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음     바 꾸 기  



                                       가방하르제야 지음.  박영철 옮김

                                            

    
주제 : 이렇게 행한다면 복과 지혜가 모두 쌓여지리라


   여기서 ‘쌓임’이란 우리의 수행을 뒷받침해주는 밝은 힘의 뭉침을 말한다. 너그럽게 베풀어주는 실천을 통해 물질적인 ‘복(福)’의 쌓임은 깨달은 이의 완전한 루파까야(rupakaya, 色身) 곧 모양의 몸을 얻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지혜’의 쌓임은 모든 것들의 ‘비어있음’을 아는 것으로 이뤄지며, 깨달은 이의 완전한 통찰 곧 다르마까야(dharmakaya,法身)를 얻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또한, 두 가지 어둠이 뿌리 뽑혀, 사람의 모습을 얻은 목적을 달성하고, 비길 데 없는 완전한 깨달음이 이루어지리라.

   우리가 궁극의 깨달음을 얻는 길은 참모습을 꿰뚫어 보는 것을 막는 두 가지 어둠을 밝힘으로써이다. 두 가지 어둠이란 감정의 괴로움이라는 어둠과 모든 것의 지식을 가리는 어둠이다. 앞의 것은 윤회의 힘에서 벗어나는 것을 방해하며 뒤의 것은 불성(佛性)의 전지(全智:온전한 지혜)를 막는다. 우리는 수행에서 착실히 진보했을 때에만 그것들을 실제로 지우기 시작할 수 있다.


  두 가지 어둠 중에서 보다 거친 힘인 감정적 괴로움을 줄이지 않는다면 설령 물질적으로 풍족할 수 있는 모든 외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 하더라도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이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꿈꾸어 온 달 세계 여행을 실현시켰지만 진정한 보편적 행복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 삶을 참으로 뜻있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안’에서 일을 해야 한다. 우리가 만약 이 삶 동안의 단 하나의 감정적 괴로움도 지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저 어머니에게 괴로움을 주기 위해 태어난 것에 불과하면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짐승과 다른 바가 없다.


   대부분의 지성인들은 자신들이 끊임없이 갖가지 감정의 흔들림을 겪고 있으며 그 흔들림이 흔히 심리적 갈등을 낳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가 도(道)를 따르기에 열심이면서도 이런 장애를 줄이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수행은 기본적으로 천박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룻만에 깨달음에 이를 수는 없다. 우리의 마음은 양파와 같으며 나날이 계속되는 꾸준한 수행이 그 미망의 껍질을 한 겹씩 벗겨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어느 날 우리는 그 물질 아닌 알맹이에 도달하여 우리의 참모습을 완전히 깨닫게 된다. 이 완전한 깨달음은 어느 누구에게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 티벳의 한 명상의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마땅히 스스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려야 하며, 마치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젓가슴에 매달리듯 자기 자신을 스승에게 전적으로 매달리게 하는 것이 스승에 대한 헌신이나 복종이라고 여겨서는 안된다. 우리의 수행은 직관적 통찰을 가꾸는 것은 전혀 자기 자신의 노력과 지혜에 따른다는 것을 아는 위에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다르마의 수행이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남들 모두들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함으로써 가르침의 핵심을 자신의 일상생활 속으로 소화 흡수함을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가르침을 많이 받고 잘 안다 해도 모두가 무의미해진다. 왜냐하면 가르침의 말들은 우리의 태도를 바꾸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보석, 윤리의 보석, 너그러움의 보석, 들음의 보석, 사유의 보석, 부끄러 움의 보석, 지혜의 보석, 이것들은 일곱가지 가장 귀한 보석이다. 이 일곱가지 보석은 결코 닳지 않는다. 이것을 사람 아닌 것들에게 말하지 말라

   우리는 밖으로는 여러 가지 장신구를 한꺼번에 다 달고 다닐 수 없으나, 안으로는 이 일곱가지 거룩한 보석을 모두 달아 마음을 장식할 수 있다. 먼저 믿음의 보석이니, 우리의 의지처가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는 든든한 믿음이다. 다음이 우리를 안팎으로 올바른 행실을 따르게 하는 윤리적 규범의 보석이다.


   다음의 너그러움의 보석인데, 만약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인색한 사람이 될 것이고, 설령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다 해도 마음은 가난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돈을 움켜쥐고 집착하다보면 우리는 그것을 착한 일에 써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니 그렇게 애써 감추어 두어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이 너그러움의 보석을 지닌다면 그때는 비록 주머니에는 한 푼 밖에 없더라도 그것을 기꺼이 남에게 나누어 주려 할 것이다. 너그러움이 없으면 재산이 절대로 늘지 않는다. 마음이 너그러우면 베풀어줄수록 더 많이 돌아온다. 그러나 우리는 균형을 잡아야 한다. 너무 과하게 주면 우리의 필요를 채우지 못할 수도 있고, 그러면 부질없는 어려움만 겪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용을 지켜야 하며 부질없이 돈 걱정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들음의 보석 곧 듣고 아는 마음으로 다르마를 듣고 공부함으로써 우리는 수행의 방법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 우리는 이런 보석을 간직하기 위해 상자를 장만할 필요도 없고 이것을 실어 나를 말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우리는 설령 감옥에 갇힌다 해도 이 들음의 보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전혀 걱정없이 편안할 수 있고 오히려 그런 상황을 명상하는 데에 보람이 있게 활용할 수 있다. 반면에, 세속의 부를 축적하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사유의 보석 곧 깊이 헤아리는 마음이 있으면 우리는 항상 자기가 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를 생각하며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렇지 않는 우리의 행위는 절대로 정당화되지 못한다. 이 말은 또한 남들의 비판에 대해 우리는 마음을 열어놓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부끄러움의 보석 곧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바꾸어 말하면 정직하고 고결한 성품은 우리를 그릇된 행위에서 지켜주니, 정직하고 고결한 성품은 우리를 그릇된 행위에서 지켜주니, 남들이 자신의 이기성(利己性)을 보는 것은 부끄럽기 때문이다. 대개 우리는 남들 앞에서는 부끄러워 나쁜 행실을 하지 않으려 하지만, 홀로 있을 때는 멋대로 하려고 든다. 그러나 ‘세 가지 가장 높은 보배’ 앞에는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미숙한 행위를 삼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미숙한 행위를 삼갈 수가 잇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과거의 미숙한 행위를 깨닫고 뉘우치게 되어 더는 온전치 못한 행위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보석 곧 지혜로운 의식으로 우리는 이로운 행동과 감정적 동요를 분별할 수 있다. 현재의 행동은 과거의 행동이 낳은 결과의 힘에 의해 결정되는데, 감정의 충동에 따라 행동을 하는 것은 사물을 보는 순수한 눈을 흐리게 하나니 이것이 괴로움의 직접적 원인인 것이다. 지혜로써 우리는 자신의 행위를 피하게 된다.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렇게 보리심을 벗으로 삼고 위의 일곱 보석들을 우리의 재산으로 지닌다면 우리는 훌륭하게 진보하고 있는 것이다. 래충빠가 스승 밀라레빠에게 티벳의 수도인 라사로 갈 것을 허락해 달라고 청했을 때 스승은 처음에는 거부했으나 결국 그가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 래충빠가 떠나자 밀라레빠는 슬퍼했다. 사람이 슬퍼하는 까닭을 묻자 그는 말하기를 '달 같은 제자는 가버렸고 나는 뒤에 남은 한 마리 개와 같다.'고 했다. 다시 사람들이 떠난 제자에게 어떤 재산과 동반자를 딸려 보냈느냐고 묻자 밀라레빠는 이렇게 대답햇다.


      “나는 그에게 일곱 가지 보석을 주어보냈고, 또 보리심이라는 동반자를 딸려 보냈다. 그의 안전에 대해서는 이제 아무 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


   이 일곱 가지 보석들은 결코 깨지지 않으니 그 가치는 항상 우리와 함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마음의 원리를 모르는 자들에게 말해서는 안된다. 마음의 원리를 모르는 자란 행복은 다만 물질에서만 얻어진다고 우기는 사람들과 이렇게 귀한 도움말을 슬기롭게 활용하지 못하게 하는 카르마에 묶여있는 정령이나 유령 따위, 사람 아닌 것들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입에서 나오는 말을 살펴라. 홀로 있을 때는 마음을 살펴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부질없는 말로 그들을 해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까담파의 한 스승은 말했다.

    “우리는 아주 옳은 것처럼 제 생각대로 판단하고 비판한 다. 나는 내 입에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입에 자물쇠를 채웠으면 좋겠다”

  홀로 있을 대는 마음을 살펴야 한다. 마음이 한곳으로 집중이 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다. 그러나 그런 집중력을 이루기 전이라도 흩어지는 마음을 든든한 집중상태에 머물러 있도록 끊임없이 뒤로 끌어 오도록 해야 한다. 흔히 듣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상인이 열심히 명상을 하곤 하는데 그는 명상을 하면서 자기가 하는 장사를 잘 생각하여 고용인들에게 무엇을 일러줄 것인지를 생각해낸다. 그러나 그는 명상을 마치고 일어나면 그렇게 생각해 냈던 것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인은 또 그것을 생각해내려고 명상으로 돌아가곤 한다는 이야기이다. 명상을 하는 동안에 어떤 계획을 세우는 것은 쉽게 버릇이 될 수 있으며 그러면 이른바 ‘명상’을 한다고 보내는 시간에 어떤 허깨비의 즐거움을 맛보는데 재미를 붙이게 된다. 우리는 그런 부질없는 마음의 방황을 피해야만 한다.

  이 책에 간추려져 있는 가르침들은 단지 다르마의 수행자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누구든 그저 훌륭한 삶을 살고자 원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과거와 미래의 삶이 있다는 이론을 받아들이건 않건 만약 우리가 과거에도 존재했던 것처럼 행동한다면 자기 자신과 남들에게 이로움만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남들을 다정하게 대해야 하며 동시에 우리의 수행을 지속하는 일에서는 황소같이 완강해야만 한다. 이런 티벳의 속담이 있다.

      “고삐를 코에서 머리로 둘러매라”

   코에 고삐를 꿴 짐승은 그 고삐를 잡은 사람이 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고삐의 줄을 짐승 자신의 머리에 둘러놓으면 그 짐승은 온순해지고 상냥해지며 원하는대로 돌아다닌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윤리적 규범이라는 고삐를 스스로 자신의 머리에 둘러맨다면 뭔가 외부적인 도덕의 굴레에 매일 필요가 없다. 규범이 안에서 나온다면 밖에서 이끌어주는 힘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르마의 수행은 그저 하나의 ‘의식(儀式)’으로서, 또는 의무로써 마지못해, 또는 유행을 따라 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불교를 따르는 것은 불교가 갈수록 명성이 높아져서이거나 불교를 믿는 것이 하나의 ‘추세’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불교의 이로움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수행을 하든지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도와준다면 그것은 할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또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

  이것으로 ‘보살의 보석염주’에 대한 풀이를 마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