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초상 세상읽기  


                        출전 http://blog.naver.com/caujun/60036222452

시대의 초상

- '무한경쟁' 시대에 대한 단상


한미 FTA가 결국 타결되었고 이제 양국 의회의 비준만을 남겨두고 있다. 국민들 중 한쪽이 분신을 해가면서까지 반대했던 일을 이 정부는 언제나 그랬듯이 뚝심있게 밀어부쳤다. 노대통령과 정부가 절반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협정을 추진하면서 국민들에게 해오고 있는 선전은 이런 것이다. "이제 우리는 개혁과 경쟁의 길에 들어섰다. 중국이 우리를 좇아오고 있다. 세계화 시대의 무한경쟁에서 승리하려면 문을 열어야 한다. 잘 안되는 산업은 과감히 포기하고, 잘 되는 것을 밀어부치고, 국민 개개인이 부가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우리는 저력이 있다. 반드시 승리한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무한경쟁 시대에 들어섰으니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살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21세기 한국의 국가철학이다. 마치 전쟁터에서 돌진하기를 두려워하는 병사들에게 장교가 돌진을 독려하는 것과도 같다. 문제는 병사들은 나가면 총에 맞아 죽는데, 장교들은 참호 뒤에 숨어 있는 것과도 같은 형국이라는 점이다. 농민과 자영 서비스업자들과 같은 힘없는 병사들은 구식총으로 벌벌 떠는데도, 신식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거대자본은 전투에서의 승리를 위해 병사들을 무조건 적지로 내보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세상은 전쟁이니 무조건 전쟁에 대비해야 한단다. 자신이 먼저 죽으면서 돌진을 말한다면 먹히기라도 하련만.

  대통령부터 나서서 떠들고 이제 많은 사람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는 '무한경쟁 시대'라는 말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표현인가? 사람들을 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공포를 조장하는 것이다. 기업은 흑자든 적자든 상관없이 경쟁자들이 몰려온다며 사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 한다. 사장은 외국인 노동자에게 한번만 더 말 안들으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한다. 선생은 학생에게 대학 못가면 삼류인생이 된다고 한다. 이승만에서부터 노무현까지 한국의 모든 대통령은 공포를 조장하면서 정당성을 유지해왔다. 북한이 쳐들어온다고, 간첩이 우리 사이에 있다고, 서울이 물에 잠긴다고, 대학생들이 빨갱이라고, 데모하면 나라망한다고, 그러더니 이제는 중국이 좇아온다고 한다. 할아버지 때는 왜놈이 좇아왔고, 아버지 때는 북한이 좇아왔고, 이제는 중국이 좇아오고, 앞으로는 세계 전체가 우리를 좇아오는 시대가 된다고 한다. 그런 공포로 국민을 무섭게 만들면서 정부는 독재도 했고, 부정축재도 했고, 사람도 죽였고, 이제는 우리를 무조건 뛰게 만든다. 무엇보다 공포는 한국인들의 얼굴에서 웃음과 여유를 앗아갔다.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장 작은 친절도 베풀지 않는 무서운 사람들이 된 것이다. 2만 달러 시대가 되었지만 실제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만큼 행복한가? 2만 달러를 벌어도 그 돈을 쓸 여유도 없이 3만 달러를 벌기 위해 또 뛰어야 하는 것 아닌가?      

  무한경쟁의 시대가 왔다는 말은, 신자유주의를 한다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기업이 돈 잘벌게 문을 다 연다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감수하자는 말이다. 무한경쟁의 시대라는 말은 '인간성'은 접어두자는 말이다. 어떻게든 경쟁을 해서 이겨보자는 말이다. 군대나 학교에서 병사와 아이들을 '전쟁기계', '공부기계'로 만들기 위해 쓰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서로 경쟁자로 만들고, 때려 죽이고 싶은 주적을 만들고, 그래서 서로 경쟁하게 해서 그 중에 살아남는 자들에게만 상을 주는 것이다. 바로 그 일을 정부가 하고 있다. 능력이 없고, 돈이 없고, 못생기고(!), 빽이 없어서 힘들게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우리가 함께 도우면서 같이 다 잘 살아보자고 하는 게 아니라, 무한경쟁 시대니 어떻게든 싸워서 이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가 떨어지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무한경쟁의 시대에는 그래서 어떻게든 '주류'에 들어야 하고, 어떻게든 '일류'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삶은 인정받지 못한다. 그래서 무한경쟁의 시대에는 죽음도 많을 수밖에 없다. 서울대에 못가서 자살하고, 취직을 못해서 자살하고, 성형수술하다 죽고, 다이어트를 하다 죽는 사람들은 이런 시대에 나올 수밖에 없다. 주류에 끼지 못한 왕따가 생기고, 그 아이들이 맞아 죽고, 성폭행 당해 죽고, 화가 나서 다른 사람들을 다시 죽이고, 부자들을 골라서 죽이고, 자기를 안아주지 않은 여자들을 죽인다. 가장 긍정적인 에너지로 넘치는 것 같은 시대는 가장 비참한 죽음으로 넘쳐나게 된다.

무한경쟁의 시대는 '가치'나 '이익'이라는 말이 어디든 쓰이게 되는 시대다. 영화매출이 자동차 수출로 이야기되고, 연예인의 인기가 '몸값'으로 계산되고, 노동자의 삶이 회사의 이윤과 하나가 되고, 학생의 젊음이 성적과 한 단어가 된다. 전쟁터의 병사들이 이름이 아닌 계급으로 불리는 것과 같다. 이익이 최고가 되는 시대에 인간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창출하는 '가치'다. 그래서 쓸모 없는 사람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다. 너는 짤리면 끝인거다. 사람은 값으로 환산되기에 사람이 물건처럼 된다. 명품은 소중히 다뤄지듯이 얼짱이나 몸짱이나 의사나 변호사나 서울대학생이나 삼성회사원은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택시기사나 삼겹살집 점원이나 미화원이나 구멍가게 주인이나 구걸하는 노숙자는 함부로 대한다. 어떤 이는 무조건 '선생님'이고 어떤 이는 무조건 '아저씨/아줌마'거나 '언니', 그도 아니면 '야', '어이'가 된다. 함부로 취급당하는 사람들이기에 자신이 '갑'이 되는 자리에 가면 다른 이들을 함부로 취급해야 마음이 놓인다. 그러다보니 서로가 서로를 함부로 취급하는 사회가 된다. <아찔한 소개팅>과 같은 프로그램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초상화다. 킹카 혹은 퀸카가 자신과 커플이 되기 위해 '도전'(!)하는 5-6명의 이성들과 만나다가 하나씩 하나씩 무조건 탈락시킨다는 컨셉의 방송이다. 이 방송의 구조는 '킹카'와 '도전자'라는 말에 이미 드러나있다. 킹카는 원래 잘난 사람이니 그대로 있고, 그와 사귀고 싶으면 경쟁을 하고 도전을 해야 하며, 킹카는 자기 맘대로 룰을 정해서 도전자들을 시험하다가 맘에 안들면 그냥 벨을 누르면 끝이다. 굴욕을 참으며 도전을 하다가 탈락이 된 사람들은 그 순간부터 다른 도전자들과 킹카를 '씹어'댄다. 킹카/도전자, 구애/비방, 사랑/돈의 이항대립이 점철되어 있는 형국은 사람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승리한 자가 모든 것을 다 가지는 무한경쟁시대의 우리 인간관계를 그대로 닮아있다. 이 프로그램을 보는 일 자체가 '아찔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정부가 그렇게 염원하는, 아니 이미 우리에게 일상이 되어 있는 '무한경쟁시대'는 한미 FTA를 통해 한층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그 시대는, 이미 지금이 그렇듯, 한번 낙오하면 도태되는 시대, 일등이 되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시대, 서로가 서로를 함부로 하는 시대, 인간이 값으로 환산되는 시대이다. 이 시대는 이미 가진 자들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하고, 덜 가진 자들을 뛰게 만들고, 못 가진 자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시대다. 이 시대는 그래서 가진 자들이 더 가지게 되고, 없는 자들이 더 없어지게 되는 시대다. 이쪽 끝과 저쪽 끝이 극명한 시대다. 그래서 서로서로가 아니라 끼리끼리 놀고 협력하는 시대다. 그 끼리끼리에 들어가기 위해 자식을 갈구고, 밤새 공부하고, 몸이라도 갖다 바쳐야 하는 그런 시대다. 이 시대는 그래서 가장 부유한 시대이면서 가장 가난한 시대고, 가장 세련된 시대이면서 가장 야만의 시대고, 가장 재밌으면서 가장 아찔한 시대고, 가장 빛나는 시대이면서 가장 어두운 시대고, 가장 평화로운 시대이면서 가장 전쟁같은 시대고, 가장 살아있는 시대이면서 가장 죽어있는 시대다. 당신이 어느 쪽에 낄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이 시대는 불안과 초조의 시대이고, 불면의 시대다. 이런 시대를 만들자고 대통령까지 나서는 이 시대는 프로파간다의 시대고, 그래서 모두가 다 속아 넘어가는 시대다. 이 분열과 역설 속에서 미치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하는, 낙오하지 않으려면 전사가 돼야하는, '한국인'인 것이 참, 무서운 시대다.  (04/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