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미학
- 김선우, 『캔들 플라워』

안효근 | 한성여고 교사 hooan@hanmail.net

역사적으로 초는 여러 사회에서 종교 의식에 많이 이용되었다. 대부분의 종교 의식이 실내나 동굴 등 어두운 곳에서 많이 행해졌고 야간 행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초는 때에 따라 의식상 필요 이상의 종교적 의미가 있을 때도 있었다. 즉 초의 불꽃이나 빛을 신의 상징으로 삼기도 했고, 세상과 사람의 영혼을 밝게 비추는 신비한 힘을 가졌다고 여기기도 하였다. 
구약성서 출애굽기 가운데 제단 차리는 방법에서 촛대 만드는 방법을 상술한 이유는 유대교 의식에서 초가 지니는 중요성 때문이다. 가톨릭에서는 ‘주의 봉헌 축일’에 초의 축성 행사가 있다. 예수 성탄 대축일을 지난 후 40일째 되는 날인 2월 2일은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처음으로 성전에 봉헌한 날이다. 그래서 주의 봉헌 축일이라고 한다. 이 축일에는 지금도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초를 축성하고 촛불을 켜 든 신자들이 행진하여 성당에 입장하는 풍습이 남아 있다. 스웨덴에서는 12월 13일 성 루치아제 때 젊은 여성이 초로 만든 관을 쓰고 ‘굶주린 자에게 빵을, 어둠에 초를.’이라고 외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초에 대한 종교적 이용은 태양·불·빛 등에 대한 신앙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초에 대해 명확하게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 예로는 멕시코 마야족의 경우가 있다. 그들은 초가 신에게 있어 인간의 빵과 같다고 여겨 신에게 기도할 때는 반드시 초를 사용했다고 한다. 즉 초를 사람과 신, 이승과 저승의 매개체로 생각하였는데, 초가 연기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가 사람들의 기원을 신에게 전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늘날 초는 전기에게 자리를 내주고 특별한 경우에만 점화하게 되어 있다. 생일 케이크에 켠 촛불은 누군가의 탄생을 축복하는 불빛이 되고, 제사상에 켜진 초 두 자루는 조상의 음덕과 후손들의 정성을 연결해 주며, 상갓집에 켜 놓은 촛불은 유명을 달리한 이의 명복을 기원하는 산 사람들의 메시지로서 작용한다. 나아가 촛불의 따스함이 그리운 현대인들을 위해 양초 공예라는 것도 생겨났고, 심신이 피로한 이들을 치유한다는 아로마 향초도 인기리에 판매 중이다. 
그런데 우리 현대사에는 독특한 의미를 가진 촛불이 하나 등장했다. 2008년인가,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 기술 덕에 오밤중도 대낮처럼 만들 수 있다는 대명천지에, 느닷없이 도심 한복판에 수십만 개의 촛불이 밝혀진 것이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었었는지 기억조차 아스라해진 지금, 그때의 촛불 중 하나가 소설이 되어 돌아왔다. 시인 김선우가 장편소설 『캔들 플라워』를 발표한 것이다.

* 『캔들 플라워』의 줄거리
『캔들 플라워』는 캐나다의 ‘레인보우’라는 오지 마을에서 살던 열다섯 살 소녀 지오가 인천 공항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지오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 대신, 프랑스 68운동 세대로서 파리에서 윤이상 구명운동을 하다 할아버지를 만나 지오 엄마를 낳았다는 멋쟁이 할머니 ‘마리’와, 동성 애인 ‘조안’을 둔 어머니 ‘하린’으로부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생태 교육을 받은 탁월한 언어 능력의 소유자인데다 동물과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신비한 능력도 지녔다. 이런 지오가 열다섯 살의 생일을 기념해 홀로 한국으로 여행을 온다. 원래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가 있는 일본행을 꿈꾸었으나, 일 년에 한 번 레인보우 마을에 오는 스페인 사진작가 ‘마노 아저씨’가 찍은 사진이 계기가 되어 여행지를 바꾸게 된다. 아저씨의 사진 중에는 새하얀 털을 가진 쌍둥이 하프물범의 모습을 담은 것이 있었는데, 이 사진을 본 뒤부터 시작된 꿈속에서 자신과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는 남자 아이를 보게 된다. 처음에는 몽정쯤으로 착각했던 지오는 급기야 엄마의 사진 작업실에 보관된 사진 속에서 자신과 함께 놀고 있는 그 아이를 발견하고 나서는, 엄마가 한국 남자를 만나 낳은 쌍둥이 중 잃어버린 쌍둥이 한 쪽이라고 확신하게 되고, 결국엔 그를 찾기 위해 한국 땅을 밟게 된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 지오는 일곱 살 때 생긴 이상한 정전사고로 인해 기억이 사라진 일이며, 애완동물이었던 고슴도치 밍쯔의 죽음, 그리고 첫 생리를 시작하던 날 등을 회상한다. 
한국에 도착한 지오를 반겨준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카우치 서퍼 희영과 그녀의 친구들이다. 희영은, IMF로 파산한 부모가 4년 전 도피 이민을 떠난 뒤 한국에 홀로 남아 초등생 특목고 대비 문제 출제회사에서 일하는 계약직 직원이면서 월급을 모아 언젠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떠난다는 꿈을 키우는 스물아홉 살 먹은 아가씨이다. 아버지가 한참 잘 나갈 때 정기 구독시켜 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코끼리, 코알라, 돌고래, 코뿔소, 나무늘보, 기린, 펭귄의 사진만 모아 간직하고 늘 그 첫 글자인 ‘코·코·돌·코·나·기·펭’을 주문처럼 읊조리며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녀 같은 면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대학 시절 사모했던 프랑스 문학 강사에게 처녀성을 잃고, 사랑했던 연인 ‘동수’와도 불행한 이별을 한 아픈 기억도 가지고 있다. 더불어 청소년문화센터에서 아이들에게 영화를 가르치며 카메라를 들고 시위 현장을 누비는 인터넷 방송 리포터 연우,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가정이 풍비박산 되고 나서 미국에 사는 친할머니에게 보내졌다가 친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물려준 이층집의 일층을 개조해 샌드위치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수아 등 여러 친구들을 만난다. 지오는 이들과 함께 광화문과 시청 앞, 청계천 광장, 서울역 등지에서 열리는 촛불집회에 참석해 촛불을 든다. 광장에서는 전교 일 이등을 다툰다는 모범생 민기, 성격이 활달하고 붙임성이 좋은 줄로만 알았는데 초등학교 동창의 자살로 인해 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부터도 나와 독립생활을 하고 있는 태연이, 그리고 꿈 많고 쾌활한 지민이, 술래 등과 합류한다.
캐나다의 오지에 살던 지오의 눈에 비친 촛불집회의 풍경은 처음엔 신기하기만 했다. 교복 입은 학생들이 나와 촛불을 들고, 먹을 것을 장만해 와 촛불을 든 누구에게라도 나눠주는 어른들이 있는 동시에, 국민들에게 물대포를 쏘아대고 폭력적으로 연행하는 전경이 있으며, 수많은 국민의 목소리에 침묵하는 정부가 있는 그 풍경은 때로 낯설기도 했다. 
당시 대한민국 사람 모두가 그랬듯, 지오의 눈에도 촛불 집회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직접 보고 들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감격과 분노가 공존하는 그런 경험이었던 것이다. 광장에 모인 모두가 서로의 눈빛만으로 행복한 교감을 나누던 그 순간은 물론 언제나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충돌이 일어나 사방에서 연행되는 시민들과 경찰이 한데 얽혀 진흙 속에서 철벅거리는 것처럼 아수라장이 되고, 넘어지고 끌리고 짓밟히는 사람들의 신발이나 안경이 굴러다녔다. 머리 위로 올린 연우의 카메라가 공중에서 빠르게 터졌다. 뒤쪽에서 소화기가 난사되기 시작하고, 경찰 방패에 밀려 고립된 시민들은 바로 연행되었다. “고립되면 안 됩니다. 혼자 떨어지지 마세요!”하고 군중 속에서 다급한 외마디 말들이 터져 나왔다. 처음엔 공중으로 조준되던 소화기 분말이 이제 시민들의 얼굴을 향해 정면으로 발사되고 있었다. 한바탕 소화기 분말이 지나가고 방패 소리, 군화 소리, 산발적으로 터지는 외마디 비명 소리 뒤쪽에서 몇몇 대열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 김선우, 『캔들플라워』, 예담, 2010, 196쪽

지오는 희영이 사는 아현동 달동네 집에서 기거하며 오후가 되면 촛불집회장으로 가는데 난데없이 자신들을 빨갱이라 욕하는 노인들과 대면하게 된다. 지오는 “이 빨갱이들”이라고 내뱉으며 노발대발하고 있는 중절모를 쓴 노인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본다. 지오는 빨갱이의 의미에 대해 주위 아이들에게 묻지만, 아이들은 대답 대신 “저번에 어떤 아저씨도 나한테 빨갱이라 그러던걸.”이라고 말한다. 지민은 “도서관 갔다 오느라 좀 늦었거든. 근데 어떤 아저씨가 시청역 입구에서 갑자기 날 부르는 거야.”라며, “너도 촛불집회에 가느냐”며 “빨갱이들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촛불집회에 참석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빨갱이라는 투로 말이다. 그러나 광장에 나온 이들은 그동안의 사회적 고통을 다른 이들과 함께 공감하며 생명의 공간을 만들어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기르던 소와 함께 광화문 한복판에 나왔던 할머니 한 분이 혼절을 하는데, 이를 목격한 지오를 비롯한 아이들이 경찰에 연락하지 않고 병원으로 먼저 옮긴 일로 인해 수사 대상이 된다. 혹시라도 집회를 확대하기 위한 의도로 일부러 연출된 것이 아닐까 의심받게 된 것이다. 위급한 환자를 가까운 병원으로 옮기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은 상식이 의심받는 것에 대해 의아해 한다.  할머니는 마지막 남은 온몸의 힘을 짜내어 한마디 말을 하고 싶어 했다. 

‘미친 소 싫어’. ‘미친 소 너나 먹어’ 그런 말들이 거리에 흘러넘칠 때, ‘함부로 미친 소라고 말하지 말아 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쓰러진 노파는 온몸의 진액을 짜내 그 한 문장을 말하기 위해 아주 먼 길을 걸어온 고행자 같았다.
 - 같은 책, P303 

 지오는 '미친 소 싫어'라고 외치고 있는 촛불집회 속에서 할머니가 한 말을 새긴다. 그리고 시민들이 촛불로 장식한 아스팔트 바닥에 빨강, 노랑, 파랑, 흰색 분필로 그린 낙서 그림 속에서 ‘미친 소 미친 소하며 빨간 딱지 달지 마세요. 사람의 탐욕 때문에 병 걸린 소가 무슨 죄람.’이라고 쓰인 글씨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결국 희영이 주워 온 ‘사과’라는 강아지를 통해 곧 철거될 동네가 그 할머니가 살던 마을이었다는 사실과, 유기견 ‘사과’ 역시 그 할머니의 친구였으며, 할머니의 이름이 김숙자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김숙자 할머니가 유명을 달리하던 날, 그녀는 지오에게 ‘박각시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긴다.  
그런데 신문 지상에는 ‘이지훈’이라는 기자의 이름으로 “김숙자는 북한의 지령에 따라 오랜 세월 암약하다 시위를 더욱 부추기기 위해 도심으로 잠입한 간첩”이라는 기사가 뜬다. 지오는 기사의 내용이 머리를 떠나지 않으면서 심한 어지러움을 느낀다. 촛불을 든 시민과 빨갱이라는 용어, 그리고 아현동 고갯길에 붙은 플래카드에 씌어진 ‘철거 고시'라는 어휘들이 모두 혼란스럽게 스쳐 지나간다. 그 즈음 시위 현장에서 한참 떨어진 후미진 곳에서 연우가 구타를 당해 중상을 입은 채 혼절한 모습으로 발견된다. 긴급히 병원으로 옮겨 응급 처치를 마치지만 연우는 마치 죽은 듯이 며칠 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알고 보니 특종에 대한 욕심에 눈이 먼 이지훈은 지오가 사랑을 느낀 민기의 아버지였다. 울분을 참지 못한 민기가 화강암 블록을 주먹으로 내리쳐 자해를 하지만 지오의 사랑 고백에 울음을 터뜨리며 멈추게 된다. 한편 희영은 광장에서 헤어진 옛 애인 동수와 재회한다. 끔찍이 싫어하던 모텔에서 동수와 사랑을 나누며 광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자신들처럼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연우는, 무의식 중에 그녀의 꿈속에 나타난 누렁소 할머니 김숙자씨로 인해 오랜 잠에서 깨어난다. 김숙자씨를 간첩으로 몰고 간 결정적인 증거인 찢어낸 노트는 지오가 그녀에게 전한 격려의 메시지였을 뿐인데, 이를 간첩의 증거로 왜곡시킨 사람들이 끔찍하게 싫었다. 연우는 이지훈을 만나 이 같은 사실을 전하고 그가 순수했던 초년 기자 시절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당부한다. 한편 변해버린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던 민기는 힘겹게 자신을 지오에게 기대는데 지오 역시 예사롭지 않은 감정이 이성 간의 사랑이라 생각하고 민기에게 입맞춤을 한다. 그 순간 지오는 이성이 아니라 육친에게서나 느낄 법한 묘한 감정을 느낀다. 더구나 김숙자씨의 이웃이자 고물 줍는 시인 홍씨 할아버지는 마치 예언처럼 둘이 남매냐고 묻는다. 한편 연우에게 물먹은 이지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홍씨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묻는데, 또 한 번 창피만 당하고 물러나온다.
이후 연우와 친구들은 철거 직전인 김숙자씨 집에서 그녀를 기념하기 위한 사진 전시회를 연다. 홍씨 할아버지의 고물상에서 가져온 수많은 촛불을 켠 채 누렁소 할머니를 기린다. 
지오는 자신의 목표를 모두 이루고 레인보우로 돌아간다. 비록 씁쓸한 결말이었지만 지오는 한층 성장했고, 한국에 남아있는 친구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이 땅에 또 한 번의 불꽃이 피어나도록 노력 중이다.  
 
* 촛불의 미학
『캔들 플라워』가 그리는 시절은 그리 먼 과거가 아니다.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2008년 광우병이 의심되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맞서 남녀노소를 불문한 수많은 국민들이 전국 곳곳에서 펼쳤던 촛불 집회를 실감나게 그려내면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기에, 소설의 장면 하나하나의 느낌은 생생하다. 당시 집회 현장을 생중계하던 인터넷 방송의 장면들을 ‘다시 보기’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소설은 익숙한 장면들을 눈앞에서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모두 18장으로 나뉘어져 있는 이 소설은 지난 2008년 봄과 여름에 걸쳐 광화문, 청계천, 시청 앞, 서울역 앞을 환하게 밝혔던 촛불집회를 다룬 첫 장편소설이기도 하다. 
작가는 작품의 창작 동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촛불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2009년 초봄이었습니다. 온몸이 자욱한 안개 속인 것처럼 슬픔이 몰려와 힘든 봄날이었습니다. 1월에 용산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났지요. 좌건 우건 보수건 진보건 그 모든 정치적 성향을 떠나 ‘생명과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실종된 사건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그런 식으로 죽어가서는 안 되는 거지요. 하나의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예의에 대해 용산은 울면서 물었습니다. 
그 시점에 저는 ‘촛불의 소설’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상실한 권력에 대해 공포와 분노와 연민을 느끼면서, 2008년 촛불로부터 왜 우리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는지를 가슴 아프게 되물으면서 말입니다.
 - 같은 책, 작가의 말, P381

소통의 부재라는 현재진행형의 문제점에 대한 소설적 대안이라는 이야기다. 등장인물들의 시각으로 바꿔 이야기하면, 『캔들 플라워』는 주인공 ‘지오’와 ‘지오’가 만난 여러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해 함께 촛불을 들면서 보고 듣고 느낀 일종의 자기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주인공 ‘지오’를 통해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모순을, 종이에 물기가 배어나오듯 은근히 내어 비치고 있다. 이는 다분히 미래의 희망을 발견하고픈 작가의 소망이 내재된 때문일 게다.
 
저는 이 소설이 과거의 얘기가 아니라 미래의 얘기이길 바랍니다. 이 땅에 놀러온 ‘자연의 아이' 지오. 이 땅의 사랑스러운 젊은이들, 소녀들, 소년들, 희영, 연우, 수아, 민기, 태연, 지민, 술래…… 미래 세대 아이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할머니 숙자씨도 실은 미래의 소녀입니다. 숙자씨의 애인인 홍씨 할아버지도 미래의 소년입니다. 다른 땅에 살고 있는 마리, 하린, 조안은 우리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 같은 책, 작가의 말, P382

구성 자체도 대단히 인상적이다. 아마도 이 작품의 의도가 단순한 '재생'이 아닌  역동적인 에너지를 지닌 소녀들과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적 이슈를 기존의 시각과 다르게 바라보고 해석하려는데 있기 때문일 것이다. 촛불을 들고 있는 소녀들의 이야기는, ‘우리는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라든가, ‘지금은 그 시절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와 같은 질문을 통해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돌아보게 만들고 있다.

이 소설의 주요 무대는 2008년 촛불의 밤들입니다. 같은 불이되, 소돔과 고모라에 쏟아진 화염비가 도시를 소탕한 폐허의 불이었다면, 자그마한 불꽃을 피워 서로의 심장을 밝히고 먹을 것을 나누고 따뜻한 차 한 잔의 온기를 유지하던 촛불은 생명의 감도를 아는 불꽃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수직의 불벼락이 아닌 수평의 번짐을 가진 불의 꽃, 한 촛불이 다른 촛불에게 가만히 기대어 자신의 몸의 온기를 나누어주면서 번져간 불꽃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이 소설을 썼습니다.
 - 같은 책, 작가의 말, 380쪽

촛불에 대한 이 같은 작가의 해석도 대체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이어서 작품을 대하는 기성작가의 평가 또한 대단히 우호적이다. 장정일은 “대개의 우리나라 작가는 현실이나 징후를 신속히 반영하지 못하는 문화적 지체를 고질병으로 앓고 있다.”며 “작가는 마치 기동타격대인양 빠르게 현실에 접근해서, 현실과 반영(작품) 사이에 벌어져 있는 한국문학의 지체 현상을 가차 없이 메우고 있다.”고 일갈하고, “언젠가 촛불집회를 소재로 삼은 문학을 정리한다면 『캔들 플라워』는 일착으로 검토되어야 할 소설"이라고 평했다.
당시 집회의 도화선이 되었던 촛불 소녀들의 집단행동은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소박한 이유에서 출발했다. 그들이 처한 교육 환경의 열악함에 대한 울분이, 먹을 것마저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위정자들에 대한 분노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학교는 전쟁터고 학원마다 문정성시다. 자정 무렵이면 연우의 집 근처 대로변에도 어김없이 학원 봉고차들이 멈춰서고 있다. 그 닭장차에서 아이들이 졸린 눈을 한 채 강시처럼 쿵쿵 뛰어내렸다.
 - 같은 책, 194쪽

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일상이 담긴 구절인데, 다시 읽으면서도 처절한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에 참으로 갑갑함을 느끼게 된다. 주인공 ‘지오’뿐 아니라 당시 청소년들 모두는 낮 동안의 현실이 너무도 암담했기에 깜깜한 밤을 환하게 비추어주는 연대의 촛불에서 미래의 희망을 발견했을 터이다.

낮 동안의 익명의 거리에선 낯선 사람이 다가오면 두려운 마음이 먼저 들었지만 촛불 집회 현장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은 두렵지 않았다. 그들은 따뜻하고 유쾌했다.
 - 같은 책, P162

2008년 늦은 봄, 필자 역시 광장에 나가 타오르는 촛불의 영롱한 불빛을 바라본 적이 있다. 비석 같은 고층 빌딩들이 우뚝 솟은 도심 한 복판에 생명의 불꽃이 타오르던 그 광경을, 나 역시 잊지 못한다. 당시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내 주변에 모인 동료들도 낯모르는 이들과의 뜨거운 연대감에 감격했다. 
개인적으로는 촛불 집회하면, 당시 거리에 차고 넘치던 팻말들이 떠오른다. 『캔들 플라워』에서도 언급되었듯 그 당시 광화문에는 독특하고 창의적이며, 때론 사회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재기발랄한 해학이 담긴 팻말들이 넘쳐났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미친 교육 싫다’고 외치던 교복 소녀들의 모습이 잔상처럼 기억에 남는다. ‘닭장차 투어'라든가 ‘무박 2일 여행' 같은 당시의 유행어를 곱씹어 보는 맛도 씁쓸하지만 흥미롭다.
하지만 나는 격무를 핑계로 광장에 자주 나가지는 못했고, 한동안 마음 속 부채로 인해 괴롭기도 했다. 그 당시 난, 학생들과 함께 민주주의와 자유를 외치다가도 직장에 돌아오면 아이들을 경쟁으로 이끄는 선봉장이 되어야 했다. 미친 교육 집어 치우라는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한데, 나는 기성세대의 욕망과 가치관을 충실히 주입하는 데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촛불의 빛은 집착과 욕망으로 자꾸만 잿빛을 띠는 내 마음을, 내 치부를 함께 밝히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마저도 이제는 아련하기만 하다. 책에 나온 대로 사람의 기억이란 게 ‘수수깡처럼 잘 부러지고 아교처럼 잘 들러붙기’도 하기 때문일 게다. 
아직도 일부에서는 다시 촛불이 재현되기를 바라면서 2008년의 늦은 봄을 그리워하기도 한다던데, 설령 그들의 바람대로 촛불이 어딘가에서 다시 타오른다 하더라도, 그 때처럼 100만 촛불이 온 나라를 비추는 일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불가능해 보인다. 최루액과 곤봉, 물대포와 컨테이너 장애물의 효과를 톡톡히 경험한 공권력은 그 걸로는 부족했는지 이제 사람들이 모이는 것 자체를 원천봉쇄하는데 맛을 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촛불은 죽은 역사가 되진 않았다. 이 부분에 주목해 보면 시인의 언어로 재생되어 우리 앞에 당당히 나타난 『캔들 플라워』라는 불꽃의 가치는 배가 된다. 시인답게 이 작품에는 민주와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의 순수한 희망과 아픔이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 아름다운 빛깔을 뽐내며 기록되어 있다. 통시적인 조망 하에, 그 안에 작가의 현실비판적인 자의식을 녹여내 동시대를 반추한 소설이기에 독자 입장에서도 별 어려움 없이 술술 읽힌다. 촛불집회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폐에 대한 고찰은 직설적이지는 않더라도 효과적으로 탑재되어 있다. 
나이만으로도 빛나는 청춘인, 주요 등장인물들의 순수함도 이 같은 느낌을 충실히 뒷받침한다. 물론 ‘지오, 희영, 연우, 민기, 태연’은 작가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구의 존재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그들에게서 자신과 닮은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촛불의 화원이 펼쳐진 2008년 늦은 봄은 분명히 존재했던 시간이고, 촛불은 진실과 거짓·기만과 정의를 밝히는 등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사회성 안에서 접점을 찾으려 애쓰는 ‘희영’의 모습에서 어느 졸업한 제자의 모습을 보았고, 촛불의 시간을 카메라에 담다 모진 구타를 당한 ‘연우’의 절망에 공감했다. 보수 언론의 특종기자 ‘이지훈’의 아들이어서 겪었을 ‘민기’의 괴로움은 지금도 사방에서 진행형이라 더욱 가슴 아팠다. 
또한 우리의 주인공 ‘지오’, 그녀는 할머니-어머니-손녀로 이어지는 모성의 상징일 게다. 대지와 하늘을 쏙 빼닮은 이 소녀로 인해 가냘픈 청춘들은 놀라운 치유의 경험을 하게 된다. 무엇이든 마주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소통할 수 있는 ‘지오’의 그 특별함은, 한 뼘씩 성장하는 ‘희영, 연우, 민기, 태연’과 함께 공명하며, 생명력으로 빛나던 촛불의 시간에 발맞춰 더불어 성장했다. 
‘지오’는, 마치 애초부터 순백의 빛깔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작가가 섬세하게 골라내고 공들여 다듬어 만들어낸 단어와 문장 속에서도 유난히 빛이 나는 존재이다. 게다가 글의 아름다움을 극단까지 밀어붙여 만들어낸 ‘지오’의 이미지는, 마치 <원령공주>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처럼 순수하다 못해 투명하기까지 하다. 2008년 늦봄을 지나 2011년 12월이라는 시간에 살고 있는 현실 속 우리들에게, ‘지오’의 투명함은 그 때의 패배를 위로받고픈 작가의 마음의 산물이자,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미래 세대의 모습이기도 하다. 

철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딴 데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 철학의 최종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은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고 해서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젖먹이 아이부터 오늘내일 하는 노인네들까지 모두가 힘을 합해서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런 세상을 만드는 데 가장 큰 힘을 쓸 사람들은 자라는 아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윤구병, 「떡잎 때부터 잘 키우자」, 『조그마한 내 꿈 하나』, 보리, 1995, 13쪽

아직도 아쉬움 속에서 우리 주변을 떠돌고 있는 촛불의 시간을 정면으로 마주하길 두려워하는 우리에게는, 그 때의 열패감을 극복하게 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우리는 ‘지오’의 눈을 통해, 그건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될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촛불은 생명 대 자본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와 좌절이 남긴 상처를 방치한 채 살아왔다. 『캔들 플라워』가 잉태한 것은 우리가 촛불을 들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생명의 참된 의미이다. 안타깝게도 촛불의 원인이 된 소통 부재의 정권은 아직도 그 생명력을 다하지 않았으며, 시간은 그 고통의 강도에 비해서 너무나 느리게만 간다. 
불빛 하나씩이 모여 100만 개를 이루었던 촛불은 그 하나하나에 너무나 많은 사연과 애환과 바람이 담겨 있었다. 적어도 작가는 야자를 빼먹고, 야근을 거부한 채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온 ‘청춘’들의 입장에 서서 그때 이야기를 하기로 결심한 듯하다. 굳이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부풀려 정치적으로 재단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청춘의 열정을 촛불 행렬로 치환할 줄 아는, 한때 우리들이기도 했던 그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충분히 의미 깊다. 
확실히 『캔들 플라워』는 언젠가 일착으로 검토될 가능성이 큰 작품이다. 좌절되긴 했으나 촛불의 시간을 공유한 젊고 어린 그들이 언젠가는 새로운 문화를, 혹은 문학을 꽃피울 씨앗이 되었음을 은연중에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새로운 문학에 맘껏 자극받을, 나 같이 때 묻은 세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요컨대 『캔들 플라워』는 그때의 상처를 안고 사는 이 시대 청춘들에게 보내는 작가의 따뜻한 위로이자, 그들의 가슴에 남아있는 불씨가 언젠가는 아름답게 빛을 발할 것임을 미리 축하하는 축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존 레논의 <이메진>처럼.
 
세상에 소유라는 것이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러면 탐욕이나 배고픔이 사라지겠죠. 모든 사람이 인류애로 하나가 되겠죠.                        
- 같은 책, 344쪽

* 논술꺼리
※ 다음 제시문을 읽고 아래 지시에 따라 논술하라. (2000년 서울대 논술고사 응용)
(가) 제시문 (1), (2)가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쟁점과 서로 다른 주장이 무엇인지 서술하고
(나) 제시문 (3)에 밑줄 친 ‘비난과 비판’의 이유를 제시문 (1) 혹은 (2)의 논지에 근거하여 설명한 후
(다) 작가의 ‘낮꿈’이라는 용어가 갖는 의의와 그 한계에 대하여 논술하라.

(1) 부당한 권력은 그 부당함에 맞서기를 꺼리는 개인들의 소극적이고 이기적인 태도 때문에 유지된다. 부당한 권력에 복종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불가피한 이유들을 나열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자신의 나약함이나 기회주의적 성격을 변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떤 형태의 권력도 진정으로 확실한 윤리적 태도와 지성을 가진 개인을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외적 상황을 탓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개인의 사사로운 욕망과 안락함을 추구하려는 경향 때문에 개인의 지성적 판단력과 윤리적 책임의식이 약해지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끊임없는 자기성찰, 공공적 관심에의 시민적 참여만이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부당한 권력을 약화시키는 유일한 힘이다.
                              
(2)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자율적 활동이 보장되지 못한 억압적인 정치상황하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매우 적다. 그런 환경 속에서 개인은 스스로의 판단과 책임에 따라 행동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소신이라든지 창의성이라는 것은 오히려 불편함이나 손해를 가져올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적당히 관행에 따라 처신하는 행동이 몸에 배게 된다. 설사 자율적인 판단과 행동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 범위는 매우 좁은 개인적 일상사 또는 소시민적 활동에 국한되게 마련이다. 나약한 인간을 만드는 것은 개개인의 윤리의식의 부족함에 있다기보다 그들을 타율적인 존재로 만드는 비민주적 환경에 있는 것이다.
               
(3) 2008년 촛불이 잦아들자 너무도 빨리 촛불에 대해 비난과 비판이 쏟아졌지요. 보수진영에서는 서둘러 촛불에 마녀 낙인을 찍어 매장하고 싶어 하고 진보진영에서는 촛불의 감성적인 대목들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이론과 해석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나의 사건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자연스러운 후대의 몫이겠으나 한편에서는 증오에 가까운 낙인이, 한편에서는 계몽적 언사를 배면에 깐 지식인 담론이 너무도 발 빠르게 넘치더군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설은 촛불에 대한 이런 비난, 비판, 냉소 속에서 수태되었다고 말해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용산참사를 거치면서 이 소설은 발아를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의 작가로서 제가 느낀 2008년의 촛불 속엔 ‘새로운 생명의 감각’이라고 할, ‘생명에 대한 예의’를 고민하게 하는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들의 질문과 호혜적 연대의 열망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질문의 한 끝을 잡고 낮꿈을 꾸었나 봅니다. 저는 이 꿈이 날선 칼의 언어이기보다 유연하며 따뜻한 자궁의 언어이길 바랐습니다. 참된 자유는 외부를 향한 배타적 공격성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힘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김선우, 작가의 말 중에서, 『캔들 플라워』, 예담, 2010 

* 예시 답안

① 두 글이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쟁점으로 △부당한 권력과 개인의 이기적이고 소시민적인 태도의 상호연관성 △왜 부당한 권력과 소시민적(이기적) 개인주의가 공존하게 됐는가 △왜 부당한 권력이 유지되며 왜 그런 상황일수록 이기적이고 나약한 인간이 많은가 등이 있다. 
② 두 글의 서로 다른 주장으로 첫 글은 부당한 권력의 유지가 기회주의적이고 이기적인 개인의 책임 때문이라고 보는 반면 두 번째 글은 반대로 부당한 권력의 억압 아래서는 어쩔 수 없이 나약하고 타율적인 인간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③ 일단 보수진영의 비난은, 하나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다른 신념이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자신들이 가진 일정한 틀에 얽매어 넣으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비민주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며, 부당함에 대한 평가는 유보한 채 안정과 질서 추구만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사회적 관행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2) 반면 진보진영의 비판은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감성적이고 나약한 심성이 단순한 한풀이에 머무르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바로 이런 나약함 때문에 촛불의 본래 취지가 퇴색되고 결국 좌절을 불러왔다는 관점이다. (1) 
④ ‘낮꿈’은 사회적 이슈의 작품화가 갖는 반성, 성찰 및 의문의 과정이 행동화와는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일면 한계가 있을지라도, 부당한 상황을 인식하고 새로운 자각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조그만 부분에서의 각성이 보다 넓혀지면 정정당당한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한낱 ‘꿈’을 꾸는 소극적인 인식만으로는 자신의 나약함과 감상적인 면모를 극복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외적 상황에 대한 새로운 이해, 공공적 쟁점에 대한 시민적인 참여와 정당한 저항 등이 동반되지 못하면 소설화를 통한 소극적 성찰은 연민이나 탄식에 머물거나, 좌절에 대한 변명으로 변질되고 말 것이다. (한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