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서강대학교 기출모의논제


※ 다음 두 제시문에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어떤 관점이 담겨 있다. 그 관점이 무엇인지를 서술하고, 이와 반대되는 주장을 전개하라. 글 길이는 1600자 내외

<1>
기술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기계 기술, 적어도 기계와 도구를 제작해내는 것을 기술의 목적이라 여기는 그릇된 통념으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된다. 사실, 기술이란 상당히 오래된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특수한 것이 아니라 매우 보편적인 그 무엇이다.
기술은 인간을 훨씬 넘어서서 동물의, 말하자면 모든 동물의 삶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식물의 삶의 유형과는 달리 동물의 삶의 유형에는 공간에서의 자유로운 운동과 상대적인 자의성 및 여타의 자연으로부터의 독립성, 그리고 이 독립성을 바탕으로 여타의 다른 자연에 대항하여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의 생존에 일종의 의미, 내용, 우월성을 부여하는 필연성이 들어있다. 오직 영혼으로부터만 기술의 의미는 열릴 수 있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동물의 삶이란 싸움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삶의 전략 및 “타자”에 대한 그들의 우열성 - 이 타자가 유기적 자연이든 무기적 자연이든 - 은 이 삶의 역사, 말하자면 이 삶이 타자에게 해를 끼치느냐 또는 반대로 해를 입는 운명이냐를 결정짓는 것이다. 기술이란 전체적 삶의 전략이다. 기술이란 삶 그 자체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싸움에서의 수법이 가지는 내면적 형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피해야만 하는 다른 오류가 있다. 기술이란 도대체 도구에 의해서는 이해될 수 없다. 문제는 물건의 제작이 아니라 그 물건을 사용하는 수법이며, 무기가 아니라 싸움이다. 그래서 현대전에서는 전략, 말하자면 전쟁 수행의 기술이 결정적인 것이고, 무기를 발명해내고 제작해 내며 응용하는 기술은 단지 전체 수행 과정의 요소로서만 타당할 뿐이며, 이는 모든 기술이 다 마찬가지이다. 사자가 영양(羚羊)을 기만하는 기술, 외교적 기술 등 아무런 도구도 사용하지 않는 기술은 얼마든지 있다. (중략) 문제는 물건이 아니라 어떤 목표를 향한 활동이다. 선사 시대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점을 종종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다. 그들은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들만을 너무나도 염두에 둔 나머지 수많은 절차상의 수법들을 고려하지 않는데, 그것들은 분명히 존재했었으나 후세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을 뿐이다.

모든 기계는 오직 절차 수법에 봉사할 뿐이며 이 절차 수법에 대한 사고(思考)로부터 생겨났다. 모든 교통 수단은 타기, 노젓기, 항해, 날기 등의 사고에서 발전한 것이지 자동차나 배를 고안해냄으로써 발전한 것은 결코 아니다. 방법 자체가 일종의 무기이다. 그러므로 기술이란 결코 경제의 한 “부분”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경제도 전쟁이나 정치를 배제한, 독자적으로 존속하는 삶의 한 “부분”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활동적이고 투쟁적이며 노심초사하는 삶의 한 측면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분명히 (중략) 원시적 무기나 꾀로부터 기계의 제작에 이르는 길을 인도한다. 이 기계의 제작으로써 자연을 상대로 한 오늘날의 전쟁이 수행되는 것이며, 이에 의해 자연이 기만당하고 정복되는 것이다.
(중략)

최초의 인간은 육식을 하는 새와 마찬가지로 높은 곳에 집을 짓고 기거하였다. 몇 “가족”이 한 무리를 지어 함께 행동한다 하더라도 그 형태는 매우 느슨한 것이었다. 아직은 인종에 관해서는 물론 민족에 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 무리라는 것도 여자들과 어린애들을 거느리고서 제대로 한 번 싸워 본 일이 없는 몇몇 남자들로 구성된 우연한 모임이며 따라서 단순히 종족으로 이루어진 가족의 무리처럼 “우리”라는 공동 의식도 없는 완벽하게 자유로운 상태이다.

이처럼 너무나 고독한 자의 영혼은 점차 자신의 힘과 약탈로 말미암아 전투적․불신적․질투적으로 변한다. 이 영혼은 그 열정을 “나”뿐만이 아니라 “내 것”이라 느낀다. 그는 칼로써 적의 신체를 도륙할 때나 피비린내 나는 신음이 승리감을 엄습할 때 도취감을 맛본다. 모든 현실적인 “남성”은 가끔 후대 문화를 가진 도시 안에서 여전히 자신 속에 감추어져 잠자고 있는 이 원시적 영혼의 열정을 느낀다. 그가 느끼는 무엇인가가 “유용”하다거나 “일을 절약한다”는 가망 없는 불쌍한 확신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며 동정, 화해, 안정의 갈구라는 이 빠진 감정은 더더욱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자신의 강인함과 행운 때문에 계속 타자를 공포스럽게 하고 타자에게 경이감을 주며 미움을 받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며 모든 것에 대하여 그것이 살아 있는 생물이든 사물이든 복수심에 불탄다. 그것들은 단지 생존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자긍심을 손상시킨다.

그런데 이 영혼은 점차 전체 자연에 대치하여 소외되어 간다. 모든 육식 동물의 무기는 자연적인데 인위적으로 제작되고 심사숙고하여 선택된 무기를 움켜진 인간의 주먹만이 그렇지 않다. 여기에 자연에 대립하는 반대 개념으로서의 “인위적 기술”이 시작된다. 인간의 모든 기술적 처리 절차는 인위적 기술이며 활 만드는 기술, 말 타는 기술, 전쟁 기술, 건축 기술, 행정 기술, 제사 지내는 기술, 예언의 기술, 그림 그리는 기술, 시를 짓는 기술, 과학적 실험 기술 등등 모두 항상 이렇게 일컬어져 왔다.
불의 점화로부터 우리가 이 높은 문화수준에서 본래 기술적이라 특징짓는 성과들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작품은 인위적이고 반자연적이다. 창조력의 특권은 자연에게서 빼앗은 것이다. “자유 의지”란 다름 아닌 능동적 반항이다. 창조적 인간은 자연과의 유대를 피하였고 새로운 창의력을 발휘할 때마다 자연으로부터 멀어졌으며 자연을 증오해 마지않았다. 이것이 곧 걷잡을 수 없이 인간과 전 세계 사이의 숙명적 양분을 가속화하는 역사,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 도리어 이에 대항하는 손길을 뻗는 반항아의 역사, 즉 그의 “세계사”이다.

이로써 인간의 비극은 시작된다. 자연은 그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연에 종속된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인간은 물론 모든 피조물을 포괄한다. 모든 위대한 문화는 알고 보면 그만큼 저급한 것이다. 전체 인종은 내적으로 파괴되고 부서져서 비생산성과 정신적 착란에 빠진 채 스스로 저지른 대가만큼 그 희생물이 된다. 자연을 상대로 한 싸움은 희망이 없는데도 종말에 이르기까지 행해지고야 말 것이다.

오르데카 이 가세트 저  정영도 역 『 인간과 기술』



<2>
  자공이 남쪽의 초나라에 여행하고 진나라로 돌아오려고 한수 남쪽을 지나다가 한 노인이 마침 밭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굴을 뚫고 우물에 들어가 항아리를 안아 내다가는 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애를 써서 수고가 많은데 그 효과는 아주 적었다.

자공이 말했다.
‘여기에 기계가 있다면 하루에 백 이랑도 물을 줄 수가 있습니다. 조금만 수고해도 효과가 큽니다. 댁께선 그렇게 해보실 생각이 없습니까?’
밭일을 하던 노인은 고개를 들고 그를 보자 말했다.
‘어떻게 하는 거요?’
자공이 말하기를
‘나무에 구멍을 뚫고 기계를 만들고 뒤쪽을 무겁게 앞쪽은 가볍게 합니다. 그러면 물 흐르듯이 물을 떠내는데 콸콸 넘치듯이 빠릅니다. 그 기계 이름을 두레박이라고 하죠’했다.

밭일을 하던 노인은 불끈 낯빛을 붉혔다가 곧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내 스승에게서 들었소만, 기계 따위를 갖는다면 기계에 의한 일이 반드시 생겨나고 그런 일이 생기면 반드시 기계에 사로잡히는 마음이 생겨나오, 그런 마음이 가슴속에 있게 되면 곧 순진 결백한 본래 그대로의 것이 없어지게 되고, 그것이 없어지면 정신이나 본성의 작용이 안정되지 않게 되오. 정신과 본성이 안정되지 않은 자에겐 도가 깃들지 않소. 내가 두레박을 모르는게 아니오, 도에 대해 부끄러워 쓰지 않을 뿐이오.’

자공은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모르며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있었다.  

                                                                『 장자․천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