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보다 책임과 의무를 중시하는 전통이 수립됐음은 더 말할 나위 없다.

 공동체 삶이 오랜 세월 지속되면서 구성원 상호간의 관계성이 중시됐다. 이것은 하나의 문화적 특성으로 나타났다. 공동체 삶을 통해 삶의 목적과 가치관을 같이하는 것은 동양사회의 오랜 전통이다. 전통적으로 공동체에서는 도덕•윤리와 관련하여 감시 기능과 교육 기능을 담당해 왔다. 지난날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향약(鄕約)이라는 것을 통해, 민중이 바람직한 공동체 삶을 영위하도록 정책적으로 이끌었다. 향약은 권선징악(勸善懲惡)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는 향촌의 자치 규약이다. 주민 자치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국가에서 이를 제도화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을 정도로 그 기능이 중시됐다. 향약의 기능이 활발할수록 탐관오리의 비리행위와 수탈이 어려웠기 때문에, 향약의 성장을 억제하려 했던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근대 이전 ‘지방자치’의 효시라 할 수 있는 향약에서 배울 점이 많다.

전통적 공동체 문화의 특성과 계승을 생각하다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방에 거주하던 여러 집단이 공동체로 조직화됨에 따라, 공동체 특유의 문화가 형성되어 갔다. 한국문화의 원류는 이 공동체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고대 사회에서는 혈연공동체, 지역공동체적 요소가 강했다. 혈연과 지연이 하나로 결합된 혼합적 공동체가 사회의 한 구성단위로서 정치•경제•문화•교육 등 여러 영역을 자율적•자치적으로 이끌어나갔다. 자기만의 독특한 생활 방식을 지키면서 개성 있는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점차 폐쇄적 성격이 짙어 소통에 지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시대에 실시됐던 향약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당시의 향약은 각 지역의 공동체 문화의 특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여기에 유교이념을 주입함으로써 사회를 통합으로 이끌었다. ‘사회통합의 원리’로서의 유교사상과 공동체 문화가 만난 것은 오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의 전통적 공동체 문화는 ‘대가족’이나 ‘집성촌’ 등으로 대표되는 혈연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여 왔다. ‘혈연’ 중심이다 보니 ‘종족간의 규범’이 무엇보다 중시됐다. 여기에 향약을 통해 유교사상이 깊이 뿌리를 내림으로써 권위적 성격이 농후해졌다.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질서는 소수의 엘리트가 대중을 이끌었던 전근대 시기에는 의미가 있었다. 도덕, 윤리와 인성 교육의 측면에서 장점이 많았다고 볼 수 있겠다.

 한편으로 우리의 공동체 문화는 ‘정(情)의 문화’라 할 정도로 인간관계가 중시됐다. 중국의 ‘꽌시(關係)’와 닮은 점이 많다. 이런 ‘관계 문화(關係文化)’는 법치 이전의 문화 형태다. 아무리 법치주의가 발달한다 하더라도 법에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는 인간의 정으로 메울 수밖에 없다. 정의 문화, 관계 문화는 ‘사람답게 살만한 공동체’를 만드는데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개인 간의 연줄을 중시하는 쪽으로 변질된 측면이 있고, 실제 그 부정적 기능이 적지 않았다. 그러한 문화가 부정부패의 주된 요인이 되고 있음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실감하는 바이기도 하다.

10. 한국 내에서 세계를 느낀다
(1) 대학로 필리핀 시장 보러가기 : https://blog.naver.com/4eva3030/memo/221176025992
(2) 동대문 광희동 몽골타운 보러가기 : https://blog.naver.com/4eva3030/memo/221176026450

11. 지역별 골격비교

(1) 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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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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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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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충청/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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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소주와 함께 먹고 싶은 음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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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어 : 방어는 제주에서 나는 겨울철 최고의 진미다. 쫄깃쫄깃한 식감과 더불어 두터운 지방층은 참다랑어 뱃살 부럽지 않을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을 자랑한다. 그만큼 겨울에 맛보는 ‘방어’는 봄 ‘도다리’, 여름 ‘민어’, 가을 ‘전어’와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제철 생선으로 통한다. 제주 사람들은 신 김치와 함께 방어를 먹곤 하는데 방어의 두툼한 지방층과 톡 쏘는 신 김치가 궁합이 잘 맞는다고 한다. 모슬포항 주변에는 방어회 외에 토마토조림이나 버터구이, 샤브샤브, 튀김, 산적 등 다양한 조리법이 가미된 음식점들도 찾을 수 있다. 방어는 크면 클수록 맛이 뛰어나다. 특히 무게가 5kg 이상 나가는 대방어는 참다랑어, 연어와 함께 해외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어종으로 통한다. 흔히 ‘여름 방어는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방어는 확실히 겨울철 별미다. 맛이 뛰어난 방어는 영양도 탁월하다. 줄삼치 다음으로 비타민D가 풍부해 성인들에게 칼슘과 인의 흡수를 촉진시켜 골다공증과 각종 노화를 예방하는데 도움을 준다. 특히 방어의 불포화지방은 DHA, EPA, 타우린이 풍부해 동맥경화, 고혈압, 심근경색 및 뇌졸증 예방에 특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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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방어회 : 붉은 살이 많은 방어는 시각적으로도 입맛을 돋운다. 뱃살에 기름이 오른 겨울 방어는 회로 먹을 때 간장과 초장 외에 양념간장에 찍어 먹어도 독특한 별미를 자아낸다. 우리나라는 제주의 마라도 주변에서 잡힌 방어를 최고로 쳐주는데, 몸집이 크고 육질이 단단해 회로 먹을 때 특히 그 맛이 좋다. 겨울철에만 먹을 수 있는 별미인 방어회는 겨울 제주 여행에서 가장 먼저 맛보아야 할 별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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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방어 매운탕 : 회로 먹어서 맛있는 생선은 매운탕을 빼먹으면 섭섭하다. 방어 매운탕의 따끈한 국물 한 숟갈이면 매서운 제주의 찬바람도 반갑다. 겨울철 방어를 찾는 사람들로 붐비는 제주 모슬포에서 방어회를 찾으면 매운탕이 따라 나온다. 크기가 클수록 맛있는 방어는 다른 생선보단 기름기가 더 있고 뼈도 큰 덕에 한참을 고아냈을 때, 마치 사골을 끓인 듯 진한 국물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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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래고기 : 옛부터 일본 고토에서는 고래의 거의 모든 부위를 낭비 없게 이용해 왔다. 버리는 부위가 없다보니 각 부위별로 독특한 풍미를 느낄 수 있는 게 고래고기의 미덕이다. 흔히 12가지 맛이 난다고들 하는데 12가지 향이 난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닌가 싶다. 그 정도로 부위별 풍미가 도드라진다. 고래 고기에는 여러가지 부위가 있는 만큼 음식 맛이 달라, 조리법도 나뉘고 있다. 크게 분류하자면 회, 데침, 조림, 절임이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일미(一味)로 치는 건 뱃살이다. 일명 '우네'라고 불리운데 아래턱으로부터 배에 걸친 줄무늬 부분의 고기를 말한다. 특유의 쫄깃함과 부드러움이 특징이다. 일본에서는 베이컨 재료로도 사용되는데, 소금절이로 하고 나서 훈제를 한다. 이것을 얇게 썰어서 불에 살짝 구워서 먹는다. 하지만 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본피(몸통의 표피와 피하지방층)로 대용되기도 한다. 한편 나가사키 지방에서는 데쳐서도 먹는데 스야히로(末広)라고 한다. 이는 단면이 끝으로 갈수록 퍼져나가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생강을 곁들여 간장에 찍어서 먹는다.
 
 배육, 복육 등의 지방이 적은 부위 살코기육은 생산량의 30-40%를 차지할 정도로 가장 많은 부위다. 주로 요리로 이용되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횟감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흔히 소고기와 비유를 많이 한다. 내장은 주로 삶아서 먹는다. 그중에 고래 좀 먹어봤다는 사람들이 탐내는 부위는 소장이다. 삶은 소장을 썰면 동그란 형태가 된다. 독특한 풍미가 있어 처음 접하면 곤혹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 맛과 향에 매료되면 헤어나오기 힘들다. 양이 많지 않은데 찾는 이가 많아 늘 양이 달리는 인기 부위이다.
 
 물렁뼈처럼 하얗게 생긴 건 꼬리지느러미다. 지방과 젤라틴질이 풍부한 부위다. 현지 식당에선 오베기로 통용되고 있다. 일본에선 오바(オバ)라고 불리우고 절임을 거치고 나면 사치시쿠지라(さらしくじら)라고 부른다. 약 6개월여동안 소금에 절였다가 얇게 썬 다음 데쳐서 냉수에 담가 차갑게 식혀서 낸다. 일본에서는 초된장을 곁들이지만 우리는 초장과 궁합을 맞춘다. 쫄깃하면서 고래의 독특한 풍미로 인해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거부감을 가질만하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런 매력이 고래를 다시 찾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고래고기찌개는 특별한 맛은 없지만 동태 무국과 비슷한 맛이다. 시원하고 담백했다. 장생포에서 고래고기와 첫 인연을 맺었지만 사실 고래고기 참맛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래고기에 하자가 있었다기보다 내 자신이 고래고기에 대해 너무 몰라 생긴 현상이다. 12가지 맛이 난다는 풍월만 가지고 찾는다면 누구나 다 나 같은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 그 후, 부산 등지에서 몇번 더 경험을 하였지만 매번 마찬가지였다. 무슨 음식이든 이모저모를 알고 먹으면 맛이 배가되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먹는다면 천하 일미도 맛은 반감된다. 특히 고래고기는 유독 심한 편이다. 나 역시 "아 이게 고래고기의 진미구나"라고 느낀 건 첫 대면 후 몇 년이 흐른 후였다. 고기의 맛은, 포유류의 고기면서도 쇠고기 등과는 완전히 다르다. 다랑어와도 통하는 독특한 맛을 가지고 있다. 살코기에 대해서는 특히 말고기에게 가깝다는 평도 있어, 실제로 일본에서는 말고기를 고래 고기로 사칭해 판매한 예가 보고되고 있다. 

13. 한국만의 온돌로 세계를 평정한다
[온돌의 과학적 원리 보러가기 : https://blog.naver.com/4eva3030/memo/221176026863]
 
 이정안 중국법인장 경동나비엔은 일찍이 세계화에 주력해 1995년 북경법인 ‘북경경동보일러유한공사’를 설립하고 중국 내 브랜드 ‘복래가(福來家)’로 중국 내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추구했다. 또한 온돌문화 전파가 중국 보일러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경쟁력으로 판단, 1990년대 초 연변지역 최초 대량 온돌난방시공을 시작으로 온돌난방을 지속적으로 전파하고 있다. 대리점 등 유통조직들에 대한 온돌난방시공 교육과 대단위 아파트단지 납품 등을 통해 중국에서 온돌난방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특히 북경 회룡관과 같이 중국 내 최초의 벽걸이 가스보일러 대단위 설치지역에서는 온돌의 우수성이 입증된 바 있다.

 이정안 중국법인장은 “지난해 북경 경동 나비엔 열능 설비 유한공사로 법인명을 변경하고 유수의 유럽산 보일러와 품질경쟁 속에서도 확고한 우위를 차지하며 ‘제품과 함께 문화를 판다-Sell KOREA’라는 사명감으로 대한민국 온돌문화 전파에 앞장서고 있다”라며 “중국 내 사업확장 일환으로 2007년 1월 ‘상해나비엔국제무역유한공사’를 설립해 중국 남부지역 및 중앙아시아 지역의 거점을 넓혀가고 있다”고 밝혔다. 이 법인장은 특히 “2012년부터 중국 10대 도시가스 공급사인 신오도시가스와 함께 가스보일러 보급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중국은 전세계 60여개의 글로벌 보일러 브랜드가 모두 모여 있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이러한 전장에서 경동나비엔은 중국의 실정에 맞는 현지화 전략으로 승부를 걸었다. 이 법인장은 “중국에 들어와 사업하는 대부분의 외국기업은 중국에서 단순 생산•판매하는 형식인데 반해 북경경동나비엔은 이곳 실정에 맞는 제품을 개발하고 기업에도 현지의 문화를 적극 반영했다”고 밝혔다. 중국 현지화 전략은 중국수질 및 연료사양에 적합한 보일러를 개발하는 것이었으며 차를 좋아하는 중국인을 위해 음용수보일러도 개발, 출시했다.

 또한 법인 관리자의 현지화 전략이다. 생산, 품질, 기술, 영업 인원의 100%를 현지인으로 충원, 업무효율성과 현지 밀착경영을 철저히 고수하고 있다. 구매조달부문도 현지화했다. 북경경동은 1998년 3월에 5만m²의 현대화시설을 갖춘 공장을 건설했으며 신축공장 운영을 통해 중국 고객들에게 고품질의 제품과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경동나비엔은 지난해 중국시장에 고급형 콘덴싱 가스보일러인 NCN-CE를 출시하는 한편 일체형 스테인리스 열교환기를 적용한 중국향 일반 가스보일러 모델인 UNITEC-DELUX를 출시, 시장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에 출시할 콘덴싱 가스보일러는 현재 보일러의 종주국인 유럽에 수출 중인 제품이며 영국에서 연간효율 최고등급인 ‘SEDBUK A’를 획득한 경동나비엔 대표 콘덴싱 제품이다. 이 법인장은 “보일러산업의 무한한 성장동력을 가진 중국시장은 유럽 등 글로벌 보일러 브랜드의 경쟁이 치열한 곳”이라며 “중국에서 20년 넘게 다져온 입지와 경험을 바탕으로 현지에 맞는 다양한 제품군을 출시해 시장을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