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 논술 강의 나눔터
◆ 6/13 수업내용 <김영민의 논어 에세이> 정리 / 이옥영 / 2019년 6월17일
지난 수업 중 논어 부분만 정리해 보았습니다~
▶ ? 스펙터클의 정치-아름다움과 화려함에 감복하면 지배당한다.
“지배층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이 두드러지도록, 피지배층이 초라하고 단조로운 상태에 머물기를 바란다. 피지배층이 아름다움을 동경하는 순간, 그 피지배층은 지배층의 지배와 사회의 위계질서를 감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일본의 도쿠가와 정권은 초월적 존재자에 의지하는 대신 무력으로 자신의 지배를 관철하였는데, 실제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자 강하게 보이는 이미지에만 치중한다.
조선시대 임금의 거동(제사를 지내러 가는 행렬)에 아름다운 장관을 보려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드는데 거동이 아름다운 이유는 거동 이외의 세상이 아름답지 않은데 있다.
피지배층이 지배층의 아름다움을 동경한 순간 지배당한다.
공자는 <논어> 안언편에서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했다. 이는 예가 신에게 제사 지내는 스펙터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관관계를 규율하는 행동거지로 확장 됐음을 보여준다. 예의 의미가 예의 규모에 관한 한 거시에서 미시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 예는 우리가 지켜야 할 도리, 기본 상식,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다.
형식을 중요시 하는 것은 철학적 의미를 가두게 되는 것이며, 실재보다 이미지에 치중하는 것은 본질을 보지 못 함이다.
현대 사회에서 외향, 형식에 치중한 스펙터클 정치는 무엇인가?
구청, 시청, 월드컵 경기장, 세종문화회관 등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은 권위의 상징이며, 이미지의 힘이 작용하고 지배당하게 만든다.
축구 경기 등 스포츠에 치중하여 일상을 멈추고 응원하는 동안, 언론은 강원도 고성 재해와 같은 현실의 문제들에 침묵한다. 이는 삶의 문제를 간과하게 만드는 교활한 정치적 목적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도에 맞는 일인지를 “보지도 듣지도 움직이지도 말라” 는 예의 의미에서 찾아야 한다.
활기찬 한 주 보내시고 목요일 수업 때 뵙겠습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 함석헌 조득우 2019년 6월 19일
□ 발표 순서
머리말 - 마니샘
01. 인생과 역사 - 마니선생님
02. 사관 - 조득우
03. 종교적 사관 - 장현주
04. 세계 역사의 테두리 - 이옥영
05. 한국역사의 기조 - 노안나
06. 지리적으로 결정된 한국역사의 기질 - 윤현선
07. 한국 사람 - 조득우
08. 당당한 출발 - 장현주
09. 열국시대의 모밭 - 이옥영
10. 풀무 속의 삼국시대 - 노안나
11. 다하지 못한 고려의 책임 - 윤현선
12. 궁예, 왕건이 그린 나라 - 조득우
13. 깨어진 꿈 - 장현주
14. 고려자기 속에 숨은 빛 - 이옥영
15. 팔만경판에 새긴 마음 - 노안나
16. 최영과 이성계 - 윤현선
17. 수난의 오백 년 - 조득우
18. 중축이 부러진 역사 - 장현주
19. 쓸데없어진 세종의 다스림 - 이옥영
20. 무너진 토대 - 노안나
21. 의인의 피 - 윤현선
22. 회칠한 무덤 - 조득우
23. 살인의 역사 - 장현주
24. 고질 - 이옥영
25. 율곡의 헛수고 - 노안나
26. 첫번째 환난 - 윤현선
27. 두번째 환난 - 조득우
28. 임경업 - 장현주
29. 신생의 가는 빛 - 이옥영
30. 기독교의 들어옴 - 노안나
31. 다시 거꾸러짐 - 윤현선
32. 해방 - 조득우
33. 6.25 - 장현주
34. 생활에서 나타나는 고민하는 모습 - 이옥영
35. 고난의 의미 - 노안나
36. 역사가 지시하는 우리의 사명 - 윤현선
37. 역사가 주는 교훈 - 조득우
[01] 머리말 – 마니샘 발제
(1) 고난의 역사를 말하다 : 이 책은 성경적 입장에서 역사를 쓴 것이 아니라 성경의 자리에서만 역사를 쓸 수 있다는 깨달음에서 지필하였다. 독자가 스스로 역사 앞에 바로 서게 하기 위해서, 역사적 사실들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통해 뜻을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2) 역사철학의 깃발 3가지 : 믿자는 의지, 나라에 대한 사랑, 과학적 양심을 기준으로 어린 마음들에게 생명의 씨앗을 심어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 것이다.
(3) 보편적인 종교론 : 해방 전에는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해방직전 투옥 중에 국가주의와 독단적 태도를 버려야 세계주의와 과학주의를 실천할 수 있다고 깨닫게 되어, 모든 종교를 포괄할 수 있는 사관을 깨닫게 되었다.
(4) 한일 협정과 책의 필요성 : 1965년 한일협정의 과정에서 해방 전후로 한국사회가 역행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했고, 정신적인 새로운 전환 시점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고난의 역사를 자유 그리고 주체성을 획득하기 위한 과정이자 결과라는 주제를 피력하게 되었다. 결국, 고를 피하고 낙을 맞으려는 사람은 영원히 고를 못 면할 것이요,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려는 사람은 영원히 산을 보지 못할 것이다. 무위도식하기 위한 천국을 망상(fantasy)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주체성을 획득하기 위한 고통 그리고 고난의 과정이 천국이라고 기대(expectation)하는 것이 참종교의 의미를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 역사에서 이유 없는 고난은 존재하지 않았다.
[02] 인생과 역사 – 마니샘 발제
(1) 살림의 뿌리 : 인간은 자연 속한 부분이자 전체이다. 모든 개체는 자유롭게 지내고자 하는 것이 정신적 기준이지만, 인간 정신은 '초정신적인 것'에 의해 자유롭게 된다.
(2) 사실 : 식물의 뿌리가 대지에 박혀 양분을 빨아올리는 것과 같이 우리의 삶은 사실을 삭여서 사색으로 만들고 주관성과 객관성을 인생과 역사라는 수레바퀴에서 잘 조절해서 살아가야 한다. 즉, 주관성인 생활체험은 개인이 자기의 존재를 하나의 값을 가지는 것으로 알고 나타내려는 데서 나오며, 객관성인 역사이해는 자기를 뜻 있는 발전으로 보는 세계의 체계 속에 있는 것으로 인식할 때 생긴다. 하나를 나무의 씨라면 하나는 숲이며, 씨를 메기자는 것이 숲이며 숲을 이루자는 것이 씨다.
(3) 역사 이해 : 나무와 같은 우리 인생이 가장 튼튼함을 느낄 때는 전체 우주 숲에 대한 우주사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을 때이다. 인간의 문명은 종교적 힘이 이끌어왔던 결과이며, 우주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종교적 관점에서 사실들을 삭혀서 세계사상을 수립해야 한다.
(4) 세계가 하나 되는 시대 : 양적 발전으로 분열된 현대 사회를 지속 가능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인류가 한 조상에서 시작되었으며, 현상과 현재의 상황은 다르게 보이겠지만, 서로 같은 백성임을 깨달아야 한다. 교조화된 낡은 경전을 버리고 전체적, 생장적인 역사 파악을 통해 혁명을 이룩해야 한다. 이러한 역사적 필연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진리를 현대 속에서 살리려면 역사비판으로 시작해야 하며, 그 역사 비판은 기본적은 역사지식을 통해 이룩된다.
[03] 사관 - 조득우샘 발제
(1) 역사의 정의 : 역사적 사실은 과거에 발생한 모든 사건의 기록이 아니다.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건들만을 선별적으로 기록되고 변경되는 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그 관계성에 따라서 기록의 분량과 중요성이 결정되기 때문에, 기존의 기록들과의 체계를 지켜가며 통일성 있게 작성되어야, 사실과 사실 사이에 인과관계의 고리가 맺어져서 하나의 통일체가 될 수 있다. 하나의 통일체의 관점에서 한국 역사도 전 세계의 역사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한국의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서, 전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완전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탐구과정은 현재와의 살아있는 관계성에서 그 사실들의 뜻(의미)을 표준으로 하여 역사적 사실들을 추출하고, 개별사실(사건)들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뜻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해석의 과정 곧 의미풀이의 정신적 삶의 빙식, 즉 예술적 창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뜻과 해석 : 사진은 외견인 현상만을 보여주지 사물의 본질을 보여주지 못한다. 따라서 사실기록은 역사 밑으로 흐르는 하나의 뜻, 즉 씨알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석을 통한 역사 연구가 필요하다. 결국, 사실주의 역사가는 요리하지 않은 음식을 식탁 위에 내놓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는 아는 것이 많고, 재주가 뛰어나며 식견이 높아야 한다. 누구나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때를 알 수 있으나, 본질을 통해 되어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3) 보는 자리 : 죽었던 사실이 살아날 수 있는 해석, 다시 말해서 옹근 하나의 정신을 잡으려면 보는 자리가 중요하다. 인생을 뛰어넘지 않고는 인생을 모르는 것과 같이, 역사를 뛰어넘을 수 있는 관점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러한 관점에 따라 이성계도 예수도 다르게 해석하게 된다. 사관이라는 것은 관점과 동일한 측면이 있다. 헝겊 위에 빛칠을 해서만 그림이 있는 것이지만, 또 헝겊을 대해 붓을 들고 설 때 그림은 그 가슴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석사관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관 없는 역사는 의미없는 사실의 나열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모든 사실을 서로 인정하면서 통합할 수 있는 사관이 있을까? 바로 종교사관이 모든 봉우리를 만나게 만든다.
[04] 종교적 사관 - 장현주샘 발제
(1) 나의 종교 : 물질이라 부르는 세계에서는 가장 보편적이려면 추상적이 되어야 하지만, 정신의 세계에서는 그와는 반대다. 가장 구체적이 아니고는 가장 보편적일 수 없다. 따라서, 나는 나의 믿음이 있을 뿐이고, 내가 본 성경의 진리를 알 뿐이다. 종교야말로 가장 구체적?개인적인 사실이다. 가장 구체적이요, 가장 개인적이란 말은 나와 하나님의 직접 교섭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가장 내 일이지만 또 모든 사람에 통할 수 있는 줄로 믿는다. 내가 알기에는 성경은 그렇게 각 사람이 각각 제자리에서 제 식으로 직접 하나님을 대하기를, 다른 말로 하면 나에서 전체를 나타내기를 가르치는 진리다. 그러나, 기독교가 홀로 참종교라는 생각에서도 아니요, 기독교에만 참 사관이 있다 해서도 아니다. 전날에는 내가 그렇게 생각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와서 보면 역시 종파심을 면치 못한 생각이었다. 기독교가 결코 유일의 진리도 아니요, 참 사관이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진리가 기독교에서는 기독교식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2) 아가페 : 과학혁명의 기조는 유물사관이다. 즉, 역사의 근본을 아무 목적 없는 우연한 물질에 돌린다. 그러고는 모든 정신적인 가치관념을 유치한 시대의 공상, 망상에서 나온 것에 돌리려 한다. 그것이 옳으냐 잘못이냐는 여러 말을 할 필요 없고, 오늘의 세계역사 자체로 말하게 하는 것이 좋다. 성경은 그와는 반대다. 역사는 뜻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근본이 하나님이라는 말만 가지고는 불완전하다. 그 하나님에는 인생과 인격적으로 교섭하는 하나님이라는 설명을 붙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생명의 진화에서 가장 높은 단계가 인격이라면, 그 인격과의 교섭은 역시 인격으로 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반드시 인격신이라고 단언할 자격은 우리에게 없으나 우리가 아는, 우리와의 의미적인 교섭을 하는 하나님은 인격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가설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양심이 말하는 사실이다. 심리학이 무엇이라 말하거나 간에 양심은 스스로 권위를 가진다. 이렇게 하나님이 직접 아들인 예수를 주신 것처럼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개개인의 인격이 만나서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교섭이 아가페이다. 유물론의 홍수로 말미암아 세계관의 파선으로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오늘의 세계는 스스로를 구원한다면 다시 아가페의 닻줄을 붙드는 수밖에 길이 없을 것이다.
“꽃이 웃는다. 새가 운다” 하는 것은 그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뜻을 말한 것이다. 웃고 운 것은 시인 자신이지 꽃이나 새가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현상계로 하면, 무한히 변천해갈 것이지, 종말이란 것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뜻으로 할 때에는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시간이 있다는 말이다. 실현되는 것이 이상이 아니라, 영원히 실현 안 되는 것이 이상이다. 실현되는 이상은 실현되는 그 순간 죽어버리나 실현되지 않는 이상은 현실적으로 안 되기 때문에 뜻으로는 순간마다, 또 영원히 계속되어 실현이 되면서 이끌어가는 산 이상이다. 종말관은 인류역사를 이끄는 정신적 항성이다. 처녀에게 결혼날을 알려주라. 그러면 전에 볼 수 없던 미와 미덕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처녀생활의 마지막이라는 비극과 함께 비로소 처음으로 참생활이 시작된다. 종말일은 역사상의 결혼날이다. 그날이 온다는 데 일종의 두려움이 있는 것은 면치 못할 일이다. 그러나 만일 그날이 없다면 이 무한히 계속될 고 통의 운명에서 누가 능히 견뎌낼까? 종말이 온다는 말은 도리어 인류에게 희망을 약속한다.
-정리 : 조득우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