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 논술 자료함
에코페미니즘에 대한 개념과 문제제기 그리고 기출문제
1. 백인남성의 딜레마 : 자기가 파괴한 것에 대한 추구
산업화된 북의 도시중심지에서는 때때로 기묘한 집단행동이 목격된다. 분명히 도시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진보와 근대성의 정점이라 보는 사람들, 도시가 ‘삶’과 자유와 문화의 중심인 사람들이 기회만 있으면 그 도시로부터 빠져나가려 한다. ‘자연’, ‘황야’, 남의 ‘저개발국’ 등 백인남성들이 바라건대 아직은 자신들이 ‘침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지역으로 떠나는 것이다. 원래 이러한 집단대이동의 목표지는 에스파냐, 이탈리아, 그리스, 튀니지의 해변과 더 뒤엔 터키의 해변이었으며, 이따금씩은 자기 나라 안의 ‘안망쳐진’ 시골이었다. 그러나 값싼 대중관광의 등장과 함께 우리는 점점 더 ‘모험’여행과 관광을 떠나라는 매체의 부추김을 받게 된다. 필리핀, 말레이시아, 파푸아뉴기니, 아마존 등지의 ‘동굴부족’ ‘식인종’ ‘야만인 인간사냥꾼’ ‘석기시대 사람들’을 보러 떠나라는 것이다. 15,6세기의 탐험가와 해적들처럼 풍요로운 20세기 말의 사람들도 초기 ‘발견자’들의 도전을 경험하고 자연과 교류하도록 그리하여 마치 갑자기 존 웨인이 된 것처럼 느껴 보도록 부추김을 받는다. 남자란 ‘거친 자연’에 맞설 때 다시금 진짜 남자로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처녀’지에 뚫고 들어가 그것을 오늘날 관광과 화폐경제를 의미하는 백인문명에 개방시키고 싶어 한다.
풍요 속의 절망
그렇다면 여기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자신의 문명과 자연에 대한 지배와 통제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여가시간을 이 아름다운 현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내려 한다. 왜? 이 향수병, 이 손대지 않은 자연에 대한 추구는 무엇 때문인가? 근대성의 정점인 백인문명이 궁극적으로는 ‘겉포장만 그럴듯한 사막’이기 때문일까? 이 도시문명이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오히려 그것은 풍요의 와중에서 깊은 불안감, 심지어 절망과 결핍감을 자아낸다. 슈퍼마켓 선반에 상품들이 더 많이 쌓이면 쌓일수록 절망은 깊어지며, 부재한 그러나 충족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꼭 있어야 할 기본적인 요소에 대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욕망은 더욱 커진다.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다. 여기에는 또다른 측면이 있다.
이러한 열망, 이러한 자연에 대한 욕망은 우리 주변에 있는 자연, 심지어 도시에까지 있거나 우리가 그 일부를 이루고 있는 자연으로 향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백인남성에 의해 명백히 외부라 규정된 자연, 즉 식민지이며 후진적이고 이국적이며 멀고 위험하다고 규정된 자연, 아시아나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자연에 고착되어 있다. 이곳의 자연은 백인문명의 ‘후배지’이다. 이곳은 이상화되고 비현실적인 자연이며, D. H. 로렌스가 말한 ‘머릿속의 섹스’처럼 ‘머릿속의 자연’이다. 시골 전원에 대한 향수도 마찬가지 현상이다. 18세기 이래 자연, 도시 주변의 시골 지역, 농민의 땅은 그저 도시의 후배지로 변형되거나 심미적인 경험 즉 낭만적 정경으로 인식되어왔다. 국외의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도시주민들이 먹을 식량을 재배하는 시골땅도 산업화된 농업에 의해 무자비하게 착취되고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처럼 후진적이고 이윤 없다 하여 평가절하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땅은 도시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몇 세대 전에 도시 노동자가 보통 휴일에 그랬듯이 밭에 나가 일손을 도움으로써 이런 감정을 해소하려는 사람은 없다. 전에는 노동자 가족들이 시골 마을의 집으로 가서 농사일을 거들었다. 지금도 몇몇 어른들은 자신의 가족농장이나 시골마을에서 보낸 휴가를 향수에 젖어 회고한다. 그러나 오늘날 관광객들은 순전히 소비주의적 방식으로, 화랑이나 극장에 갔을 때처럼 행위자가 아닌 관람자로 자연과 풍경을 경험하길 바란다. 이는 이전 시대 사람들보다 이러한 경험을 살 수 있을 만큼 돈이 많아졌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들이 땅과 맺는 관계는 머나먼 이국과의 관계처럼 생산적인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들은 자연과 땅을 상품으로 소비하고 다른 상품을 소비할 때처럼 쓰레기더미만을 남긴다. 그러므로 그들이 소비주의 관광을 통해 충족시키고자 하는 이 열망의 결과는 자신들이 동경하는 것을 파괴하기이다.
폭력과 욕망
현대인들-현대 남성들-을 위한 제3의 공간은 여성, 엄밀히 말해서 여성의 육체이다. 여성의 육체는 대다수 남성의 욕망이 투사되는 스크린이다. 이 ‘제3의 식민지’를 자세히 고찰해보면 아마 자연의 파괴와 이 동경 간의 상호연관성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관련성을 분석하기 전에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남성과 자연, 남성과 여성 간의 양극화된 관계의 역사에 관한 한 우리는 유럽에서 행해졌던 마녀사냥이란 이름의 여성대학살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 사건은 근대 계몽주의시대의 개막으로 찬양되는 바로 그 세기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계몽주의시대, 18세기까지 계속된 여성에 대한 이 폭력의 향연 이후, 18세기 문학과 예술에는 ‘여성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동경, 여성을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것과 일치시키는 새로운 동경이 등장한다. 진정으로 생기있고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들이 육체적으로 파괴되고 제거된 후에야 새로운 부르주아계급의 남성들이 여성성에 대한 새로운 낭만적 이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듯하다. 이 이상에서는 약하고 순종적이고 감상적인 여성, ‘부양자이자 보호자’인 남성에게 의지하는 여성, 이성의 세계가 아니라 감성의 세계를 대표하는 여성들이 주역을 맡는다. 실라 로우보담의 말처럼 19세기 내내 그리고 심지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성성에 대한 이런 낭만적 이상은 남성들의 갈망을 위한 ‘욕망공간’이었고 아직까지도 남녀관계를 대체로 규정하고 있다. 이 이상적 여성상은 자본축적을 위해 세계를 정복하여 식민지로 만들기 시작한 강하고 진취적인 부르주아 백인남성에게 꼭 필요한 보조품이었다. 더구나 이 ‘이성적 남성’에 대비되어 ‘자연’을 대변한다고 여겨지는 유약하고 감상적인 여인에 대한 예찬은 대개 환상과 상징적 구조물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남성들은 살과 뼈를 지닌 현실의 여성이 아닌 이 환상적 여성상에 그들의 욕망을 투사하기 시작했다.
포르노그라피와 매춘관광
오늘날 폭력과 욕망, 동경과 환상 간의 관련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포르노그라피이다. 포르노그라피는 남성들에게 여성의 육체에 대한 이미지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조각조각 나뉜 육체의 선택된 일부를 보여준다. 그들의 욕망은 현실의 살아 있는 여성은 물론 아니고 한사람의 여성 전부도 아닌 이 조각들에 집중되어 있다. 동시에 이들 이미지는 이 육체와 남성의 관계를 특징짓는 폭력을 반영한다. 폭력과 욕망을 들이미는 이러한 포르노그라피적인 시선이 수많은 상업광고, 쏟아지는 잡지와 비디오와 텔레비전, 영화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경제성장은 포르노그라피적 시선에 기댄 이러한 종류의 광고에 점점 더 의존하는 것 같다. 자연에 대한 동경과 마찬가지로 해체되고 벌거벗은 여성의 육체에 대한 이 열망 역시 전적으로 소비주의적인 것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서는 충족될 수 없으며 생명 없는 그림에 대한 반응에 의해서만 충족된다. 흔히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심리활동조차 자기 개인과는 관계도 없는 단순한 시각적 자극-반응 기제로 환원되고 대체된다. 자동판매기가 자동판매기에 반응하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일차원적 이미지가 남성자아를 전혀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춘관광은 욕망과 폭력 간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또다른 예이다. 여기서는 가난 때문에 백인남성에게 봉사해야 하는 ‘이국적’이고 유색인인, 식민지 여성에게로 욕망이 투사한다. 종속되고 식민화된 여성에 대한 욕망은 ‘고귀한 야만인’에 대한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 이 경우 역시 관계는 적극적이고 애정어린 것이 아니라 마르크, 달러, 엔 등의 구매력을 바탕으로 한 소비주의적이고 수동적인 것이다. 이 구매력은 또한 서구와 일본의 노동계급 남성들이 이따금씩 ‘나으리’ 기분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미국 남성들이 매춘관광에 끌리는 이유는 대체로 그들이 경험할 수 있는 남녀간의 주종관계와 권력 때문인 듯하다. 심리학자 베르티 라차는 타이에서 섹스관광을 즐기는 독일남성에 대해 연구했다. 그녀는 남성들이 타이 ‘연인’에게 자신의 숙소를 청소하고 하루종일 먹여주고 노예처럼 봉사하게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섹스는 둘째 문제이고 남성들이 진짜 즐기는 것은 이들 여성에 대한 절대권력이다.
이 성인남성들은 작은 타이 여성들과 있는 동안 ‘크고 강한 남자’라는 자아 이미지에서 벗어나 서구 백인 가부장제문명에서 억압되고 부정되고 제거된 것들에 탐닉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이러한 퇴행적 욕구를 마음껏 충족시켜줄 이국적인 식민지 여성을 찾아 지구의 절반이나 되는 여행도 불사하는 것이다. 카탈로그를 보고 필리핀 신부를 주문하거나, 타이, 케냐, 도미니카공화국으로 섹스관광을 떠나는 남성들은 대부분 여성과 진정 인간적이고 평등하며 성숙하고 애정어린 관계를 맺을 수 없고, 오직 그들에게 복종하는 여성,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약자이며 그들의 언어를 모르고 전적으로 그들에게 의존하는 여성과만 관계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 같다. 그러한 남성들은 흔히 자신들의 사회에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다. 타이나 필리핀 여성과 결혼한 남자들조차 그들과 진정한 인간적 관계를 맺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 이 글은 독일의 마리아 미스와 인도의 반다나 시바가 공저한 <에코페미니즘>의 10장 백인남성의 딜레마를 옮긴 것이다. 마리아 미스는 쾰른대학의 사회학교수이며 오랫동안 여성, 환경, 제3세계운동을 해 왔고, 반다나 시바는 핵물리학을 공부하다가 환경운동에 뛰어든 물리학자이다. 이 책의 제목은 에코페미니즘이지만 단지 환경과 여성문제에 국한되지 않는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고 있다.
*** 나머지 내용은 첨부한 자료를 참고하셔요
1. 백인남성의 딜레마 : 자기가 파괴한 것에 대한 추구
산업화된 북의 도시중심지에서는 때때로 기묘한 집단행동이 목격된다. 분명히 도시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진보와 근대성의 정점이라 보는 사람들, 도시가 ‘삶’과 자유와 문화의 중심인 사람들이 기회만 있으면 그 도시로부터 빠져나가려 한다. ‘자연’, ‘황야’, 남의 ‘저개발국’ 등 백인남성들이 바라건대 아직은 자신들이 ‘침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지역으로 떠나는 것이다. 원래 이러한 집단대이동의 목표지는 에스파냐, 이탈리아, 그리스, 튀니지의 해변과 더 뒤엔 터키의 해변이었으며, 이따금씩은 자기 나라 안의 ‘안망쳐진’ 시골이었다. 그러나 값싼 대중관광의 등장과 함께 우리는 점점 더 ‘모험’여행과 관광을 떠나라는 매체의 부추김을 받게 된다. 필리핀, 말레이시아, 파푸아뉴기니, 아마존 등지의 ‘동굴부족’ ‘식인종’ ‘야만인 인간사냥꾼’ ‘석기시대 사람들’을 보러 떠나라는 것이다. 15,6세기의 탐험가와 해적들처럼 풍요로운 20세기 말의 사람들도 초기 ‘발견자’들의 도전을 경험하고 자연과 교류하도록 그리하여 마치 갑자기 존 웨인이 된 것처럼 느껴 보도록 부추김을 받는다. 남자란 ‘거친 자연’에 맞설 때 다시금 진짜 남자로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처녀’지에 뚫고 들어가 그것을 오늘날 관광과 화폐경제를 의미하는 백인문명에 개방시키고 싶어 한다.
풍요 속의 절망
그렇다면 여기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자신의 문명과 자연에 대한 지배와 통제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여가시간을 이 아름다운 현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내려 한다. 왜? 이 향수병, 이 손대지 않은 자연에 대한 추구는 무엇 때문인가? 근대성의 정점인 백인문명이 궁극적으로는 ‘겉포장만 그럴듯한 사막’이기 때문일까? 이 도시문명이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오히려 그것은 풍요의 와중에서 깊은 불안감, 심지어 절망과 결핍감을 자아낸다. 슈퍼마켓 선반에 상품들이 더 많이 쌓이면 쌓일수록 절망은 깊어지며, 부재한 그러나 충족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꼭 있어야 할 기본적인 요소에 대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욕망은 더욱 커진다.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다. 여기에는 또다른 측면이 있다.
이러한 열망, 이러한 자연에 대한 욕망은 우리 주변에 있는 자연, 심지어 도시에까지 있거나 우리가 그 일부를 이루고 있는 자연으로 향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백인남성에 의해 명백히 외부라 규정된 자연, 즉 식민지이며 후진적이고 이국적이며 멀고 위험하다고 규정된 자연, 아시아나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자연에 고착되어 있다. 이곳의 자연은 백인문명의 ‘후배지’이다. 이곳은 이상화되고 비현실적인 자연이며, D. H. 로렌스가 말한 ‘머릿속의 섹스’처럼 ‘머릿속의 자연’이다. 시골 전원에 대한 향수도 마찬가지 현상이다. 18세기 이래 자연, 도시 주변의 시골 지역, 농민의 땅은 그저 도시의 후배지로 변형되거나 심미적인 경험 즉 낭만적 정경으로 인식되어왔다. 국외의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도시주민들이 먹을 식량을 재배하는 시골땅도 산업화된 농업에 의해 무자비하게 착취되고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처럼 후진적이고 이윤 없다 하여 평가절하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땅은 도시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몇 세대 전에 도시 노동자가 보통 휴일에 그랬듯이 밭에 나가 일손을 도움으로써 이런 감정을 해소하려는 사람은 없다. 전에는 노동자 가족들이 시골 마을의 집으로 가서 농사일을 거들었다. 지금도 몇몇 어른들은 자신의 가족농장이나 시골마을에서 보낸 휴가를 향수에 젖어 회고한다. 그러나 오늘날 관광객들은 순전히 소비주의적 방식으로, 화랑이나 극장에 갔을 때처럼 행위자가 아닌 관람자로 자연과 풍경을 경험하길 바란다. 이는 이전 시대 사람들보다 이러한 경험을 살 수 있을 만큼 돈이 많아졌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들이 땅과 맺는 관계는 머나먼 이국과의 관계처럼 생산적인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들은 자연과 땅을 상품으로 소비하고 다른 상품을 소비할 때처럼 쓰레기더미만을 남긴다. 그러므로 그들이 소비주의 관광을 통해 충족시키고자 하는 이 열망의 결과는 자신들이 동경하는 것을 파괴하기이다.
폭력과 욕망
현대인들-현대 남성들-을 위한 제3의 공간은 여성, 엄밀히 말해서 여성의 육체이다. 여성의 육체는 대다수 남성의 욕망이 투사되는 스크린이다. 이 ‘제3의 식민지’를 자세히 고찰해보면 아마 자연의 파괴와 이 동경 간의 상호연관성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관련성을 분석하기 전에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남성과 자연, 남성과 여성 간의 양극화된 관계의 역사에 관한 한 우리는 유럽에서 행해졌던 마녀사냥이란 이름의 여성대학살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 사건은 근대 계몽주의시대의 개막으로 찬양되는 바로 그 세기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계몽주의시대, 18세기까지 계속된 여성에 대한 이 폭력의 향연 이후, 18세기 문학과 예술에는 ‘여성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동경, 여성을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것과 일치시키는 새로운 동경이 등장한다. 진정으로 생기있고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들이 육체적으로 파괴되고 제거된 후에야 새로운 부르주아계급의 남성들이 여성성에 대한 새로운 낭만적 이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듯하다. 이 이상에서는 약하고 순종적이고 감상적인 여성, ‘부양자이자 보호자’인 남성에게 의지하는 여성, 이성의 세계가 아니라 감성의 세계를 대표하는 여성들이 주역을 맡는다. 실라 로우보담의 말처럼 19세기 내내 그리고 심지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성성에 대한 이런 낭만적 이상은 남성들의 갈망을 위한 ‘욕망공간’이었고 아직까지도 남녀관계를 대체로 규정하고 있다. 이 이상적 여성상은 자본축적을 위해 세계를 정복하여 식민지로 만들기 시작한 강하고 진취적인 부르주아 백인남성에게 꼭 필요한 보조품이었다. 더구나 이 ‘이성적 남성’에 대비되어 ‘자연’을 대변한다고 여겨지는 유약하고 감상적인 여인에 대한 예찬은 대개 환상과 상징적 구조물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남성들은 살과 뼈를 지닌 현실의 여성이 아닌 이 환상적 여성상에 그들의 욕망을 투사하기 시작했다.
포르노그라피와 매춘관광
오늘날 폭력과 욕망, 동경과 환상 간의 관련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포르노그라피이다. 포르노그라피는 남성들에게 여성의 육체에 대한 이미지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조각조각 나뉜 육체의 선택된 일부를 보여준다. 그들의 욕망은 현실의 살아 있는 여성은 물론 아니고 한사람의 여성 전부도 아닌 이 조각들에 집중되어 있다. 동시에 이들 이미지는 이 육체와 남성의 관계를 특징짓는 폭력을 반영한다. 폭력과 욕망을 들이미는 이러한 포르노그라피적인 시선이 수많은 상업광고, 쏟아지는 잡지와 비디오와 텔레비전, 영화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경제성장은 포르노그라피적 시선에 기댄 이러한 종류의 광고에 점점 더 의존하는 것 같다. 자연에 대한 동경과 마찬가지로 해체되고 벌거벗은 여성의 육체에 대한 이 열망 역시 전적으로 소비주의적인 것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서는 충족될 수 없으며 생명 없는 그림에 대한 반응에 의해서만 충족된다. 흔히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심리활동조차 자기 개인과는 관계도 없는 단순한 시각적 자극-반응 기제로 환원되고 대체된다. 자동판매기가 자동판매기에 반응하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일차원적 이미지가 남성자아를 전혀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춘관광은 욕망과 폭력 간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또다른 예이다. 여기서는 가난 때문에 백인남성에게 봉사해야 하는 ‘이국적’이고 유색인인, 식민지 여성에게로 욕망이 투사한다. 종속되고 식민화된 여성에 대한 욕망은 ‘고귀한 야만인’에 대한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 이 경우 역시 관계는 적극적이고 애정어린 것이 아니라 마르크, 달러, 엔 등의 구매력을 바탕으로 한 소비주의적이고 수동적인 것이다. 이 구매력은 또한 서구와 일본의 노동계급 남성들이 이따금씩 ‘나으리’ 기분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미국 남성들이 매춘관광에 끌리는 이유는 대체로 그들이 경험할 수 있는 남녀간의 주종관계와 권력 때문인 듯하다. 심리학자 베르티 라차는 타이에서 섹스관광을 즐기는 독일남성에 대해 연구했다. 그녀는 남성들이 타이 ‘연인’에게 자신의 숙소를 청소하고 하루종일 먹여주고 노예처럼 봉사하게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섹스는 둘째 문제이고 남성들이 진짜 즐기는 것은 이들 여성에 대한 절대권력이다.
이 성인남성들은 작은 타이 여성들과 있는 동안 ‘크고 강한 남자’라는 자아 이미지에서 벗어나 서구 백인 가부장제문명에서 억압되고 부정되고 제거된 것들에 탐닉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이러한 퇴행적 욕구를 마음껏 충족시켜줄 이국적인 식민지 여성을 찾아 지구의 절반이나 되는 여행도 불사하는 것이다. 카탈로그를 보고 필리핀 신부를 주문하거나, 타이, 케냐, 도미니카공화국으로 섹스관광을 떠나는 남성들은 대부분 여성과 진정 인간적이고 평등하며 성숙하고 애정어린 관계를 맺을 수 없고, 오직 그들에게 복종하는 여성,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약자이며 그들의 언어를 모르고 전적으로 그들에게 의존하는 여성과만 관계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 같다. 그러한 남성들은 흔히 자신들의 사회에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다. 타이나 필리핀 여성과 결혼한 남자들조차 그들과 진정한 인간적 관계를 맺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 이 글은 독일의 마리아 미스와 인도의 반다나 시바가 공저한 <에코페미니즘>의 10장 백인남성의 딜레마를 옮긴 것이다. 마리아 미스는 쾰른대학의 사회학교수이며 오랫동안 여성, 환경, 제3세계운동을 해 왔고, 반다나 시바는 핵물리학을 공부하다가 환경운동에 뛰어든 물리학자이다. 이 책의 제목은 에코페미니즘이지만 단지 환경과 여성문제에 국한되지 않는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고 있다.
*** 나머지 내용은 첨부한 자료를 참고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