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 영화 : <아바타>, <써로 게이트>

가상공간에서 '나'와 '나'가 조우하다

 

조진화 영화논술 교사 cho6724@hanmail.net

 

대상 | 중학생

함께 본 영화 | <아바타> , <써로 게이트>

학습 목표 |

1. 영화를 통해 가상공간에서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

2. 가상공간과 현실공간에서 소통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다.

 

최근 극장가의 대세는 ‘가상현실(假想現實)’입니다. 영화 <아바타>, <전우치>, <시네도키, 뉴욕> 등이 그 예입니다. 가상현실은 컴퓨터를 이용하여 만들어낸 가공의 상황이나 환경을 사람의 감각기관을 통해 느끼게 하여 사용자가 몰입감을 느끼는 세계를 말합니다. 아마도 이러한 가상현실을 다룬 영화로 단연 대표적인 것이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 일 것입니다.

<아바타>는 가상세계의 볼거리와 주제의식을 두루 갖춘 ‘안티 없는’ 영화로 알려지면서 곧 1,000만 관객의 고지를 앞두고 있다고 합니다. <아바타>와 함께 ‘영화 대 영화’로 소개할 <써로게이트>도 인간을 대신하는 대리 로봇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미래의 가상현실을 그린 영화입니다. 두 영화는 모두 가상현실 속의 인간의 모습을 다룬 영화이지만 두 영화가 가상현실 속의 인간의 자아를 보는 시각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므로 그 얘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아바타>

(Avata, 제임스 카메론, 2009년, 162분, 미국, 12세 관람가)

 

미래의 어느 시기, 인간들은 에너지 고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구와 4.4광년 떨어진 행성 판도라를 개발한다. 판도라는 인류에게 꼭 필요한 대체 자원 언옵타늄의 최대 매장지다. 인류는 언옵타늄의 채굴을 위해 판도라에 기지를 설치하고 무분별한 채굴을 시작한다. 하지만 문제는 판도라에 살고 있는 토착민 ‘나비(Na’vi)’ 족이다. 나비(Na’vi)족은 인간과 비슷한 지능을 지닌 우주의 유일한 종족으로, 3미터에 가까운 신장, 인간보다 월등한 운동능력을 지닌 종족이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언어와 문명을 가지고 그들 행성과 자연, 동족과 깊은 유대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나비(Na’vi)’족이 자신들의 행성을 유지하게 해주는 에너지원인 언옵타늄의 채굴을 용인하지 않자 인간들은 그들의 설득을 위해 나비족의 DNA와 인간의 DNA를 결합해 만든 새로운 생명체 '아바타'를 탄생시킨다. 아바타는 ‘나비(Na’vi)’족의 외형에 인간의 의식을 주입시켜 링크머신에서 원격 조종을 하게 된다.

한편, 전투 중의 부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해병대원 ‘제이크’는 아바타 프로그램의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였던 쌍둥이 형이 사망하자 형을 대신해 판도라에 오게 된다. 링크 머신 속에서 자신의 ‘아바타’를 통해 자유롭게 걸을 수 있게 된 ‘제이크’는 자원 채굴을 막으려는 ‘나비(Na’vi)’의 무리에 침투하라는 비밀 임무를 부여 받는다. 하지만 임무 수행 중 ‘나비(Na’vi)’족 족장의 딸인 ‘네이티리’를 만나게 되면서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제이크'는 ‘나비(Na’vi)’족의 사는 방식에 공감하면서 그들과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그 와중에 지구인과 ‘나비(Na’vi)’족의 대규모 전투는 감행되고 ‘제이크’는 자신의 입장을 결정짓는 최후의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판도라와 지구의 피할 수 없는 전투, 결국 제이크는 ‘나비(Na’vi)’족의 전사가 되고, 전쟁 후 '제이크'는 아바타의 모습, 즉 판도라의 ‘나비(Na’vi)‘ 족으로서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 영화 속으로

 

◉ 주인공 ‘제이크’는 실제 현실에서는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를 가졌다. 하지만 아바타에서는 완벽한 체격 조건의 소유자로 탄생하게 된다. 영화 속 주인공이 장애를 가진 인물로 설정된 이유는 무엇일지 생각해보자.

 

 

⇒ 판도라의 나비(Na’vi)족은 인간보다 더 완벽한 외형을 가진 존재라고 할 수 있지요. 이들은 인간과 비슷한 지능에 3m가 넘는 신장을 지녔고, 인간들보다 4배 이상의 운동능력을 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 ‘제이크’는 현실세계에서는 제 힘으로는 서기조차 힘든 신체적 결함을 지닌 인물입니다. 이런 ‘제이크’에게 아바타는 자신의 결함을 뛰어넘을 수 있는 또 다른 자아로 작용하게 됩니다. 건강한 군인이었던 제이크에게 ‘몸에 대한 욕망’은 그 누구보다 강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이크’에게 맘껏 걸을 수 있고, 뛸 수 있는 아바타란 존재는 평소 열망했던 자아였을 것입니다. ‘제이크’가 처음 아바타로 변신했을 때 흥분해서 뛰어다니던 모습은 그에게 걷고, 뛴다는 것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말해주는 장면입니다. ‘제이크’가 아바타의 세계로 깊숙이 빠져들게 되는 애초의 계기는 그 세계가 그의 육체적 결함을 보완시켜 주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 시종일관 주인공과 대척점에 서 있는 ‘쿼리치 대령’은 아바타 프로그램에 적대적 의견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아바타라는 간접 세계를 혐오하는 인물로 직접적인 무력의 세계를 옹호하고 집행한다. 하지만 그 자신도 마지막 전투에서는 로봇에 올라타 싸우게 되는데 이때

‘퀴리치 대령’이 조정했던 로봇도 아바타라고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면, 혹은 아니라면 그 이유를 말해보자.

 

 

미래에 군인들을 대신해 임무를 수행할 군사 로봇

보스톤 다이나믹스 社의 견마형 로봇

 

⇒ 쿼리치 대령은 아바타 프로그램을 혐오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나비(Na’vi)족과의 친화적이면서도 지지부진한 협상을 부질없이 생각하는 무력적이고 남성적인 세력을 대표하는 캐릭터입니다. 그런 그가 결국 ‘제이크’와 싸울 때는 전투로봇을 선택해 조종하게 되는 데 전투로봇은 그의 무력을 극대화 시키는 대상입니다. 이 경우 그는 다른 유형의 아바타를 선택한 것일까요? 아니면 직접 전투 대상과 대면하고, 조종하고, 싸운다는 점에서 그가 사용한 전투로봇은 아바타와는 다른 의미일까요? 정답을 도출하기는 어렵지만 아바타와 로봇의 경계, 차이점 등을 토론해 보는 것도 좋은 듯싶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 군사용 로봇에 관한 내용을 덧붙입니다, 현재 군사용 로봇 개발에서 앞서가는 나라는 단연 미국입니다. 이미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시험 가동한 ‘팩봇(PackBot)’은 연속·원거리 사격이 가능한 산탄총을 장착했고, 카메라를 통해 영상을 실시간으로 보냅니다. 그 외에도 폭발물 제거용 로봇 ‘탤런(Talon)’, 지뢰 제거 로봇 ‘팬더(Panther)’, 최신 무인항공기 ‘프레데터(Predator)’ 등도 미군이 자랑하는 전투로봇입니다. 국내에서도 국내 업체가 개발한 경계·살상 로봇 ‘이지스(AEGIS)’를 이라크 자이툰 부대에 배치, 지뢰 탐지·제거와 정찰용 군사로봇을 시작으로 전투 화력지원 군사로봇을 잇달아 개발할 것으로 발표했습니다. 전투로봇은 군인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 전투에 대한 사람들의 도덕심을 무디게 한다는 부정적 요인도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의 토론도 병행해보면 어떨까요?

 

<써로 게이트>

(Surrogates, 조나단 모스토우, 2009년, 88분, 미국, 15세 관람가)

 

2017년. 한 과학자가 인간의 존엄성과 기계의 무한한 능력을 결합하여 발명한 로봇, 써로게이트(Surrogates)가 등장한다. ‘써로게이트’는 ‘대리인’ 혹은 ‘대행자’란 뜻의 인간 대행 로봇으로, 인간과 로봇이 뇌파로 연결돼 로봇이 인간의 역할을 대신한다. 이제 인간들은 써로게이트와 연결되는 안경만 쓰면 다양한 써로게이트로 활동할 수 있다. 써로게이트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자신의 역할을 대행하는 동안 인간들은 집 안에서 안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미래사회의 98% 이상의 인간들이 자신만의 다양한 써로게이트들을 사용하게 되고 덕분에 세상은 범죄와 폭력과 공포가 없는 이상적인 사회를 유지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골목에서 사랑을 나누던 남, 녀 써로게이트가 공격을 당해 살해되고 써로게이트와 연결된 실제 인간들이 죽게 되는 살인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FBI 요원 그리어는 15년 만에 발생한 살인사건을 수사하게 된다. 그리어는 자신도 써로게이트를 사용하는 인물로, 그는 죽은 아들을 잊지 못해 고통에 빠져 있는 인물이다.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다. 둘은 한집에 살지만 각자의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으며 함께 식사하지도, 대화하지도 않으면서 써로게이트로만 접촉하는 단절적인 삶을 산다.

살인 사건의 수사를 진행하던 중 그리어는 피해자 중 한 명이 써로게이트를 발명한 과학자캔트 박사의 대학생 아들 ‘재로드’이고, 이 사건에 써로게이트 파괴에 앞장서는 비밀조직 ‘드레즈’가 연류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수사가 종반으로 접어들면서 그리어는 충격적 사실과 직면하는데, 그것은 써로게이트의 파괴를 주장하는 세력의 배후가 바로 써로게이트의 창시자 캔터 박사이기 때문이었다. 애초 장애인들에게 온전한 신체를 제공한다는 선의로 창조했던 써로게이트가 인간의 한갓진 욕망을 실행에 옮기는 대리로봇으로 변질되자, 캔터 박사는 세상의 모든 써로게이트와 더불어 그 써로게이트에 접속된 사람들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리어는 캔트 박사의 계획을 막으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그 자신 또한 인간만 살리고 써로게이트들은 파괴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 영화 속으로

 

◉ 주인공 그리어는 50대 중반의 중년이지만 30대의 젊고 건강한 써로게이트를 가진 형사이다. 하지만 자신의 써로게이트가 총격에 의해 망가지고 난 후, 그리어는 30대의 완벽한 써로게이트 모습이 아닌 늙은 50대의, ‘현실의 모습’을 하고 사건을 수사하고 다닌다. 그가 써로게이트의 모습을 버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 그리어는 정신적, 육체적 상처를 가진 인물입니다. 하지만 써로게이트의 그리어는 30대의 건장한 육체를 가진 인물이죠. 살인 사건을 수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리어는 자신의 써로게이트가 파괴되고 맙니다. 언제 어디서나 구입할 수 있는 써로게이트지만 그는 나이 든 육체로 돌아다닙니다. 그를 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그에게 낯설고 불편해합니다. 왜냐하면 미래사회의 그 누구도 나이든 육체를 보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죠. 아름답지 않은 몸을 보이는 것은 차별을 당하는 것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가리는 써로게이트를 통해 실존하는 자신을 가리는 일종의 가면(persona)을 쓰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미래사회의 생존전략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이 원하는 모습(영화에서 살해된 뚱뚱한 남자가 날씬하고 섹시한 여성의 써로게이트의 모습을 하고 있지요), 혹은 상대가 원하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언제나 변신가능합니다. 자신의 약점을 가리는 써로게이트를 할 수 있는데 굳이 실제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겠지요. 육체적 약점은 지금이나 미래에나 사회적 차별 요소인 모양입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어디를 가든 날씬하고 건장한 모습을 한 젊은 써로게이트 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미래에 서로게이트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상대의 써로게이트를 믿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이 아닌데 상대가 진실을 보인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눈이 있되 진실을 볼 눈을 가지지는 못한 것이지요. 영화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늙은 육체를 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그리어는 그래서,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진실을 꿰뚫을 수 있는 시각을 가진 인물로 그려집니다.

 

* 영화 대 영화

 

영화 <아바타>와 <써로게이트>는 모두 가상공간이 배경이 되는 영화이다. 물론 엄밀하게 따지만 <아바타>의 가상공간은 존재하는 공간이며 <써로게이트>의 공간도 존재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들이 공간에 접근하는 방식은 다르다. <아바타>는 화신, 분신이란 본래의 원래 뜻처럼 아바타로 변신한 사람의 속성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영화 <아바타> 속의 인물들은 아바타로 변해서도 평소 인간이었을 때의 모습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또 그 행동은 아바타의 모습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영화에서 주인공 제이크와 네이티리는 인간과 나비(Na’vi)족이라는 서로 다른 존재조건을 가졌으면서도 ‘I see you(나는 당신을 본다)’ 말을 자주 한다.

이는 그들이 다른 대상이면서도 마치 거울을 보는 듯 서로를 ‘보고 있다’는 의미로, 그들은 자신의 본연의 감정과 모습을 토대로 조우하고 접촉한다. 뿐만 아니라 아바타를 쉽게 바꿔치기할 수도 없다. 아바타의 모습은 자신의 DNA를 토대로 해서 성장시킨 ‘나’이기 때문이다. 아바타는 여러 개의 모습이 아닌 ‘나’를 완벽히 재현한 모습으로 나의 영혼과 생각이 내포된 대상이다. 영화 속에서의 ‘나’와 ‘아바타’는 따로 떼어내 생각할 수 없는 ‘또 다른 나’이며 ‘아바타’의 세상은 실제 존재하는 세상이다. 내가 아프면 아바타도 아프고, 내가 죽으면 아바타도 죽게 된다. 가상과 현실이 다르지 않은 것이다.

 

반면 <써로게이트(Surrogates)>는 그야말로 대리인이다. 써로게이트는 진짜 내가 아니다. 단지 나를 일시적으로 대신하는 꼭두각시와 같은 존재일 뿐이다. 링크 시스템 뒤에서 그 허수아비를 조종하는 ‘나’가 바로 진정한 나 자신이다. 이렇게 대상에 부여하는 이름과 의미가 다르면 그 대상이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서도 다른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써로게이트>가 묘사하는 세계는 가짜들이 판을 치는 가짜 세상이다. 써로게이트는 아바타처럼 서로 교감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바꿔치기할 수 있고 망가지면 고칠 수 있으며,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을 성형할 수 있는 일종의 다회용 로봇에 불과하다. 나를 대신하는 써로게이트는 언제나 구입 가능하므로 목적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지닌다. 장소에 따라 환경에 따라 용도에 따라 쓰이고 폐기되는 소모품이므로 어떤 모습의 써로게이트와 접촉했냐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오늘 이 시간에 만난 써로게이트는 순간의 대상일 뿐, 다음에 만날 때 ‘그 사람’이 반드시 ‘그 써로게이트’의 모습을 한다고는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인간의 육체를 대신하는 써로게이트의 육체는 중요하지도 않고 중요해서도 안 된다. 소모품에는 의미 부여가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래사회에서 ‘몸’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지, 혹은 인간의 ‘몸’과 ‘정신’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에 대한 다양한 범주의 문제에 직면하게 한다.

 

이처럼 두 영화는 비슷한 소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사이버 세계, 혹은 가상 세계, 가상현실의 문제가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다양한 접촉을 하고 산다. 미래의 우리는 어떨까? 미래의 우리는 만나지 않고 접속하는 시대에 살게 될까? <써로게이트>의 주인공 ‘그리어’와 그의 아내도 한 공간에 살지만 그들은 문을 닫아걸고, 실제의 나이 들고 상처에 찌든 얼굴을 보여주고자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함께 살면서도 만나지 않는다. 아들을 잃은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볼 용기를 내지 못하므로 써로게이트를 통해서만 접속하는 은둔자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주인공 그리어는 써로게이트의 컴퓨터 시스템을 망가뜨린다. 모든 써로게이트들의 시스템이 멈춘다. 마네킹처럼 완벽한 모습을 한 써로게이트들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모두 쓰러진다. 그 장면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답답함은 써로게이트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망연한 모습으로 거리로 나오는 장면이다. 방안에만 있었던 그들에게 햇빛은 낯설고도 적응하기 어려운 현실일 것이다. 이제 그들은 다시 써로게이트를 복구하거나, 자신의 실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그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현실세계에서 육체적 한계가 가져오는 벽을 뛰어넘고 싶다는 욕망은 오랜 역사를 지닌다. 인간은 사회에서 하나의 육체로 여러 개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는 있지만 여태까지의 인간은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가상의 세계는 그 한계의 극복을 가능하게 했다. 아바타와 써로게이트는 모두 현실세계의 인간의 육체를 뛰어넘고 싶다는 욕망의 변주에 기인한다. 문제는 현실 세계를 대체할 수 있는 인간의 다양한 욕망, 실존하는 현실의 ‘나’가 아닌 아바타로서의 ‘나’, ‘써로게이트’로서의 ‘나’를 완강히 거부할 수 있는 과연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하는 것이다. 나를 짓누르던 위계구조와 성, 연령, 지위에 따른 불평등 요소들과 제약들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러한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을 만들 수 있다면? 이러한 현실이 도래한다면 사람들이 가질 욕망의 끝을 가늠해 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결국 인간에게 주어진 문제는 접속이 아닌 접촉의 문제, 만남의 문제가 남게 된다.

 

‘아바타 신드롬’과 함께 ‘아바타 우울증’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고 한다. 미국 CNN 인터넷 판은 관객들이 영화 <아바타>를 본 사람들이 영화 속 외계 행성 판도라에 강하게 매혹돼 우울증과 자살충동을 호소하고 있다고 전한다. 아바타라는 가상세계가 지구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여줬고, 그 현실과의 괴리감이 사람들을 우울해 한다는 것이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결국 문제는 소통과 접촉의 문제이다. 현실의 소통에 장애를 느끼는 사람은 실재하는 현실을 우울해 하고 가상의 현실을 동경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두 영화의 직접적 물음은 가상공간에서의 인간의 정체성, 그리고 그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접촉과 소통’에 관한 것이다. 영화들은 ‘써로게이트가 진정 나를 대신할 수 있는가?’ 또는 <아바타>는 아바타와 실제의 '나'와 차이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결국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 목표는 사람들 간의 소통의 문제이다. 진정한 소통은 <아바타>의 ‘제이크’와 ‘네이티리’가 했던 것처럼 ‘I see you(나는 당신을 본다)’ 가 선행되어야 한다. 소통은 함께 만나고, 만지고, 보아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우리는 과연 얼마나 깊은 소통의 세계에 살고 있는지 두 영화를 통해 생각해 볼 일이다.

 

* 좀 더 생각해 봅시다

 

1. 미래의 세계에 인간을 대신하는 ‘아바타’나 ‘써로게이트’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우리들의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생각해보자.

 

2. 가상의 ‘나’가 존재하는 시대에 우리가 경험하게 될 다양한 일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그때도 차별이 존재한다면 어떤 차별이 존재할지 생각해보자.

 

3. 써로게이트나 아바타가 인간의 생활을 대신한다면 인간이 인간임을 확인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확인할까?

 

4. 인간이 보고 듣고 맛보는 모든 것을 컴퓨터나 뇌가 보낸 신호의 전달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굳이 움직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모든 생명유지 장치에 인간이 들어있고 모든 자극을 컴퓨터가 대신 받는다면 몸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 영화로 논술하기

 

◉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선거 유세 기간에 ‘세컨드 라이프(인터넷 기반의 가상 세계 프로그램. 사용자는 아바타를 통해 세컨드 라이프에 접속해 다른 사용자와 상호작용 할 수 있다)’에서 연설을 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세계적인 경제 전문지 <포춘>지에 등장한 백만장자의 표지모델은 ‘세컨드 라이프’의 아바타였다. 그 아바타가 ‘세컨드 라이프’에서 상담을 하고 번 돈이 1백만 달러가 넘었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이 같은 사례는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유사한 사례를 찾아서 함께 토론해보자,

 

◉ 다음 글을 읽고 생각해 보자. 위 두 영화와 아래 글 장자의 글 「재물론」을 통해 영화의 두 세계가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 보자. 두 세계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옛날 장주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는데 훨훨 나는 나비였다. 유쾌하게 느껴졌지만 자신이 장주라는 것을 알지는 못하였다. 갑자기 깨어나서 보니 확실히 장주였다. 장주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속에서 장주가 된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을 것이니, 이것을 물화(物化)라고 한다.

- 장자, 재물론(齎物論)편

 

◉ 아래 글 ‘전자 연인의 사례’ 를 통해 다음 물음에 답해 보자.

 

1995년 미국의 미디어학자 터클(Turkle)이 발표한 논문에 ‘전자 연인의 사례’라고 불린 내용이 실려 있다. 신체적으로 불구이며 얼굴도 못생긴 정신과 의사 알렉스(Alex)는 평소 ‘조안’이라는 여자 정신과 의사로 위장해 인터넷 채팅사이트에 접속한다. 사이버 공간에서 알렉스는 철저히 ‘조안’이 되어 여성들과 교제하며 다양한 연애와 정신과 상담을 벌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알렉스는 조안으로서의 삶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된다.

그러나 온라인 상의 많은 조안의 친구들이 조안을 실제로 만나보고 싶어 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런 만남을 원하는 바람이 켜지면서 알렉스도 더 이상 그 만남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고심하던 알렉스는 조안을 그만 ‘죽여야겠다’고 결심한다.

알렉스는 조안의 남편이라는 또다른 가상의 인물이 돼 조안이 병원에 입원해 있음을 알린다. 하지만 조안을 따르는 사람들은 병원이 어디냐, 문병을 가겠다, 재정적인 도움을 주겠다, 좋은 의사를 소개시켜주겠다며 걱정을 하고 나선다.

결국 사람들의 압력에 밀린 알렉스는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의 이름을 밝히게 되는데, 병원 기록을 통해 결국 사람들은 조안이라는 존재가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알렉스가 자신들을 기만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고 분노를 터뜨리게 된다.

 

생각 열기

 

1. 알렉스의 행위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말해보자.

 

2. 물리적 육체와 가상의 육체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3.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현실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과연 그 본연의 모습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고, 아니라면 알렉스의 행위와 비교해 알렉스를 옹호해보자.

 

 

* 참고서적

『정보 사회의 이해』 (권태환, 조형제, 한상진 / 미래 M&B)

독讀 언어영역 (김기훈 외 / 문학동네)

 

* 함께 보세요

<매트릭스> 시리즈 (The Matrix, 앤디 워쇼스키, 136분, 미국, 12세 관람가)

<마이너리티 리포트> (Minority Report, 스티븐 스필버그, 2002년, 145분, 미국, 15세 관람가)

<김씨 표류기> (Castaway On The Moon, 이해준, 2009년, 116분, 한국, 12세 관람가)

<게이머> (Gmer, 마크 네빌딘, 2009년, 94분, 미국, 18세 관람가)

『철학의 진리나무』 (안광복 / 궁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