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성장 신화의 허상에서 벗어나기
        
고은영 논술강사 | key63@paran.com
    
수업 대상 - 고1 이상
수업 교재 -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더글러스 러미스, 녹색평론사
참고 도서 -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 에르베 캄프, 에코 리브르
                
*학습 목표    
1. 경제 성장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깨닫는다.  
2. 올바른 현실 인식을 토대로 경제적 삶의 목표를 세워본다.  
  
*들어가며  
      
“~하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되지.” 지난 대통령 선거 즈음 인터넷에서 한창 유행했던 댓글이다. “위장전입 하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되지”, “탈세 좀 하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되지”, “숭례문이 불타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되지.”    
말장난 같기도 하고 자조적이기도 한 이런 댓글 달기는 인터넷에서 아직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댓글이 한낱 말장난이나 허무개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다른 무엇보다 경제 성장이 최우선이라는 인식, 경제가 성장할 수 있다면 다른 사회문제는 덮어두거나 보류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전제가 그 아래 깔려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경제가 성장하면 그 성장의 열매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나누어질 것이라는 환상이 우리로 하여금 경제 성장 구호에 열광하게 만드는 것이고 저 저급한 농담에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를 살리는 것이 우리 사회의 가장 시급한 과제일까? 경제가 성장하지 않으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그리고 경제가 성장하면 정말 우리 모두 잘 살게 되는 것일까? 이 수업은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경제 ‘상식’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면서 시작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읽은 책은 더글러스 러미스 교수의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이다. 가벼운 재생지로 만들어진 이 작은 책에서 더글러스 러미스 교수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경제는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사고방식은 경제학의 객관적인 결론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결론이며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눈을 진정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하는, ‘현실에서 유리된 현실주의’라는 것이다. 담담한 어조로 전하는 이 책의 메시지는 단호하고 강력하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입된 ‘상식’의 허상을 하나하나 걷어내며 세상을 다르게 보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게다가 ‘경제 성장 이데올로기’라는 다소 어려워 보이는 주제를 다룬 책치고는 아주 쉽게 읽히는 책이기도 하다. 자신이 88만원 세대임을 자조적으로 말하면서도 어떻게 하든 상위 5%에 들어가기만 하면 풍요로운 삶이 보장되리라 믿는 아이들에게 이 책은 ‘과연 그럴까,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에도 모자람이 없다.
이 책으로 수업할 때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를 참고하면 더욱 좋다. 현직 르 몽드 기자인 에르베 캄프는 풍부한 자료와 치밀한 분석을 통해 경제성장 이데올로기가 실은 정교한 정치적 장치이고 자본주의의 탐욕이 전지구적 생태위기를 야기하는 주범임을 폭로하며 이제는 경제성장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함을 역설한다. 도발적인 제목만큼이나 적절한 예와 흥미로운 비유로 무거운 주제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고 있어 고등학생들에게 읽히기도 좋은 책이다.

* 책 속에서 우리 현실의 문제 발견하기.
  
1. ‘타이타닉 현실주의’란 무엇인가?
  
책의 앞부분에서 저자는 성장 이데올로기의 허구를 지적하기 위해 ‘타이타닉 현실주의’라는 비유를 사용한다. 이 비유의 의미를 읽어내고 지금 우리의 현실인식이 어떤 문제를 갖고 있는지 발견해보자.      
  
타이타닉호는 빙산을 향해서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빙산은 현실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타이타닉호가 마침내 침몰한 것도 현실입니다. 오늘날 이 지구라는 타이타닉호에 타고 있는 우리들은 빙산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선내방송에서 몇 번이나 “빙산에 부딪힙니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모두가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들어왔습니다. 그 말이 진부할 정도로, 더 듣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 말을 하면 사람들은 “또 그 얘기?"라고 합니다. 마침내 빙산에 부딪힐 거라는 것은 알고 있더라도, 그 빙산은 아직 보이지 않아서 현실적인 얘기라고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귀에는 들어와도 그것은 아직 볼 수는 없습니다.볼 수 있는 것은 타이타닉호라는 배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유일한 현실은 ‘타이타닉호’라는 배뿐입니다.    
        
타이타닉호 속에는 다양한 판에 박은 일상사가 있습니다. 승객의 일, 선원의 일이 있습니다. 엔진에는 연료를 넣지 않으면 안 되고, 배가 전진하기 위해서는 온갖 기계가 항시 확실히 관리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승객의 방을 청소하고, 침대를 정돈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요리사는 모두를 위해 요리를 만들고, 밴드는 댄스홀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바텐더는 칵테일을 만듭니다. 모두 각자 일상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계속하는 사람이 ‘현실주의자’입니다.    
  
누군가가 “엔진을 멈추어야 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비상식, 비현실주의적입니다. 왜냐하면, 타이타닉호라는 배는 전진하도록 되어 있는 것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저마다의 일거리가 없어져,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전진한다는 것이 타이타닉호의 본질인 것입니다. 전진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엔진을 멈추어야 한다”고 말하면 모두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오늘날, 세계 전체에 퍼져있는 현실주의는 그러한 현실주의라고 생각됩니다. 현실주의적인 경제학자가 타이타닉호에 “전속력으로”라는 명령을 하려고 합니다. “속력을 떨어뜨리면 안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타이타닉호의 논리, ‘타이타닉 현실주의’입니다. 어째서 그것이 논리적이고 현실주의적으로 들리는가. 도무지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만일 타이타닉호가 전 세계라면, 배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것은 논리적일 것입니다. 타이타닉호의 논리는 그것을 전제로 성립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배가 세계이며, 배 바깥에는 아무것도 실체가 없다고. 마찬가지로, 경제학자의 논리도, 만일 세계경제 시스템 이외에 아무런 현실도 없다면, 매우 뛰어나게 합리적인 논리인 셈입니다. 그렇지만, 타이타닉호의 바깥에는 바다가 있고, 빙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경제의 바깥에는 자연환경이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저자는 경제 성장론을 맹신하는 사람들을 '타이타닉 현실주의자'라고 부른다. 커다란 사회적 저항 없이 자본에 의한 세계화가 진행 중이며, 특히 개발독재하의 압축적 경제성장을 경험하면서 경제 발전 이데올로기를 별다른 고민 없이 받아들인 우리나라에는 경제 성장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타이타닉 현실주의'가 그 어느 사회보다 팽배해 있다. 뿐만 아니라 빙산을 향해 돌진하는 이러한 현실주의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유토피아주의자, 낭만주의자, 몽상가로 매도되기도 한다. 결국 타이타닉 현실주의는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추종하는 경제 성장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이름이며 성장의 허상만을 좇으며 현실의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모순된 인식을 갖게 만드는 주범인 셈이다.

2. 경제가 발전하면 우리는 모두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우리가 경제 성장이라는 구호에 환호하는 것은 경제 성장의 결실이 우리 모두에게 분배되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부(富)와 빈곤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통해 그러한 통념이 올바른 것인지 토론해보자.  

‘rich’란 라틴어의 ‘rex’, 즉 ‘국왕’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rich'의 본래 의미는 경제적인 힘이 아니라 권력입니다. 국왕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힘이 이 단어의 본래 의미였습니다. 그것이 부자의 본래 의미인데, 수백 년이 지나 이것이 경제적인 의미가 되었습니다. 즉 돈으로부터 생기는 힘, 바꿔 말하면 경제력이 ‘rich'의 의미가 된 것입니다. 왜 돈을 가지고 있으면 힘이 되느냐 하면 그것은 남들이 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돈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아무도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돈을 가지고 있어도 전혀 힘이 되지 않습니다. 즉 돈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돈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부자의 전제입니다.

부자가 되려고 하면 원칙으로서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돈을 모으는 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위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습니다. 부자란 일종의 사회적인 관계, 곧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가리키는 언어입니다.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이전보다 돈을 많이 가지게 된다고 해도 사회는 풍요로워지지 않습니다. 경제용어로 말하면 그것은 단순한 인플레이션입니다. 다만 물건의 가격이 올라갈 뿐으로, 모든 사람이 유복해질 수는 없습니다.

빈곤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전통적인 빈곤입니다. 이것은 자급자족 사회를 가리킵니다. 자급자족 사회는 가진 것이 많지 않지만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과 필요한 것 사이의 차이가 그다지 없기 때문에 전통적인 빈곤 속에 있는 사람들은 이 정도의 생활로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깥에서는 가난하게 보더라도 자급자족 사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는 ‘바깥에서 본 빈곤’입니다.

두 번째입니다만, 이것은 세계은행이 말하는 ‘절대빈곤’입니다. 이것도 매우 알기 쉬운 빈곤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먹을 것이 부족하고, 약이 모자라고, 입을 옷이 없어서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없는 상태, 영양실조라든가 어린이가 굶어 죽는다든가, 그런 빈곤입니다.

세 번째는 앞에서 설명했던 부자의 전제가 되어있는 빈곤입니다. 어떤 사회 속에 경제력이 있는 부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 주변에는 경제적으로 무력한 사람들이 다수 있게 마련입니다. ‘부자/가난한 자’라고 하는 사회관계 속의 빈자란 그 사회 안에 있는 한, 부자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고 부자를 위해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빈곤에 관한 증언, 혹은 문학을 읽어보면 배가 고파서 고통스럽다고 하는 내용도 있습니다만 그보다 많은 것이 모욕적인 장면입니다. 부자에게 바보 취급을 당해야 하는 그런 사회관계가 가장 괴로운 것입니다. 바보 취급을 당하면서도 반항을 할 수 없는 그 무력감이 이 빈곤의 특징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네 번째의 빈곤이 있습니다. 기술발달에 따라 새로운 필요가 만들어지고, 거기로부터 새로운 종류의 빈곤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일리치의 말을 빌리면, ‘근원적 독점’에서 생기는 빈곤입니다. 경제의 역할은 본래 의, 식, 주라는 인간의 필요에 응하기 위해 먹을거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물건이나 서비스를 생산하여 제공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먹을 것이 필요하고, 옷이 필요하고, 살기 위한 건물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제공하는 것이 경제의 역할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기본욕구입니다

그런데 20세기가 되면서 사람들이 꿈도 꾸지 못했던, 필요하다고 생각도 해보지 못했던 물건이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존재하지 않았고, 그래서 필요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던 물건을 만들게 되었습니다만, 그것은 단순히 사람들의 취미라든가 흥미가 변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새로운 제품을 사지 않으면 만족한 생활이 불가능한 그런 사회를 그 동안 우리는 만들어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적이 없는 상품이 처음에는 사치품으로서 등장합니다. 살 수 없는 사람은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 일로 속이 상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사회가 변하면 그 상품이 어느새 ‘있으면 좋은 것’에서 ‘없으면 곤란한 것’으로 변해가며 살 수 없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고 가난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기술이 생기면 처음에는 부자만이 삽니다. 그것이 차츰, 있으면 좋다가 아니라 없으면 곤란한 것이 되어 갑니다. 살 수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살 돈이 없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됩니다. 이 빈곤의 특징은 경제발전이나 기술발전에 따라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나 기술의 발전에 따라 재생산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 빈곤은 기술발전에 따라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빈곤입니다.

경제 발전 이데올로기가 갖고 있는 가장 커다란 매력은 경제가 발전하면 빈곤은 저절로 해소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다. 그러나 경제 성장을 통해 모두가 잘 살게 되리라는 기대는 실현 불가능하다. 빈부(貧富)라는 것은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에서 결정되는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부(富)는 개인 간의 경쟁을 통해 획득하는 것이고 부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은 반드시 상대적으로 덜 가진 자를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 함께 잘 살자’는 구호는 허구일 뿐이다. 또한 경제 발전 이데올로기는 그 역사적 근원에서부터 불평등과 착취를 감추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경제 발전’이라는 말은 미국 트루먼 전 대통령이 1949년 취임연설문에서 사용하면서 지금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갖게 되었으며 미국의 국가 정책이 되었다고 한다. 즉,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마땅히 투자할 장소가 없었던 미국에게 제3세계국가들은 투자대상으로 적격이었고, 미국은 이 투자대상 국가를 ‘미개발국가’라 명명하고 발전의 대상으로 지목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경제 발전’이란 서양의 경제시스템을 채택하지 않은 국가들을 서양의 경제시스템으로 전환시켜 효율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미국의 전략적 개념이었다는 것이다. 제3세계국가들이 그러한 서구의 발전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면서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버리고 미국식 풍요를 추구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빈곤의 근대화 과정일 뿐이다. ‘근대화가 되면 빈곤에서 해방된다’는 고정 관념과는 달리 경제 발전이나 기술 개발로 인해 새로운 제품을 사지 않으면 만족한 생활이 불가능한 그런 사회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빈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3. 성장과 분배의 딜레마, 파이론의 허구.

경제 성장주의 노선은 흔히 ‘파이론’에 의해 정당화된다. 당장의 고통과 희생을 참으면서 성장의 과실, 즉 파이를 키운 다음 분배를 고려해야 하며, 만약 나눌 궁리부터 먼저 하면 성장이 불가능해 나눠먹을 것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선성장후분배'라는 성장 이데올로기야말로 평범한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못하게 하는 사고장해(思考障害)라고 표현하고 있다. 파이론이 갖고 있는 함정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들은 빈부의 차이가 사회에 나타나면 그 해결을 정당한 분배에서 찾지 않고 경제성장에서 찾았습니다. 풍부한 파이를 재분배하려고 하지 않고, 파이 그 자체를 크게 만들면 작은 조각도 그 나름대로 커질 테니 모두 만족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게 지금까지 미국정부가 진부하게 들릴 만큼 반복하여 이야기해 온 내용입니다. 파이 조각의 크기를 고르게 하는 게 아니라 파이 전체를 크게 만든다. 그렇게 하면 모두 자기 몫의 비율은 낮아질지 몰라도 조각 자체는 커진다. 이렇게 재분배의 정의 대신에 경제성장을 모색해왔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파이는 커질지 모르지만, 지구 곧 자연환경은 커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더 큰 파이를 목적으로 경제성장을 계속해서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세계경제 시스템 그 자체의 구조에서 생각하면, 파이의 큰 부분은 어째서 크냐 하면 작은 쪽의 것을 가로채고 있기 때문에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제성장에 따라 작은 파이 조각도 커진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실제로도 지구에는 ‘마이너스 성장’국가가 있습니다. 현재 세계인구의 20%가 세계자원의 80%를 소비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유명한 통계입니다. 물론 자원의 80%가 모두 그 20%의 사람들이 생활하는 나라 안에 있지 않습니다. 풍요로운 나라의 풍요로움이 어디에서 오느냐 하면 이른바 가난한 나라로부터 수입되고 있습니다. 잘사는 나라는 가난한 나라의 것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풍요로운 것입니다. 풍부한 파이 재료는 본래 가난한 나라 것이므로, 그들의 파이 조각이 커질 까닭이 없습니다. 그것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그렇고, 또 한 국가의 국내 경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장과 분배 논쟁은 그 동안 지식인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되풀이된 지난한 논쟁이며 앞으로도 오랫동안 반복될 것이다. 물론 ‘파이론’ 자체의 논리는 나름 설득력이 있다. 경제가 발전하고 국가의 경제 규모가 커지면 비록 빈부의 차가 발생하더라도 국민의 생활이 일정 부분 개선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 압축적인 고속성장을 거치며 파이론을 직접 증명했다. 소득분배의 불균형에 따른 양극화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파이론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경험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자연환경과 경제발전의 연관성, 세계 경제 시스템의 구조에 대한 설명을 통해 선성장후분배론의 허구를 지적하며 이미 파이가 충분히 커졌음에도 그것을 정의롭게 나눌 생각은 하지 않고 자꾸만 파이를 키워야만 한다고 강조하는 성장주의자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경제 성장을 통해 파이는 커질지 몰라도 자연 환경은 커지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다. 그리고 큰 조각의 파이는 결국 작은 조각의 파이를 착취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경제성장이 작은 파이 조각도 키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경쟁과 낙오의 공포, 성장과 풍요의 신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대안을 모색해보기.

1. 저자는 자본주의 경쟁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고 경제성장 없이도 진정한 풍요를 누릴 수 있다며 경제발전의 대안으로 “대항발전”을 제시한다. 저자가 말하는 “대항발전”의 의미와 한계를 토론해보자.

경쟁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기본적인 감정은 두려움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암묵 속에 존재하는 두려움입니다. 열심히 쉬지 않고 일하지 않으면 가난뱅이가 될지 모른다, 집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공포. 혹은 병에라도 걸리면 병원에 가야 하는데 그 병원비를 지불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라는 공포입니다. 그러므로 사고방식을 바꾸고 싶다가도 결국에는 어떻든 일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개인적인 선택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런 공포가 있다는 것은 사회의 안전구조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경쟁사회란 기본적으로 그런 구조입니다. 즐겁기 때문에 이 일을 한다기보다, 목이 잘리면 나는 어떻게 되나, 직장에서 잘리면 가족은 어떻게 되나, 아이들은 어떻게 되나 하는 공포가 경쟁사회의 원동력입니다. 공포가 사회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공생사회라든가 상부상조의 사회를 실현하고 그 어떤 이도 빠짐없이 서로 뒤를 돌보아주는 그런 진정한 의미안전이 보장된 사회라고 한다면, 그 두려움은 크게 줄어들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두려움이 줄어든다면 건전한 제로성장의 사회는 가능해지지 않겠습니까.(제로 성장-경제성장률이 멈춘 상태.)

제로성장을 환영한다는 것은 소극적인 정책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경제성장보다도 훨씬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추구해 간다는 뜻입니다. 물질만의 풍요가 아니라 참다운 의미의 풍요를 추구하는 사회, 그리고 정의에 바탕을 둔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이냐는 겁니다. 경제성장 사회와는 크게 다른, 훨씬 재미있고 신나는 역사적인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회를 추구하는 과정을 나는 잠정적으로 ‘대항발전’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대항발전’은 지금까지의 ‘발전’의 의미, 곧 경제성장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발전해야 하는 것은 경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거꾸로 인간사회 속에서 경제라는 요소를 조금씩 줄여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대항발전의 첫째 목표는 곧 ‘줄이는 발전’입니다. 에너지 소비를 줄이자는 것입니다. 각자가 경제활동에 쓰고 있는 시간을 줄이자는 것입니다. 가격이 붙은 것을 줄이는 겁니다.
대항발전의 두 번째 목표는 경제 이외의 것을 발전시키자는 겁니다. 경제 이외의 가치, 경제활동 이외의 인간 활동, 시장 이외의 모든 즐거움, 행동, 문화, 그런 것을 발전시킨다는 뜻입니다. 경제용어로 바꿔 말하면 교환가치가 높은 것을 줄이고 사용가치가 높은 것을 늘리는 과정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많은 사람들은 겁을 먹거나 화를 냅니다. 그런 경험을 자주 겪습니다. 가난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인가, 이것은 새로운 금욕주의가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회가 어느 정도 풍요를 실현하고 나서, 자발적으로 그 풍요를 줄인다, 그런 결정을 한다는 것은 역사상 그다지 선례가 없었습니다. 편한 생활에서 힘든 생활로 의도적으로 바꾼다는 것은 역사 속에서 찾으면 있을지 모르지만, 있었다고 해도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지금까지의 역사 속에는 지금 우리 상황까지 간 사회도 없었다, 즉 이 정도의 환경위기에 직면한 그런 사회도 선례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대답은 과잉발전한 나라를 냉정하게 바라볼 때 주어집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그 나라들이 경제성장을 계속해 왔지만 그 발전이 그 사회의 안전보장이나 참다운 의미의 풍요, 쾌락, 행복과 그다지 관계가 없었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오히려 경제성장이 지나치게 진행되고 있는 나라에서 온갖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있고 그 문제들은 경제성장에 따라 개선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무관심, 목적상실, 우울, 그리고 폭력. 꿈이 없는 젊은이나 장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이런 사회에는 많이 있고, 그들로부터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경제성장이 많이 진행된 곳일수록 그런 문제가 더욱 심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면 경제성장을 제로로 한다, 혹은 줄인다는 것은 결국은 즐거운 일이나 신나는 일을 그만두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 모두가 걱정하고 있는 여러 사회문제에 대한 참다운 해결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성장사회에는 확실히, 즐길 수 있는 기계나 오락 따위가 매우 발달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계나 기술에 의지하지 않고 즐거움을 느끼는 능력, 기쁘게 지낼 수 있는 능력은 오히려 사회 전체적으로, 혹은 개개인 모두 매우 뒤떨어져 있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이 ‘대항발전’은 금욕주의가 아니라, 참다운 의미의 행복주의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비에 따른 행복주의가 아니라 참다운 뜻의 행복주의. 인간의 즐거움, 행복을 느끼는 능력, 그것을 발전시키자는 것입니다.

저자는 주장은 단순하리만치 명쾌하다. 경쟁 논리와 경제 성장의 허상에서 벗어나 “대항 발전”을 통한 진정한 삶의 풍요를 추구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승자와 패자가 극명하게 갈리는 무한경쟁에서 벗어나 ‘그 어떤 이도 빠짐없이 서로 뒤를 돌보아주는’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고 경제적 이윤이 아닌 참다운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는 과연 가능할까? 주류적 성장 논리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실은 경쟁에서의 낙오이며 나만 스스로 빈곤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변화는 정말 가능한 것일까?

2. 경제 성장의 허상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의 풍요를 누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저자는 정치적 변화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경제와 정치의 상관관계에 대해 토론해보자.

빈부의 차이란 경제발전에 따라 해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빈부의 차이는 정의(正義)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경제학의 입장에서 보면, 빈부의 차이가 나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정의라는 말은 경제학의 용어가 아닙니다. 경제학 공부에서는 정의라는 말을 배우지 않습니다. 빈부의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커녕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정의’란 정치용어입니다. 빈부의 차이는 경제활동으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빈부의 차이를 고치려고 한다면 정치활동, 즉 의논하고 정책을 결정하여, 그것을 없앨 수 있는 사회나 경제구조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해소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경제제도를 민주화하는 첫걸음은 경제적인 결정이라고 말해지는 정책결정의 대부분이 실은 정치적 결정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정책이 정치적이라고 말하는 경우 그것은 전문가의 결정사항이 아니라 보통의 시민, 인민이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변함없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어오고 있다는 역사적 결정론이 아니라 선택은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가치판단을 동반한 선택이며 살아있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현실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나가기도 어려우리라는 무기력과 불안에 대해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사회의 기본적 구조, 가장 기본적인 경향을 국민이 바꾸지 못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경제 성장을 계속할 것인가, 혹은 환경 파괴적 성장을 멈추고 대항발전의 삶을 추구할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린 것이라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시민 개개인의 각성과 참여가 필수적이며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주체로서의 개인의 잠재력을 믿고 스스로 변화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 성장론이 하나의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라면 또 다른 삶의 방식 또한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그 외에도 ‘살아남기로서의 활동’으로서 여러 가지 구체적 대안을 제안한다. 저자의 논리는 명쾌하지만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의문과 회의에 머무르지 않고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와 더불어 차분하게 삶의 과정을 성찰한다면 진정한 삶을 위한 경제를 선택하고 만들어나갈 희망의 실마리들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수업을 마치며

지금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들은 경제 성장 논리에 깊이 포섭되어 있다. ‘부자 되세요’가 최고의 덕담이 되고 경제를 살릴 수만 있다면 온갖 도덕적, 윤리적 흠결이 있는 지도자라도 기꺼이 지지한다. 고등학교 경제교과서에서는 “경제 성장을 통한 생산량 증가는 물질적 풍요를 제공함으로써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기반이 되기 때문에 삶의 질의 기본 조건”이라며 “경제가 성장하지 못하면 복지 제도도 허상에 불과하며 내실 있는 교육, 진정한 민주주의의 신장도 실현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못 박는다. 압축적인 근대화과정을 이끈 초고속 성장체제가 만들어낸 부작용을 치유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분배’와 ‘보존’을 요구하는 목소리들도 ‘선성장후분배’ 논리 앞에서는 무기력한 것이다. 이러한 주류 경제의 성장담론 세례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경제성장과 삶의 질을 떼어놓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살벌한 승자독식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끝없는 각개전투에 골몰할 뿐이다. 무한경쟁체제 속의 존재론적 불안감과 공포 속에서 무기력하게 파편화되는 것이다.
줄 세우기식 성적 경쟁에서 깊이 상처받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압박에 시달리는 고등학생 아이들은 이 책을 읽고 ‘비현실적’이라거나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라는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도 때로 마음 속 깊이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이익이 순간적으로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과 그것이 민주주의의 과정에서 어려운 결정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예측해야 한다.”는 한스 요나스의 말은 우리가 우리와 우리 후손들의 미래를 위해 힘든 포기를 결정할 시기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 나갈 대안이 없지는 않다. 다만 우리가 외면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브레히트의 시 한 편을 소개하며 무거운 마음을 떨쳐버린다.

임시 야간 숙소 / 브레히트 B. Brecht / 김광규 역

듣건대, 뉴욕
26번가와 브로드웨이의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철이면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무숙자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동냥을 받아 임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 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 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