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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고은의 귀 – 시인이 두 번 귀를 빼앗겨 ‘헛귀’로 살게 된 사연
서해성/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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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오후 경기 안성 자택에서 만난 고은 시인. 온전히 듣지 못하는 그는 자신의 몸속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헛귀를 만들었다. 고은 시인은 “생리적 결핍이 심리적 풍요의 원천이 되었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고은 시인은 두 귀가 다 인조고막이다. 한쪽 귀는 아예 들리지 않고, 다른 한쪽은 보청기에 의지해 가까스로 듣는다. 고막은 ‘인조 고막’이지만 고은은 세상 소리를 빠짐없이 듣고 기록하고 노래해 왔다. 반년 남짓 머물던 이탈리아에서 막 돌아온 고은 시인을 소설가 서해성씨가 만났다. 경기도 안성 시인이 사는 집에서 두 사람은 고은의 귀와 시에 대하여 끝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고은은 귀를 두 번 빼앗겼다. 한 번은 스스로 앗았고 한 번은 부동자세를 한 공화국 유신이 빼앗아갔다. 그가 한쪽 귀를 나라에 바치고서야 시인이 된 건 아니다. 다만 한쪽 또 한쪽 귀를 잃고 헛귀를 얻어, 이내 헛귀로 산 것이다.
물의 나라 베네치아에서 막 돌아온 시인의 등뼈는 딱딱했다. 방충망을 쳐놓은 문간에서 잠시 그의 몸에 귀를 대보았다. 저 메마른 매듭 아래 어딘가에 귀가 있을 것이었다. 그의 귀는 귀에 없으므로. 귀에 없는 귀는 어디에 사는가.
‘세노야’ 노랫말은 어떻게 태어났는가
천둥 뇌성 치던 밤을 지난 시인네 집에서 진짜 주인은 책이다. 거실, 마루, 또 층계서껀 책들은 안팎으로 꽉 찬 고은이었다. 집에 돌아와 토해내는 그의 모국어를 큰 책상 하나는 일층 넓은 방을 차지한 채 듣고 앉은뱅이책상은 뒷방에서 원고지를 가득 인 채 누워서 들었다. 그자들도 귀가 없기는 필시 마찬가지였다.
간간이 빗발 흩뿌리는 여름날 오후를 건너오는 고은의 말은 표준말이되 죄 사투리였다. 어차피 시란 사투리다. 비문법일 수 있을 때만 시는 문법적이다. 말의 규율 또한 체제일 따름이다. 모든 체제란 권력이다. 그 체제와 체제가 부딪힐 때, 말도 사람도 대지도 상하는 법이다. 그해 가을도 그러하였다.
엉덩이의 피부 조각을 떼어 인조고막을 만든 시인의 오른쪽 귀엔 보청기가 달려 있다.
전쟁이 끝났다고 전쟁이 끝난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다. 서지 군복 잘 빼입은 외국 군인들이 분단사에 불쑥 돋아난 판문점에서 작전지도 위에 금을 그었다고 전쟁은 종전되지 않는다. 설령 기억은 지워져도 몸은 기억하는 법이다. 신체의 모든 탁월함과 생동하는 타락과 퇴폐는 기필코 모두 몸의 기억일 뿐이다. 그게 전쟁임에랴. ‘미안하다/ 미안하다/ 나 같은 게 살아서 오일장장터에서 국밥을 다 사 먹는’ 50년대 고은에게 죽음은 몸 구석구석 눈을 뜬 채 닦아낼 수 없는 액체로 묻어 있었다. 살아 있는 게 미안한 것으로 삶을 자각할 때는 산 자들보다 죽은 자들이 더 자주 말을 걸어올 때다. 청년 고은은 군산 옆 옥구, 쌀 ‘미’자 미면, 용이 머무는 용둔마을 향리 뒷동산에 올랐다. 죽음이 그의 몸을 유곽인 양 얼씬거리던 하오였고, 나머지는 기억나질 않는다. 기억나지 말아야 한다. 청산가리가 두 귓구멍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그가 부어넣은 것이다. 그는 전쟁을, 죽음을 귀로 죽이고자 했다. 이 산천 가득한 저 비명들을 죽여 용서해야 했다. 바람소리, 빗소리, 새소리, 어머니 말소리마저 아득히 무심해진, 청각살인이었다. 귀가 불같이 뜨거워 부지중에 몸을 한쪽으로 움직거렸다. 왼쪽 고막은 타버렸고 오른쪽 뺨은 흘러나온 화공약품에 그을린 채로 깨어난 그는 반 귀머거리로 출가를 하고, 시가 되었다.
남은 한쪽 귀로도 너무 많은 걸 들은 고은마저 세상은 불용하였다. 듣는 것도 죄가 되는 시대가 있었다. 듣는 것이 죄가 되는 시대가 여기 있다. 불고지한 죄. 청각이 죄일 때, 말은 절로 죄가 된다. 미처 그 사이에 노래가 있었다. 모든 노래에는 귀가 달려 있지만 고은의 귀는 죽어 노래가 되었다. 그 귀는 아무 뜻 없는 말을 불온한 세상에 퍼뜨렸다. ‘세노야’라고.
미당(시인 서정주)과 동행하여 진해 육군대학에서 시를 말하고 돌아오는 길에 내준 배를 타고 오던 참이었다. 군인도 시를 듣던 때가 있었던 거다. 실로 시란 가장 연질의 탄환이다. 심장을 꿰뚫지만 아무런 상해도 입히지 않는. 끝내 회복하기 어려운 건 총알 쪽보다는 시다. 계기적 폭발과 융기, 파괴에서 전쟁 또한 악의 시편이다. 권력과 자본과 애국심이라는 마성이 쓰는. 그 군함 갑판에서 파도 저편 배들을 보았다. 어부들이 멸치잡이 그물을 잡아당기면서 노래는 풀어주고 있었다. 세노야라고.
고막을 찢으며 찾아온 유신의 최후
한쪽 귀로 온 멸치 떼 비릿한 가락이 고은에게서 다시 흘러나온 건 기독교방송에서 심야방송을 할 때였다. 시를 쓰고 싶어 하는 동갑내기 음악평론가 최경식이 사준 흑맥주 2천㏄에 세노야는 산과 바다 말고 종로5가에 비늘을 드러냈다. 곡을 붙인 이는 한양대 음악대학 여학생 김광희. 양희은이 불러 널리 알려졌지만 처음 노래한 이는 최양숙이었다. 그는 고은에게 술을 먹이고 즉석에서 노랫말을 토해내게 한 뒤 낚아채간 이의 동생이었다. 대략 2천㏄만큼 고되게 취해서 흥얼거려야 노래에서 제맛이 나는 까닭이 여기 있다. 꼭 술을 마셔야 할 필요까지는 없다. 노래란 시와 가락으로 빚어 귀에 붓는 술이다. 부를수록 곡조가 맛이 없거든 마실수록 술맛이 떨어지는 사람이나 세월과 함께하는 터다. 세노야는 그런 노래다. 세노야라니. 아무런 의미조차 없는 어부가의 앞소리이거나 뒷소리에 목은 왜 메는가, 세노야.
“의미 없는 것에 부러 의미를 부여하면 맹물에 물을 타는 격이지.”
통영, 여수 어디께 바닷가 말이 아직 의미의 선사시대로 출렁거릴 때가 있었다. 세노야는 그 언어다. 훗날 고은은 후쿠오카 바다에서도, 동지나해에서도 어부들 노동요에서 세노야를 들을 수 있었다. 원시언어의 희미한 잔해가 동아시아 바다의 밀물썰물을 따라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 또한 말로 짠 그물을 던져 근본언어를 잡아당기는 어부다. 그는 말이 곧 사물이고 사물이 곧 말인 시대로 돌아가기 위하여 대폿집에서, 인간의 바다인 광장에서 오늘도 물질을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전쟁과 죽음을 죽이고자 했다. 고향 용둔마을 뒷동산에 올라 청산가리를 귓속에 부었다. 귀가 불같이 뜨거워 움직였다. 왼쪽 고막이 탄 채 깨어났다. 종로서에서 오른쪽 귀도 잃었다. 때린 자마저 어쩔 줄 몰라 했다. 전두환 쿠데타 뒤 또 끌려갔다. 열이틀 감방 단식이 이어지자 엉덩이에서 뗀 피부조각으로 고막 만들어 넣는 수술 받았다
김민기 양희은 보아 등을 거쳐 나윤선에 이른 노래 ‘가을편지’ 역시 최경식이 권한 술맛에 넘어가 단숨에 쓰고 잊어버린 것이었다.
“시가 바로 나오질 않으면 날 모욕하는 것만 같아. 쓴 건 잊어버려야 또 쓰지.”
언제까지나 잊어버리고 싶은 편지였다. 가을편지는. 강만길(고려대 명예교수)이 소녀 취향 따위라고 놀릴 때면 갑장이라고 말을 튼 것까지가 다 후회였다.
후회 없는 가을편지란 없다. 가을엔 편지를 써야 한다. 이건 문자인의 의무다. 쓰지 않아도 가을편지는 간다. 고은이 불특정 다수에게 함부로 가을편지를 발송해버렸으므로.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항차 모든 여인에게 연심을 품다니. 그리하여 그의 시와 노래는 유죄다. 고은은 이제라도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를 ‘외로운 사람이 아름다워요’로 바꾸고 싶어 한다. 더 불특정으로 향하는 일이다. 단언컨대 가을 사내는 편지를 쓰고 부치는 것만으로도 우체통 옆에 선 채로 불행하나니. 고은이 이미 그렇게 노래해버렸으므로.
그리고 유신이 있었다. 고은에게 유신의 최후는 곧장 고막을 찢으면서 찾아왔다. 1979년 6월23일 그는 윤보선(전 대통령)을 안국동에서 설득해 정오께 화신백화점 앞에 이르렀다. 그 시대의 쇼윈도에 민주주의는 1인용 단품이었다. 한국적 민주주의. 백기완 김규동 김병걸 임채정 등 12명은 미국 대통령 카터 내방에 맞춰 ‘민주주의 없이 안보 없다’ ‘노 카터 노!’(No Carter No) 현수막을 펼쳐들었다. 곧 경찰이 둘러싸더니 그들을 끌고 갔다. 그 오후 고은의 고막이 마저 사라졌다. 귀청이 싱싱한 자들에게도 세상은 무거운 침묵이었다. 권력과 언론은 목소리 큰 귀머거리였다. 제 음성 청취만 강요할 뿐 남의 울음소리는 듣지 못했다. 의심 많은 그들은 대신에 대중의 귀와 양심과 정의에 도청장치를 달았다. 고은은 한쪽 귀로 그 위태로운 능선 위를 내달리면서 시를 쓰고 행동했다. 행동은 삶으로 시대와 역사에 쓰는 시였다. 시와 행동은 하나였다. 시인에게 시는 벌써 행동이지만 시인에게 거리의 행동을 요구하는 그 상스러운 시대는 뜨거운 시를 낳는다. 유신의 한복판에서 그는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고 목 놓아 노래했다.
‘헛귀’가 없는 자는 시인이 아니라네
오른쪽 귀를 망가뜨린 곳은 종로경찰서였다. 잠시 기둥이 흔들리는 듯 멍했다. 때린 자마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정작 그는 세상 소리를 듣지 않겠다던 뜻이 서른 해 가까이 지나서야 실현되었구나 싶어서 혼자 빙그레 웃었다. 두 귀를 잃은 시인은 그 순간 전쟁 직후 향리로 돌아갔다. 거기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도,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물소리도, 죽은 벗들 말소리도 들어 있었다. 한참 뒤에 희미하게 돌아온 청각은 두 달이 채 못 되는 8월 와이에이치(YH) 사건으로 서대문옥에 들어갔을 때 문득 싹 안 들리게 되었다. 청각 혼자서 고향을 다녀오길 거듭했다. 서대문옥 3사로 소장이 직접 달려와 오직 단품권력 박정희의 죽음을 알렸을 때 그는 오히려 껄껄 웃음이 터졌다. 그 웃음소리를 어디 먼 데서 남이 웃는 소리인 양 들어야 했던 고은은 병보석을 받고 귀 수술을 하려던 차에 전두환 신군부세력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다시 끌려들어가야 했다. 12·12에 이은 저 80년, 5·17 2차 쿠데타. 내란을 일으킨 자들은 진짜 내란을 몰랐다. 시인은 늘 내란중인 자다. 그는 자신과 자기 언어를 향해 쿠데타를 일으키는 존재다. 내란이 없거든 전(前) 시인일 뿐이다. 고은의 “만인보”야말로 그 내란 속에 육군교도소에서 잉태되었다.
“그때 아일랜드 혁명가 보비 샌즈가 잉글랜드 감옥에서 단식하다 죽었지. 시도 쓰는 친구였는데. 내 귀가 아일랜드 덕을 봤어.”
열이틀 감방 단식이 이어지자 국제여론이 두려워진 군부는 그제야 고은의 잃어버린 귀를 찾는 수술을 마지못해 허용했다. 서울 화곡동 육군병원에서 김종선(서울대병원 이비인후과)은 다섯 시간 수술 끝에 인조고막을 붙여주었다. 엉덩이에서 피부 조각을 떼어내 왼쪽은 아예 귓구멍을 막아버리고 청신경이 몇 가닥 붙어 있던 오른쪽은 고막을 해 넣었다. 그리하여 귀가 된 엉덩이는 저 밑바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특별한 청력을 지니게 되었다.
“몸 자체가 파괴된 고독은 심상의 고독과 달라. 앞뒤가 없어. 즐거움도 있지. 이전에 듣던 소리가 현재에서 들리고 나중에 들을 소리가 먼저 와서 들려. 섭섭하고 원통하니까.”
고은의 몸속에는 헛귀가 있다. 들리지 않을 때 듣는 귀가 있다. 헛귀가 없는 자는 시인이 아니다.
모국어를 쓰는 족속 사이에 시가 살아 있다는 건 대중의 직관이 노래로 숨 쉬고 있다는 뜻이다. 기계문명 자본주의가 이 직관을 앗아가고 있지만 자본주의는 끝내 시보다 오래 살지 못한다. 어제보다 더 어제이고 내일보다 더 내일인 것이 시다. 잠시 시인의 귀를 앗아갈 수는 있지만 시를 이길 권력도, 체제도 아직까지 세상에는 없다. 시는 자유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순간 시인은 자유인으로 태어난다. 베네치아, 로마, 밀라노, 또 희망봉에서 300여 편 시를 쉼 없이 써가지고 돌아온 고은의 고막은 모든 자본주의보다 예리하게 얇고 또 두껍다. 시인은 시로써 늘 세계사적 개인이다. 혁명가와 더불어. 그러므로 종로 네거리 함부로 걷지 마라. 그 가운데 시인 있나니.
안성시내 대폿집 안일옥으로 가기 위해 엉거주춤 일어서면서, 고은은 말한다. 헛귀를.
“생리적 결핍이 심리적 풍요를 만들어내는 거지. 내부는 끊임없이 외부와 관계 속에 성립하는 거거든. 뭐라고? 이제 와서 두 귀가 다 들린다면… 지랄 같을 것이야. 그냥 미지수로 남겨 두는 것도 좋아.”
한 손을 들어 귓바퀴를 만들면서 그는 세상을 청음해왔다. 시인이란 시대의 청각으로 사는 자다. 그 청각으로 시와 노래는 제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제 곡조를 닮는다. 이는 시인 자신이자 그 시를 식량으로 읽고 살아가는 모국어 무리들의 음성이자 가락이다. 이것이 고은의 헛귀이자 헛귀 고은이다. 헛귀에는 귀청이 없나니, 귀 없는 자 헛귀로 살고 귀가 있는 자라도 오늘 헛귀 하나 얻었다면, 그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