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은 무엇으로 사는가?

― 한국사회의 1등 이데올로기  

                                              문강형준 / 무크지 <모색> 편집위원



1등이 판을 친다. “내 아이는 최고로 키우고 싶”은 어머니는 아이 머리에 좋은 분유를 먹이고, 초등학교 때부터 학원과 과외를 섭렵한 아이들은 1등 학교 서울대학에 들어가고, 대학 졸업을 앞둔 학생들은 1등 재벌 삼성에 들어가길 선망한다. “대한민국 1%”를 위해 지어졌다는 고급 아파트와 “성공한 그 분을 위한” 승용차가 등장하고, <조선일보>는 스스로를 ‘1등 신문’이라 칭하더니, 이제 <Top Class>라는 잡지에는 1등 재벌의 1등 승계자까지 표지에 등장한다. 대학 졸업식이 끝나면 전체수석들이 잡지표지에 실리고, 수능이 끝나면 1등의 공부법이 소개되며, 올림픽 기간에는 온통 금메달 사진과 기사가 신문을 장식한다. 1등은 좋은 것이고, 1등에게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고 본받을 만 하다는 것은 이제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상식이 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중고등학교에서는 1등 대학 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학생들을 쥐어 패고, 국가대표 코치들은 우승을 위해 선수들에게 손찌검을 한다. 바야흐로, 모두가 1등을 위해 미쳐 돌아가는 형국이다.



우리 사회에서 1등, 우승, 금메달, 수석, 1% 등과 같은 단어들이 다른 모든 가치들을 압도하는 현상은 ‘뛰어나고 싶고, 이기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라는 미심쩍은 표현으로는 도저히 설명하기 힘든 병적 집착에 가깝다. 이런 ‘1등 의식’의 바탕에는 남들을 누르고 최고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한국 사회의 전쟁 같은 삶이 놓여있다. 끝없이 커져만 가는 불안과 위기 속에서 남부럽지 않은 교육과 직장과 주택을 얻으려면 우리는 뒤돌아보지 않고 끊임없이 뛰어야만 하는 것이다. 출근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신도림 역 계단을 우르르 달려 닫히는 전철문 속으로 들어가려는 우리들의 아침풍경은 우리 삶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혹은 죽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동력은 바로 이렇게 1등을 위해 열심히 뛰는 우리 자신, 즉 노동자들이다. 자본주의는 이윤의 창출과 선순환을 위해 밤새도록 돌아가야만 하는 기계와도 같고, 그 기계를 돌리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자연의 시간에 맞춰 들판에서 노동을 하고, 자신의 작업장에서 물건을 만들며 살았던 사람들은 여유로웠지만, 근대 산업자본주의가 들어선 3백년 남짓한 시간동안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의 속도를 끝없이 돌아가는 기계의 리듬으로 단련시켜왔다. ‘경쟁이 효율을 낳는다’거나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지만 재화는 유한하다’거나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식의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지고, 이러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어려서부터 교육받은(우등상, 금장, 1등상) 사람들은 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삶과 자연의 법칙인 것으로 알고 살게 된다. 하지만 돌아보라. 도대체 그 어떤 식물이 1등으로 열매를 맺으려 하고, 그 어떤 동물이 단지 1등이 되기 위해 먹을 것을 마련하고도 하루 종일 뛰는가. 자본가가 자신의 이윤을 위해 노동자를 현혹하고, 지배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국민들을 정신없게 만들며, 선진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후진국들을 자신들의 거래시스템 속으로 들어오게 만들기 위해 조장하는 것, 그것이 곧 1등 이데올로기이고, 경제발전론이며, 글로벌 스탠더드고, 세계화 담론의 실체다.



이러한 설명은 얼핏 투박한 음모론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도대체 1등은 누가 하는지를 찬찬히 살펴보라. 강남(서울의 1등지구)의 박사학위 이상 전문직 부모를 둔 가정의 자녀는 읍내에 사는 농민자녀보다 수능점수가 44점 가량 높고, 월소득 500만원 이상 가정의 자녀가 월소득 300만원 미만 가정의 자녀보다 수능점수가 30점 가량 높으며, 서울대 신입생 출신가정은 중산층 이상이 압도적이고, 1등 기업 삼성의 58%가 서울대 출신이고, 1등 신문 <조선일보> 기자의 다수가 서울대를 비롯한 소위 일류대학 출신이다. 한국 대학 교수의 70%가 전세계의 1등인 미국 박사출신이고, 그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외국인 수 1위도 한국의 서울대다. 1등이 1등을 만들고, 상류층이 상류층을 만들고, 선진국이 개도국의 최고 엘리트를 만들어낸다. 이번에 밝혀진 도청사건의 주인공, 98년 대선의 블랙트리오 이회창과 홍석현과 삼성 역시 우리나라 1등들(서울대, 판검사, 삼성, 조선, 중앙)의 얽히고설킨 거래관계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1등이 되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고, 경쟁을 위한 출발선의 위치는 너무도 불평등하다.



1등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정해져 있는 시스템 속에서 모두가 뛰어드는 1등 경쟁, 국민 전체를 호출하는 1등 이데올로기는 더러운 허구다. 누구나 1등이 될 수 있다는 환상을 모두에게 심었을 때, 비로소 그 때 지배계급은 마음 놓고 자기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것이다. 사회자의 구령에 따라 청중들이 박수경쟁을 벌일 때 1등이 되는 청중들이 가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바로 그 1등 경쟁으로 인해 사회자가 청중을 한순간에 장악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경제를 살리자는 말에 혹해 너도나도 ‘1인 기업’이 되어 뛸 때, 최대의 이윤을 얻으면서 국가를 좌지우지 하는 것은 한줌도 안 되는 재벌과 그 소유자들이 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영화 <아일랜드>에서 클론들은 일생을 편히 보낼 ‘섬’에 가는 행운에 당첨되는 것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살지만, 그 ‘섬’에 당첨되는 날 그들의 장기는 적출되어 부자들에게 팔려나간다. 클론을 만들어낸 자본가는 이렇게 ‘환상’을 심어주고 ‘1등 당첨’을 축하하면서 조용히 자신의 이윤을 챙긴다. 언젠가 서울대에 가면, 삼성에 가면, 타워팰리스에 살고, 선진국이 되면 삶도 나아질 거라 믿는 우리들은 이 불쌍한 클론들과 얼마나 다른가. 도대체 우리 힘든 노동의 대가는 누구에게 가기에 빈부격차는 극대화되고 우리는 일할수록 더 가난해지는가. <아일랜드>에서 자본가의 음모를 드러내고 회사를 파괴하는 주인공은 ‘환상의 섬’으로의 당첨제도를 의심하고, 음식통제와 유니폼을 싫어했던 평범한 인물이다. 모두가 1등이 될 수 있을 것 같이 조작된 우리네 환상의 섬, 그러나 우리 노동에서 나온 과실을 특정한 사람들만이 차지하는 야만적 사회를 모두가 인간답게 잘사는 평화로운 세상으로 되돌릴 사람 역시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면서 기존 시스템을 의심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일 것이다. 모두가 자연스럽다고 믿는 시스템과 진리를 의심하는 평범한 당신의 머리 속 바로 그곳에서, 세상은 서서히 균열을 내기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