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자리

- 손홍규, 「투명인간」

 

안효근 | 한성여고 교사

 

아버지를 문학적으로 규정한 대표적인 사례는 시인 서정주의 「자화상」이 될 것이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는 이 시의 첫 구절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부잣집 마름으로 살아온 아버지로 인해 심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시인 자신의 불행한 운명에 대한 고백일 것이다.

이문열의 소설에 등장하는 빨갱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좌우 이데올로기의 격렬한 대립 속에 탄생한 일그러진 기성세대의 초상일 것이고, 조세희 소설에 등장하는 ‘난쟁이’ 아버지는 산업화 시대에 소외당한 사회적 약자의 상징임도 주지의 사실이다. 특이하게도 김소진의 소설 「개흘레꾼」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벗어나야 하는 처절한 기억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아버지들은 경제적으로 허덕이고,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 외로우며, 가족으로부터 소외되어 늘 쓸쓸하다. 아버지는 이제 좌절의 상징이자, 눈물의 결정체이며, 외로움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과거 가부장제의 권위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절, 우리의 '아버지'들은 종종 권력과 억압의 상징으로 치부되었기에 한편으로는 극복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권력이나 억압과는 애초에 거리가 먼 아버지들이 거리에 넘쳐나고 있다. 이런 무기력한 주변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아버지들 대부분은 이제 자식들에게 일종의 콤플렉스로 작용하고 있다. 비루함으로 가득하고, 나약함이 차고 넘치는 아버지의 삶을 똑바로 응시하는 건 본인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사회경제적으로는, 늘 구조 조정의 주 대상이고, 망해가는 사업을 끌어안고 사는 주인공이며, 비정규직의 깃발 아래 목숨 걸고 충성해야 하는 도구적 합리성의 담론이 지배하는 요즘 세태로 보아, 오늘날 아버지들이 아버지로서의 품위를 지켜가며 산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 시대가 되어버렸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눈물이 절반이다.

- 김현승, 「아버지의 마음」 중에서

 

2010년, 요즘의 아버지들을 문학적으로 규정한다면 어떤 상징이 적당할까? 혹시 그건 ‘투명인간’이 아닐까? 손홍규의 단편 「투명인간」은 예상한대로 아버지 소설이다. '나'가 화자에 가깝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부녀간의 갈등보다는 아버지의 동태에 관한 관찰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아버지의 서사'이다.

손홍규에게 있어 ‘아버지’는, 그 이전 어떤 문학 작품도 묘사하지 않았던 지경에 이르렀기에, 기존의 아버지 문학들보다 정확히 한 술쯤 더 뜬 소설이다. 「투명인간」의 아버지는 멀쩡한 사람이다. 그는 좌익도 아니고, 폭군은 더더욱 아니며, 사회적으로 열등한 인물도 아니다. 때로 혼자 있기를 즐기고 늘 피곤하긴 하지만, 가족과의 유대에 신경을 쓰고 부부관계도 그럭저럭 원만한, 이 시대의 스탠더드일 뿐이다. 단순히 보통일뿐만 아니라 대충 평가해도 중상 정도는 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자신의 생일날 우연히 시작된 투명인간 놀이로 인해서 존재의 의미조차 잃어버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세기말적 분위기와 뜬금없는 상상력으로 무장한 신예작가답게, 손홍규는 아버지 얘기를 털어놓으면서도 자기 특유의 색깔을 버리지 않는다.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투명인간」에 등장하는 아버지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우리네 모두의 아버지일 수도 있다는 확신이 드는 것은, 이 작품이 2010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에 우수상 수상작으로 실려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 <투명인간>의 줄거리

 

이 소설은 처음부터 아버지의 존재 의미 탐구로부터 출발하게 됨을 예고한다.

 

그가 내게 물었다. 여기에 우리 말고 다른 누군가 있는 것 같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 여기 오셨어요?

- 손홍규, 투명인간, 2010 이상문학상 작품집, 2010, P217

 

아버지의 생일을 맞아 아버지를 투명인간으로 만들어보자는 ‘나’의 특별한 파티 제안에 어머니는 아버지의 생일을 기념하는 특별한 선물이 될 거라고 동의하고, 여동생은 여태 해보지 못한 일을 한다는 야릇한 흥분에 젖어 적극 참여한다. 세 사람은 아버지의 퇴근 전까지 아버지를 투명인간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다,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몸이 부딪쳐도 모른 척하며, 이름을 불러도 반응하지 않기로 약속한다.

생일날 저녁이 되어 드디어 연극이 시작되었을 때, 아직 연기에 익숙지 않은 ‘나’와 어머니에 비해 여동생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능숙하게 자기 역할을 해낸다. 생일 케이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와 여동생은 물론 어머니마저도 아버지의 정확한 나이를 모르고 있다는 점에 머쓱해지지만, 작은 실랑이 끝에 마흔여덟 살을 상징하는 초를 꽂고, 어머니가 준비한 포도주를 차려 놓은 후 본격적인 투명인간 놀이가 시작된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생일상을 차려놓고 둥그렇게 둘러앉아 있는 가족을 보고 반가워하지만 이미 연기에 몰입하고 있는 가족들은 아무도 그를 아는 척하지 않는다. 이런 가족의 연극에 아버지도 흥미를 느끼며 기꺼이 동참하게 되고, 기대한 축하와 함께 연극을 끝내려 하는 아버지의 시도는 완고하게 자기 역할을 고집하는 구성원들의 ‘자연스러운’ 연기에 의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와 가족들 사이에는 미묘한 불안감이 형성된다.

 

우리 네 식구는 안방과 작은방 그리고 거실과 베란다, 이렇게 절묘하게 네 곳에서 하나씩의 꼭짓점이 되어 마름모꼴로 선 셈이었다. 꼭짓점을 잇는 선들은 팽팽할 거였다. 어쩐지 아버지와 내가 선 자리가 예각이고 어머니와 동생이 선 자리가 둔각일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 나와 아버지가 가장 멀리 떨어진 셈이다.

- 같은 책, 224쪽

 

이제 이러한 상태가 단순히 생일 파티 대신에 기획된 연극의 일부가 아닌 것 같다는 불안감은 아버지와 가족들 간의 미묘한 신경전으로 발전하고, 둘 중 어느 쪽도 먼저 항복하기 싫어진다.

 

우리는 우리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상대 쪽이 먼저 고개 숙이길 바랐다. 아버지는 당연히 우리가 지금까지 연극을 했을 뿐이었노라 고백하길 바랐을 테고 우리는…… 아버지가 좀더 고분고분하길 바랐던 거다! 그랬다. 아버지는 한 번도 고분고분한 적이 없었다. 불을 끈 채 현관문을 열어놓았다면 놀란 척이라도 했어야지, 촛불을 켠 생일케이크를 보았다면 기쁘고 고마워 어쩔 줄 몰라 허둥댔어야지, 아버지는 너무 일찍 연극에 동참한 셈이다. 처음에는 나와 동생 그리고 어머니 가운데 누구도 아버지를 괘씸하다고 여기지 않았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불만이 자랐던 게 틀림없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연극을 금방 끝내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아버지를 내버려 두어도 괜찮을 듯했다. 화를 내도 모른 척할 자신이 생겼다.

- 같은 책, 228쪽

 

시간이 흐를수록 가족들은 곧 아버지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진다. 아버지와 몸이 부딪쳐도 다른 무엇엔가 걸려 그런 것처럼 몸을 휘청댔고, 아버지와 눈길이 마주쳐도 고개를 돌리거나 딴청을 부리지 않는 경지에까지 이른다. 핸드폰과 필담을 활용하여 가족들과 교류를 시도하려X필담을 활용노력은 구성원들의 협력 하에 모두 무위로 끝난다.

혼자서 생일 케이크를 모두 먹어 치운 아버지 역시 이제 하루 종일 집안에서 없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는데 익숙해져 간다. 마치 가족들 모두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는 여가를 즐기고 식사를 하고 샤워를 했다. 아버지를 포함한 우리 가족 모두는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이 본래부터 그래왔다는 듯이 별로 불편을 느끼지 못한 채 점점 시간만 흘러간다.

 

어머니, 동생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꾸민 일이었건만, 아버지가 오래전부터 쳐둔 자리그물에 포획된 기분이었다.

- 같은 책, 232쪽

 

일요일, 아버지는 간편한 캐주얼 차림으로 외출을 하고, 아버지가 자신을 진짜 투명인간이 되었다고 착각하여 여탕이나 모텔을 기웃거리지 않을까 걱정한 동생의 제안에, ‘나’는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 그의 뒤를 밟는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아버지는 아파트 단지 옆 공원으로 들어가더니 태극문양을 이룬 국화들을 꼼짝도 않은 채 다섯 시간 동안이나 바라본다. 아마도 어머니의 사랑을 자기보다 더 듬뿍 받으며 베란다에 키워지던 꽃들을 떠올렸음이리라. 이어 그는 산책로를 따라 공원으로 꾸며진 야산에 올라 공터의 빈 나무의자에서 잠이 든다. 잠든 아버지를 지켜보다 그 곳에서 오십 미터쯤 떨어진 약수터에가 물을 받아먹고 다시 공터를 찾은 ‘나’는 아버지가 그곳에서 진짜로 사라져버린 것을 깨닫게 된다.

한참을 아버지를 찾아 헤매다 어둠이 내린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난 아버지는 절망에 가득 찬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집에 아무도 없어. 식구들이 사라졌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말끝에 아버지가 울지 않았다면 나는 아버지가 연극을 하는 것이라 믿었으리라. 나는 방에 들어갔다. 투명인간이 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때 나는 망막 역시 투명하기에 아무런 상도 맺히지 않는다는 걸 그러니 투명인간은 장님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눈이 있어도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던 건 내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인류란 매번 존재했으나 매번 멸망했다가 매번 탄생해야 했던 인류와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야가 새하얗게 표백되었다

그처럼 나는 날마다 아버지를 잃었다.

- 같은 책, 239쪽

 

* 아버지의 자리

 

손홍규의 <투명인간>은 현대사회에서 점차 그 존재와 의미가 축소되고 있는 아버지의 역할 문제를 가족의 시각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처리한, 새로운 서사 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내 준 ‘아버지의 자리’라는 작문 숙제에 대해 많은 아이들이 비슷한 대답을 내놓은 것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아버지의 위상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날이 갈수록 궁핍해지는 생활고로 인해 어깨가 굽어지고, 집에 들어가면 아내의 등쌀로 인해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렇지만 자식들에게는 늘 당신의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 바로 그런 사람이 오늘날의 가장 보편적인 아버지가 아닐까? …… 요즈음 아버지란 존재를 한마디로 표현해 보자면 ‘로봇’ 같다. 열심히 일하고, 가족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만이 당연한 듯 여겨지고, 가족과의 교감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는, 소외된 사람 같다.

- 2학년 이지원

 

과거에 가부장제도라는 명칭 하에 행해지던 집안의 전제 정치가 가족 구성원을 힘들게 했다면, 요즘 집안에서는 아버지가 힘들어하고 있다. 그 어느 것보다도 무서운 가족에게서 자기가 느끼는 소멸감, 외로움은 아버지를 집안이 아닌 복도라는 공간에서 한숨 쉬는 존재로 만들고 있다.

- 2학년 노참이


알다시피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농경에 일생을 바치는 일반 백성의 아버지들은 물론 양반가의 아버지들 역시 자신의 입지와는 상관없이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행동했고,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대우받았다. 예컨대 실학자인 정약용은 비록 권력에서 비껴나 유배지에 있을지언정 여전히 편지를 통해 자신의 아들들에게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화 이후 대한민국에서 아버지의 입지는 지속적으로 위축되어 온 것이 사실이며, 근래에는 가족 내에서의 입지가 ‘경제적 능력’ 한 가지로 평가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한국 사회에서 “남자”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굳이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정답은 꽤 자명하다. 첫째, “학력 자본”의 소유자, 즉 학교 “간판‘의 소유자이며, 둘째, 경제 능력의 소유자, 즉 돈벌이의 주인공이다. 한국의 특수성에 따른다면 (구미 지역에 비해) 전자에 훨씬 더 큰 무게를 둘지도 모르겠다. 허나 남성이 ”가족 부양 책임자breadwinner"로 규정되는 것은 자본주의 세계의 보편원리다. 물론 대한민국에도 학력 자본을 소유하지 못하거나 경제 능력이 없는 남성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철저하게 소외당해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다.…… 돈을 버는 남성이라면 그가 집안에서 폭군 노릇을 해도 가족들이 어쩔 수 없이 참아주고 “아버지”로 인정해 준다. 하지만 “경제 능력의 결여”는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 그것이 한국사회다.

- 박노자, 씩씩한 남자 만들기, 푸른 역사, 2009, 머리말 중에서

 

박노자의 말대로라면 아버지의 떨어진 위상을 동정이나 안쓰러움의 대상이 아닌 실질적으로 복귀시키는 일이 우리 사회의 경제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에 동의하게 된다. 하지만 이 같은 해결책은 이론적으로나 가능한 일인 듯하다.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사회 분위기를 아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사회에서 누군가는 도태의 쓴맛을 볼 수밖에 없기에, 여전히 불쌍한 가장들은 양산 대기 중이다.

 

저 지붕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 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 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 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 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 나희덕, 못 위의 잠

 

결국 소설 <투명인간>은 그 동안 심증으로만 굳어져가던 오늘날 아버지의 위상에 대한 모종의 가상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는 우리의 예측보다 참담하며, 아버지의 존재 의미는 이미 상실의 단계에 접어든 듯하다. 또한 ‘투명인간’은 그 자신 남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투명해진 망막 덕에 그 어떤 대상도 그의 눈에 하나의 영상으로 맺히지 않는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이 현대 한국 사회에서 가족이라는 끈으로 묶여있는 구성원들이 놓인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듯하여 씁쓸하기만 하다. 머지않아 잔소리꾼으로 전락한 어머니나, 부양의 의무만을 강요하는 자식들까지도 개체화되어 가족의 의미 자체가 소멸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그래서 유효하다. 세계 최고의 이혼율과 세계 최저의 출산율 속에 그나마 있는 가족들의 단란함마저도 벼랑 끝에 서 있는 지금이 아니던가?

 

* 논술꺼리

 

소설을 읽고 오늘날 가족 내에서 아버지의 위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이유, 그리고 바람직한 아버지의 모습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 보자.

 

* 학생글

 

과거의 아버지는 가부장제를 바탕으로 한 사회 내에서 강하고 힘 있는 존재였다. 헛기침 한번으로 위엄을 표시하고 가정 내의 모든 일의 중심축이 되어 이끄는 집안의 큰 자리였다. 당당하고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집안에서 왕으로 군림하던 아버지의 시대는 끝이 났다. 출근 하실 때는 온 식구가 나가서 인사를 하고 퇴근하실 때는 하던 일을 멈추고 다녀오셨냐는 인사를 받던 아버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찾아보기 어렵다. 가정의 생계를 혼자 책임지고 집안의 대소사를 감독하던 권위 있는 모습은 사라지고 집 안에서는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아버지들이 늘고 있다.

현대 사회는 양성평등과 여권의 신장으로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고 있다. 그만큼 남성들이 사회에서 차지하던 공간이 여성들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점점 빨라지는 퇴직 연령이 이를 증명한다. 과거엔 아버지가 생계를 책임졌지만 요즘은 맞벌이 혹은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지는 가정도 많다. 즉, 아버지의 임무와 책임이 줄어드는 현실에서, 그 임무와 책임에서 생겨났던 가부장적 권위 역시 약화되는 것이다. 또한, 생계를 책임지지 못하는 아버지는 더 이상 집에서 아버지가 아닌 짐이 되곤 한다. 퇴직한 아버지들은 일에 치이고 돈에 치여 주의 깊게 보지 못했던 자녀와 아내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가부장제의 영향으로 칭찬에 인색하고 무뚝뚝한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표현이나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러한 아버지들의 긍정적인 작은 변화를 가족들은 깨닫지 못한다. 용기를 내어 표현해도 자녀나 아내는 평생을 방관했으면서 이제야 무슨 참견이냐며 차가운 반응을 보이기 십상이다. 아버지는 소통하려던 마음의 문을 다시 닫게 되고, 대화도 소통도 없는 악순환은 또 시작된다.

엄연히 아버지도 부모인데, 대부분의 자녀들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에게 의지한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초등학생 이후로는 피하게 되고, 커 갈수록 술에 취해 조금 풀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교육의 대부분을 양쪽 부모님 모두보다는 어머니에게 크게 의존한다는 것이 이런 문제를 낳는다. 기러기아빠 또한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함께하는 ‘부모’의 필요가 아닌 아이의 보호자는 하나면 된다는 생각으로 만들어진다. 아이와 엄마가 떠나고, 아버지는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하고 만다.

현재 아버지의 자리는 과거와 다르며 지금과는 달라야 한다. 가족들에게 엄격하고 완벽하며 능력 있는 모습만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선 안 된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늘 치이기만 하고 바쁘게만 사는 모든 아버지들은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눈치를 보며 산다. 이제 자신을 조금 풀어줄 때가 되었다. 아버지가 아이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아이와 친구가 되고 아내와는 인생의 파트너로 서로를 존중해야 할 것이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아버지는 행복하기 어렵다. 아버지들은 자녀에게 존경받기 위해 멋진 모습만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가족들에게 관심을 표현하고 솔직해져야 한다. 이 세상 모든 아버지는 그럴 의무가 있고 행복할 자격이 있다. - - - 김예진 (고 2)

 

시대가 많이 변화되면서, ‘아버지’라는 개념도 많이 변화되었다. 과거, 특히 조선시대와 현대사회의 ‘아버지’의 자리를 보면 많은 차이가 있다. 시대가 요구하는 조건에 맞게 ‘아버지’의 자리가 변하였다.

전통사회 중 조선시대에서는 유교적인 관습과 전통들이 요구되는 사회였다. 이 요구들에 따라 조선시대의 아버지들을 보면 가정 내의 절대적인 존재였다. 아버지들이 절대적이었다는 근거를 두 가지 제도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 번째 제도는 ‘가부장적 제도’이다. 유교에서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정의 질서, 장자(장남)의 권위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가정 내의 아버지가 자신의 부인과 자식들의 ‘작은 왕’이 되는 가부장적 제도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이 당시 아버지들의 자리는 높을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제도는 가부장적 제도를 바탕으로 한 ‘일부다처제’이다. 한 가정의 아버지가 여러 명의 부인들을 거느릴 수 있는 이 제도로 인해 아버지의 지위는 부인들보다 높아질 수 있었다. 이 제도로 가장의 부인들은 자신의 남편과 다른 부인의 사이를 질투, 시기하면 그에 따른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 그만큼 한 가정의 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반면에 현대사회는 자본이 요구되는 사회이다. 현대사회의 아버지들은 자본주의가 판치는 이 세상에서 자정의 생계가 더 나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늦게까지 일을 하신다. 이러한 상태가 반복되면서 현대사회의 아버지들은 ‘생계 지킴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어요.' 이 노랫말은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노랫말일 것이다. 이 노랫말은 CF에서 직장에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의 힘든 모습을 자식들이 보고서 부른 노랫말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집안의 생계를 이어가는 아버지의 자리를 보면, 절대적 이었던 조선시대와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걸 알 수 있다.

요즘 사회에서 부인들은 ‘월급도 쥐꼬리만 하면서’라고 남편들을 비방하기도 한다. 이 말을 보면 그만큼 아버지의 자리가 조선시대보다 많이 하락한 것을 알 수 있고 ‘아버지’는 그냥 돈을 벌어서 생계를 이어가게 해주는 도구적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사회에선 집안의 명예와 체면 등이 중시되는 것 보다 현실적인 측면, 즉 경제적인 측면이 더 중시되므로 가정의 아버지로서의 역할은 이전보다 더욱 더 많아지게 된다. 가족들의 배를 굶기게 할 수 없는, 능력을 가져야만 하는 아버지들의 책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무겁다.

조선시대에서 한 가정의 아버지들은 절대적인 자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현대사회에 와서는 ‘생계 지킴이’라는 도구적인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우리들은 이 변화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변화가 더 악화되기 전에 우리는 자신의 아버지가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임을 각인해야 한다. 또 우리가 아버지를 존중하고 따르는 가정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 이예림 (고 2)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가부장 제도가 있었다. 아버지들은 가족의 중심이었고, 절대적인 집안의 권력자였다. 따라서 가족의 중심인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따라야 했다. 그러나 사회가 점점 변화하면서 오늘날 아버지는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아버지는 소외의 대상이 되었고, 위축되어가고 있다.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존재는 어떠한가? 아버지는 한 평생 자식들과 아내를 부양하기 위해 직장을 다닌다. 하지만 정작 아버지는 자식들과 친하게 지내지 못한 경우가 다반사이다. 신문 기사에서 보면 ‘우리나라 청소년 중 반 이상이 아버지와 대화가 없고 친하지도 않다’고 나와 있다. 아버지와 자식 사이가 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아버지들은 자식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의 아버지는 가부장제도 아래 키워지셨다. 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이면서 우리 가정에 기둥이므로 당연히 어려운 존재였다. 오늘날 아버지들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가부장제도 아래에서 키워진 아버지들은 자식들을 위하기는 하면서도 자식들과 어떻게 친해질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자식들은 아버지보다 시간을 더 많이 함께 한 어머니를 의지하고, 아버지에 비해 친밀한 것이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소외받고 있다.

사회에서의 아버지 또한 소외되어 간다. 경쟁하고, 또 경쟁해야 하는 이 사회 체제에서 아버지는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최근 종방된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도 이런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순재의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정보석은 계산을 잘 못해 이순재에게 무시당하기만 한다. 정보석은 직장에서 스트레스 받고, 의기소침해 가족들에게도 무시 받는 가장이 되어버렸다. 직장에서는 아버지보다 더 유능하고 다재다능한 젊은 사람들이 직장에 들어오기를 원한다. 따라서 아버지들은 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된다. 평생을 일 하던 직장에서 쫓겨나게 되는 경우, 직장 상사에게 시달리고 돌아오신 힘없고 병든 아버지의 모습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기러기 아빠에 관한 기사에서는 우리나라의 23%가 기러기 아빠라고 밝히고 있다. 우리 주위에서도,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기러기 아빠는 비일비재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우리나라의 교육열로 인해 기러기 아빠의 수가 많이 늘어나고 있다.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생활비를 아끼면서 그들은 살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 정작 그들은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40대 남성의 우울증이 여성의 10배라고 하니 오늘날 아버지들이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지금도 아버지는 사회와 가정의 싸늘한 시선만을 받고 있다. 물론 아버지도 가부장 제도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 변화해야 한다. 가정에서 오늘날의 아버지에게 원하는 것은 자상함이다. 자식들과 함께 동화되고,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가족들에게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자식들이 힘들 때 조언을 아끼지 않고 대화 하면서 자식들과 좀 더 가까워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노력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가정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오늘날 아버지에 대한 인식을 단순히 가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기보다는 가정을 사랑하고 있고, 가족의 한 구성원이며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생각과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자식들과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가 친밀해지기 위해 이 같은 노력을 한다면 오늘날 아버지가 가정에서 만큼은 소외 받지 않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지 않을까?

- 박지연 (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