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지 않는 상처에 대하여

- 은희경, <멍>

 

안효근 | 한성여고 교사 hooan@hanmail.net

 

난 병원에 대해 병적인 거부감이 있다. 외할머니가 뇌졸중으로 사경을 헤맬 때 허름한 옷차림의 노인네 부부라 해서 공연한 책임 추궁이 두려워 아무런 응급조치를 취하지 않은 모 병원 응급실에서 시작된 병원에 대한 불신은, 발치만이 유일한 치료책이라 주장하더니 뿌리가 너무 튼튼해서 뽑으려고 1시간을 낑낑거리다 실패한 후 결국 멀쩡한 내 이를 부숴내고 그 위를 금속성으로 씌워버린 치과 의사 때문에 가중되었다. 또 2년에 한 번 있는 정기 신체검사에서 부정맥과 관절염 소견이 나와 전전긍긍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이의 검진결과를 통보한 어이없는 상황을 접하고는 일말의 기대도 접었다. 더구나 등에 난 종기를 1시간에 걸친 수술로 제거하고 나서 같은 자리에 다시 똑같은 크기의 혹이 생겨난 걸 보고는 황당 그 자체였다. 그 후론 감기에 걸려도 쌍화탕으로 버텼고, 발톱이 발가락을 파고 들어가면 땀을 뻘뻘 흘리며 과산화수소수와 손톱깎이만으로 손수 제거했다.

난 신문이나 방송 등 언론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이 기득권에 기대어 충실히 그들의 권력을 재창출하고 국민을 호도하며, 시기와 불신을 조장하는 행태를 오랜 세월 보아왔기에 그 어디에도 신뢰할만한 구석은 남아 있지 않다. 그저 가증할 상식의 병이라, 참고만 할 뿐이다.

 

난 사람에 대해 특별히 규정짓는 것을 싫어한다. 상대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원만한 대인관계를 위해 말은 섞어도 상대를 죽도록 증오한다거나 맹신한다거나 추종한다거나 맹목적으로 존경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누구에게나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을 뿐, 어느 부분이 더 크게 부각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환경 탓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한때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 생각했던 이들이 마음 여기저기를 누더기로 만들고, 증오했던 이들보다 못한 행태를 보이는 일을 자주 접했기 때문이다.

병원, 언론, 대인관계 등에서 비롯된 필자의 뒤둥그러짐은 모두가 내 나름의 상처의 결과물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난 사람들의 인생이라는 게 시계 바늘 돌듯이 천편일률적이지 않기 때문에 재미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한 개인으로 따져 보아도 너무도 순탄하여 절절한 아픔에 상처 받는 일이 없다면 삶은 무미건조하고 때로 무의미하기까지 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멍, 즉 상처는 있다. 그동안 논술거리에 충실히 학생답안을 연재했던 내 여고생 제자가,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내게 건넨 ‘우리나라 고등학생의 상처’라는 제목의 글을 보면, 겉으로는 대견하고 순탄하게만 보이는 아이들의 삶 속에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커다란 멍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고등학생 수 평균 180만 명. 한 학년에 60만 명꼴이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는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나다가 2011년을 정점으로 다시 줄어든다고 한다. 이미 입시를 끝낸 필자는 그렇다 쳐도, 바로 그 2011년에 입시 전쟁을 치르게 될 남동생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안쓰럽기만 하다.

남동생도 이른바 ‘야자’, 즉 야간자율학습이란 것을 하고 있다. 전국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이 하고 있는 바로 그것 말이다. 물론 자율학습 자체는 좋은 것임을 필자는 온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그 덕분에 대학을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학원이나 과외와 같은 사교육에 의존하는 것보다 자신의 시간을 가지고 공부를 하는 것이 분명 더 효율적이고 바람직한 학습 방법이다. 그렇지만 항상 지적받듯이 자율학습이 ‘자율’이 아닌 것이 문제다. 이런 현상은 서울을 벗어나 지방으로 갈수록 더욱 심각한데, 심지어 일요일에도 학생을 불러 자율학습을 시키는 학교가 많다고 한다.

절망적인 것은 학생들에게 ‘강제’되는 것들이 비단 자율학습 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방과 후 교실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보충 수업을 하는 학교도, 법적으로 폐지된 0교시를 버젓이 시행하고 있는 학교도 있다. 이에 저항하는 일부 지각 있는 학생들은 순식간에 ‘대학교 안 갈, 학교에 도움 안 되는 배은망덕한 놈들’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각 학교가 가지고 있는 대학 진학률에 대한 압박이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전가되고 있는 것이다. 교육 방면에, 능력이 뛰어나고 국민의 지지가 열성적인데다가 정권까지 매료시켜 교육제도 개혁에 아무 간섭을 받지 않을 그런 선지자가 나타나 고교평준화, 대학평준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상 이러한 ‘강제’는 계속 될 것이다.

그래서 학생은 끊임없이 상처받는 반영구 상태의 피해자다. 학교는 그들을 ‘학교’라는 큰 제도에 가둔 것도 모자라서 ‘강제’라는 촘촘한 망으로 옭아맨다. 이러니 우리나라 평범한 고등학생들에게 학교를 다니면서 ‘자아’를 찾는 일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웬만큼 독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지옥에서 ‘자아’라는 것을 찾을 수 있겠는가. 다행인 것은, 사실 이게 다행인 건지 그렇지 않은 건지 필자도 확신을 못하겠지만,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지독히도 독하다는 사실이다. 말이 되지 않는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꾸준히 자신의 자아를 찾고 꿈을 추구한다. 어쩌면 유전적으로 대물림한 생존본능일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고등학교 2학년 1학기를 보낼 즈음에 그러니까 2008년 상반기에, 학생들의 생존본능이 사회적으로 나타나게 된 사건이 하나 있었다. 학생들이 사회 안에서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고자 한 그 유명한 사건, 6월 광우병 파동 말이다. 광우병 촛불 문화제는 학생, 특히 고등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강제’로 인해, ‘학교’로 인해 받은 상처를 견뎌내고 이 로 나선 것이다. 동 말이입장에서 경이로운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필자는 윗세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가 또한 그들에 의해서 잃게 된 동 말이사회적 단위말이주체의식을 드디어 되찾게 되었다며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그 기대감은 곧 일부 어른들에 의해서 무너져 내렸다. 그들은 학생들의 주체의식을 색깔론을 들먹이며 ‘조작이다, 정권에 반대하는 불순한 무리들에게 순진한 학생들이 조종당했다’라는 말로 일축했다. 순식간에 촛불 문화제에 모인 학생들은 ‘불쌍한 방패막이’로 변해버렸다. 학생들의 힘은 그 말을 깰 만큼 강하지 못했고, 다시 한 번 우리들은 우리의 자아가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농락당했음을, 더 큰 상처를 입었음을 깨달았다. 이번에는 학교가 아니라 사회로부터 가해진 것이었다. 학생들의 주체적인 의식을 자신들의 다툼에 이용한 어른들의 미성숙한 행동은 학생으로서는 가히 충격적인 것이라 할만 했다. 결과적으로 학생은 모두에게 무시 받고 만 것이다.

‘어린이는 나라의 새싹입니다’, ‘청소년은 국가의 미래입니다’하는 문구는 이제 진정성을 잃은 지 오래다. 학교가 선방을 먹이고 국가가 뒤통수를 친다. 학생을 두 번 죽이는 이런 사회, 이런 나라에서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고 싶은 아량도, 기력도 학생에게는 없다. <졸업생 이지은>

 

여기 등장인물 모두가 멍투성이인 소설 하나가 있다. 여전히 공지영, 신경숙과 더불어 트로이카 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주목받는 여류작가 중 한 명인 은희경의 「멍」이라는 제목의 소설이다. 소설가로서 은희경의 미덕은, 세상을 거꾸로 도는 시계 바늘처럼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인생의 이면을 구경하는 재미’를 준다는 점에 있다. 그녀의 전작 소설들이 대개 그러했듯 1998년에 발표된 「멍」이라는 단편에서도 이러한 키워드는 여전히 유효하다. 더불어 「멍」은, 우리 사회에서 특정한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고통을 수반하는지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 「멍」의 줄거리

 

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인 ‘이찬진’은 어느 날 자신의 연구실에서 카드 청구서, 안경점에서 보낸 고객관리용 결혼기념일 축하카드와 함께 배달된 ‘한현정’이라는 이름의 소설 원고를 받게 된다. ‘한현정’이라는 이름도 기억에 없거니와 ‘멍의 기억’이라는 흔한 제목과 식상한 서두를 흘낏 보고 나서 문학 지망생의 습작인 것으로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던져두는데, 마침 컴퓨터에는 그날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메시지가 뜬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삐리릭’하는 호출음이 교수들을 원격조종당하는 로봇처럼 컴퓨터 화면 앞으로 불러 앉히는 것이다. 학교 기물을 아끼도록 지도해라, 학장에게 인사를 잘하도록 지시하고 교수들도 모범을 보여라, 엘리베이터 사용 억제와 물 아끼기 실천에 적극 나서라 등등. 이 모두의 끝에 따라붙는 ‘협조 바란다.’는 정중한 문장은 우락부락한 팔뚝에 새겨진 해골 문신이나 뒷골목 담벼락의 가위 그림보다 훨씬 더 으스스하다. 이제는 공문을 분실했다거나 전화연락을 못 받아서 미처 몰랐다는 핑계도 통하지 않았다.

- 은희경, <멍>,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창작과 비평사, 1999, 58-59쪽

 

엔터 키를 누르니 화면보호기가 걷히며 교무처에서 보낸 공지사항이 떴는데, 내용은 다음 날 있을 교양강좌에 학생 참여를 독려하고, 교수들의 참석도 협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마침 강사는 자신의 동기이자 친구인 ‘박정환’이라는 잘 나가는 소설가였다. 이찬진은 커피를 타놓고 연구실 창밖을 내다보며 아침에 현관을 나서는 자신에게 아내가 한 말을 떠올린다.

임신 6개월의 몸으로 자궁 속의 물혹을 태아에게 위험하다는 이유로 마취도 없이 제거한 아내는 첫 아이 출산이후 극도의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육아와의 전쟁을 치러냈는데, 공교롭게도 전문대학에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남편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한다. 그러던 중 둘째아이가 들어선 사실을 알고 나서는 심한 우울증까지 겹쳐 있던 터였다. 오늘 아침엔 ‘저 오늘 병원 가요’라고 짤막한 메시지를 전했었다. 찬진은 그 병원이란 게 정신과인지, 산부인과인지 잠시 혼란을 느낀다.

 

아내를 가장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그녀가 불행해진 데에 남편인 나를 비롯하여 그 누구도 잘못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 같은 책, 63쪽

 

다음 날 교양강좌가 끝난 후 일식집에서 정환과 마주한 찬진은 세월을 실감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만큼 자신의 나이를 실감하게 해주는 것도 없다. 10년 만에 만난 친구의 변한 얼굴을 보면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던 10년 나이를 그 자리에서 한꺼번에 떠맡는 것 같다. 20년 만에 만나는 친구라면 더할 것이다. 갑자기 자신이 살아온 20년에 대해 무거운 회한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 같은 책, 64쪽

 

잘 나가는 소설가로 행복하기만할 것 같던 정환의 입에서도 세월에서 묻어나는 회한이 느껴진다.

 

이사철마다 한권 내고 마누라 애 낳을 때 한권 내고 막내 동생 대학 갈 때 한권 내고, 그 덕에 내가 불후의 명작을 벌써 몇 권이나 쓴 거야? 혹시 천재 아냐? 잔을 비우며 내가 대꾸한다. 당대에 아무도 안 알아주고 요절해야 천재지, 나이 사십에 무슨 수로 요절하려고? 그러게 말야, 라며 정환이 피식 웃는다. 이 나이까지 살아버렸으니 이제 욕되게 생을 끌고 가다 내려놓는 것 말고 무슨 선택이 남아 있겠어.

- 같은 책, 66쪽

 

그의 입을 통해 우연히 한현정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알고 보니 정환이 짝사랑했던 ‘씻어놓은 푸성귀처럼 생긴’ 그녀는 사회성 없고 술 좋아하며 가능성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던 사이비 운동권 ‘심영규’의 아내가 되었던 여자였다. 한현정은 임신 4개월의 몸으로 심영규를 택해 부부가 되었는데, 결혼 이후에도 심영규는 그저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는 거나 좋아하고, 마셨다 하면 언제나 몹시 취해 술주정이나 하고, 눈치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정이나 주고, 그걸 제대로 표현도 못하면서 그 주위를 얼쩡거리는 ‘비사회적인 인간’이었다. 정환에게도 그의 유명세를 빌려 남의 시상식장의 식객 노릇을 하고, 집으로 찾아와서는 정환의 아내를 비롯한 가족에게 여러 가지 불편을 끼쳤으며, 도움을 주려는 친구들에게도 무책임한 일처리로 손해를 입히는 등 사회적 폐인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준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내인 한현정은 심영규의 모든 걸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했으며, 그가 술에 취해 길바닥에 쓰러져 죽었을 때에도, 긴 여행을 떠난 것으로 애써 미화했다.

앞서 이찬진에게 배달된 소설의 원고는 바로 한현정과 심영규의 사랑과 결혼에 관한 것이었다. 한현정은 술에 취해 소파에 널부러진 남편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구겨진 물건처럼 소파에 부려져도 그는 고개만은 번쩍 쳐들고 있다. 그는 술이 취하면 절대로 고개를 눕히지 않는다. 아무리 머리를 눌러도, 때론 좀 흉하지만 배를 타고 올라가서 두 무릎으로 그의 어깨를 찍어 누르고 양손으로 힘껏 눌러보는데도 소용없다. 죽은 듯 늘어져서 눈을 감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고개만은 철심을 박은 듯 빳빳했다.

- 같은 책, 77-78쪽

 

사회적으로 소외된 인물인 심영규에 대한, 한현정의 사랑이 담긴 그녀의 소설은, 늘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남편의 ‘멍’ 이야기로 끝이 난다. 심영규가 사망한 지 한 달 후 한현정은 이찬진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원고를 돌려받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원고를 돌려주기 위해 한현정을 만났을 때 찬진은 마야 잉카전에서 자신이 산 편지칼을 심영규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둘 사이에 ‘접지면’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원고를 돌려주고 집에 돌아와 보니 병원에 다녀온 아내는 한결 편안한 모습이 되어있었다. 여전히 그 병원이란 게 정신과외이란 산부인과외이 혼란스러워하는 찬진의 눈에 주사 바늘을 꽂았었는지 그녀의 손등에 생긴 푸른 멍 자국이 선명히 들어온다.

* 지워지지 않는 상처에 대하여

 

소설은 그것이 다루는 시대 전체를 조망하게 해주는 조감도요, 때로는 그 시대의 통속적 시류(時流)에 대한 저항의 기록이기도 하다. 또한 소설은 언어를 도구로 하는 예술적 형식을 통해 인간의 경험을 재해석하여 제시해 준다. 좋은 소설은 작가가 선택한 삶의 한 부분으로 우리의 생각을 집중시켜서,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분명하게 해준다. 정해진 틀 안에서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세상을 넓게 바라볼 창문이 필요하다. 바로 이런 창문의 역할을 하는 것이 소설이 가진 진정한 가치요 이점인 것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대학교수이자 평론가를 화자로 내세워 인생을 서정적으로 대하는 자들에 대한 공감 혹은 연민을 유도하고 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자기애에 충실한 아내의 삶과, 한때 운동권이었지만 쓸모없는 인생을 살다 죽어버린 심영규의 아내 한현정의 지고지순한 삶 모두에 공히 연민을 느끼도록 설정함으로써, 제도에 충실히 편입된 자들은 점점 더 증폭되는 편안함에 대한 욕망에 불행해지고, 제도에 편입되지 못하는 순수한 인간들은 도태되는 것이 인생이라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시계같이 규칙적인 삶을 사람들에 대해 ‘긍정’ 내지 ‘정상’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람들 중에는 그 반대쪽의 생을 사는 경우도 흔히 있는 것이 사실이다. 소설 속 심영규 역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살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심영규는 일상에서 도태되어 습기 없이 버석거리는 황폐하고 불쌍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한현정의 소설 속에 인용되어 있는, 딸에게 남긴 심영규의 편지를 보면, 타인이 보기에 구제불능인 그조차 얼마나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인지를 엿볼 수 있다.

 

아버지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아니 더러운 역사일수록 그것이 주는 교훈은 값진 것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는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으니까.…… 너는 어려서 사치가 뭔지 모를 것이다. 아버지가 가르쳐주마. 그것은 문명된 아내에게 '실력'을 보이려고 발을 씻는 일이다. 냉수를 마시고 맑은 공기도 마셔두고 말이다.

- 같은 책, 85-86쪽

 

또한 이 소설의 서사는 당연히 등장 여성들의 아픔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찬진의 아내는 임신 중인 몸으로 정신적 혼란과 육체적 상실감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으며, 심영규의 아내 한현정은 인생 자체가 고해(苦海)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겉보기에 평온한 삶을 살고 있는 이찬진이나 박정환도 ‘멍’을 안고 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안점은 끊임없이 무너지는 피폐한 남편 심영규를 지고지순하게 보듬어 안는 여자 한현정을 통해, 삶이란 멍을 지우고 만드는 과정에 불과함을, 그 멍이 다시 생성되지 않을 때 삶의 시계는 결국 멈추어버린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데 있다.

예컨대 한현정의 내면을 드러내는 다음과 같은 인용 구절들이,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한 소설의 튼실한 뼈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그러나 그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자기와 함께 태어난 사람들과 더불어 늙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그가 자신의 늙어가는 겉모습처럼 그렇게 일반적인 삶에 편입되기를 바란다.

- 같은 책, 79쪽

 

다시 스웨터가 완성되었다. 내 등과 어깨, 손가락의 굳은 살 아래까지 뚫고 들어온 통증을 달래며 나는 그와 얘기를 나눈다. 그는 이 스웨터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 목이 너무 좁게 뜨였어. 입을 때 머리가 잘 안 들어가서 짜증이 난다구. 나는 다시 풀고, 다시 뜬다. 이제 됐어요? 그는 볼멘소리를 한다. 넌 틀렸어. 네가 뜬 스웨터 속으로 나를 억지로 구겨 넣으려고 하지 마. 난 절대로 스웨터에 몸을 맞추지는 않을 거라구.

- 같은 책, 91쪽

 

그의 맨살은 따뜻하다. 그는 이 맨살 속에 멍이 아른아른한 누르스름으로 남아 있을 때쯤이면 늘 새로운 멍을 만들어오곤 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새로운 멍을 만들지 않은 덕분인지 그의 몸은 아주 깨끗하다. 멍이 없다! 내 손이 멍을 찾아서 그의 몸 이곳저곳을 다급하게 헤맨다. 그의 가슴, 그의 배, 그의 팔과 다리, 아아, 그의 하얗고 투명한 몸속!

내 손은 갑자기 멈춘다.

멍의 기억은 사라지고 없었다.

- 같은 책, 91-92쪽

 

비록 이미 삶의 문턱을 넘어선 술주정뱅이를, 불쌍하고 나약한 인간으로 여기며 마지막까지 헌신적으로 돌보는 여인이 등장한다는 점은 진부한 멜로드라마의 공식처럼 보이지만, 이 같은 구도는 작품 속 여성 인물들이 유독 타자와 소통을 갈망하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이유와 더불어,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감을 규정해 온 이 땅의 여성 현실을 반영한다. 덧붙여 작가는 낭만적 사랑과 연애결혼이라는 이상의 뒷면에 이기적인 소유의 욕망이 꿈틀거리는 오늘날 남녀관계에 대한 냉소의 시선도 잊지 않고 있다.

또한 이 소설에서 일관되게 형성되는 주제 의식이 하나있다면, 그것은 남자와의 관계라는 창을 통해 여자인물이 사랑의 의미와 한계를 가늠하고 이로써 삶의 이면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물론 작가 특유의 허무주의, 제도에 대한 패배감, 인간성에 대한 회의도 곳곳에 배어 있다. 작가는 자신의 이러한 태도를 두고 말하기를 "그처럼 인간의 나약함과 모순을 인정해 주는 것이 내 나름의 휴머니즘"이라고 했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이 같은 삶의 모습이 이 시대의 자화상임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속도감 있는 문체와 폐부를 찌르는 경구(警句)들, 시의 적절한 유머와 날카로운 풍자가 곳곳에 도사린 「멍」은, 그래서 가볍지만 단순하진 않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전개되던 작가의 한담은 어느 순간 개체화된 개인의 삶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쓸쓸함에 관한 무거운 이야기로 변주된다. 어떠한 환상도 불허하는 작가의 이 삐딱하고 냉소적인 시선을 통해 우리는 뒤틀리고 왜곡된 형태로 숨겨진 현대인의 숙명을 언뜻 엿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이 소설의 매력은 소설의 서사 진행 과정 중, 독자들 옆구리를 찌르듯 불쑥 생에 대한 단상을 날리는 데 있다. 가령, ‘사람들에게 모두 제 나름의 멍이 있다는 사실을. 그럼 그가 입고 있는 옷을 헤치고 그 속의 멍까지 본다면 타인을 알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서문)’ 는 식이다.

아쉽게도 남녀 사이의 소통부재와 그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통해 현대인들의 고립된 삶, 섣부른 화해나 사랑의 가망 없음을 잘 보여주는데 반해, 작가가 대안으로 제시한 ‘인간에 대한 관심’이나 ‘헌신적 사랑’이 어떤 실체를 가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냉소와 위악이 현실을 우화적으로 보여주는 데는 장점이 있지만 그 구조를 재생산하는 근본적 원인을 읽어내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소설을 읽고나면 결국 남는 것은? 인간의 생은 상처로부터 탄생하고, 상처 속에서 살다가, 상처와 더불어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쓸쓸한 여운만이 입맛을 다시게 만든다.

* 논술꺼리

 

「멍」에는 남편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찬진의 아내는 임신한 몸으로 심리적 갈등을 겪으면서 남편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고, 심영규의 아내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남편을 보듬으며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고 한다. 다음 제시된 시를 읽고 이내는 진정으로 자기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자.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거지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 달라 물 달라 옷 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 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세상이 가르쳐 준 대로

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나는 성실한 모범근로자였었다.

 

노조를 만들면서

저들의 칭찬과 모범표창이

고양이 꼬리에 매단 방울소리임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보살핌이

허울 좋은 솜사탕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편리한 이론과 절대적 권위와 상식으로 포장된

몸서리쳐지는 이윤추구처럼

나 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가정의 독재자가 되었었다.

 

투쟁이 깊어 갈수록 실천 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 낸다.

노동자는 이윤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 박노해, 「이불을 꿰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