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7- 물위의 도시, 베네치아

거의 열 두 시간을 꼼짝없이 누워서 베네치아에 왔다. 그런데 산타루치아역을 나오는 순간, 눈앞이 시원해지고 가슴이 탁 트였다. 바로 앞에서 출렁이는 물 위로 온갖 모양의 배들이 흔들리며 지나갔다. 베니스, 베네치아. 멋있었다. 지금까지의 도시들과 전혀 다른 낯설고도 설레는 느낌이었다.
도시 전체에 차가 없는 경이로운 곳, S자 형으로 굽은 운하를 따라 바뽀레또라 부르는 배를 타고 다닌다. 호텔에 짐을 맡겨놓고 산모로코 사원으로 가기위해 바뽀레또를 탔다. 배는 마치 버스처럼 정류장에 서고 떠나고 하면서 운하를 빙 돌아 역에 닿았다. 운하 양 쪽으로는 집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모두 바닥까지 물이 찰랑거렸다. 문 앞에는 우리네 자동차처럼 배가 한 척씩 줄에 매달려 있었다.
산 모로코 사원, 배가 닿은 곳에서 모퉁이를 돌자마자 장대하게 펼쳐진 광장과 긴 회랑, 그리고 높지는 않으나 무척 엄숙하고 장중해 보이는 사원은 아름다웠다. 광장은 사람과 비둘기들이 한데 섞여 무척 복잡했다. 비둘기를 몹시 싫어하는 딸은 질겁을 하며 광장을 비켜 회랑쪽으로 나를 끌고 갔다. 사원의 끝에는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해를 볼 수 없었다는 탄식의 다리도 있었다. 생각보다 짧고 단순해서 실망이 되긴 했지만.
구름다리 위에서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니 화창한 햇볕아래 뻥 뚤린 바다가 있고 그 바다 저편에 거대한 건축물이 보였다. 지도를 찾아보니 둘 다 성당이다.  푸른 물결 위에 세워진 것처럼 아름다웠다. 바뽀레또를 타고 가면 들어갈 수 있겠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아 그냥 한 폭의 그림처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사원의 한 귀퉁이,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카페에서는 피아노 소리가 들리고 많은 사람들이 카페 밖 자리에 까지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너무 복잡해 보여 다음날 들러 보기로 하고 회랑을 한 바퀴 돌았다. 베네치아의 특산물인 듯, 유리로 만든 아름다운 물건들과 수예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딸은 친구들에게 줄 거라며 크고 작은 가면 모양의 브로우치를 여러 개 골랐다.  
비엔나에서도 굳건하게 지켰던 나의 의지가 이곳의 가방가게 앞에서 무너졌다. 아주 비싼 명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른 곳보다 훨씬 더 싸서 가방도 하나 사고 지갑도 하나 샀다. 커다란 쇼핑백을 어깨에 걸고 돌아다니다 기차에서 함께 탔던 청년을 보았다. 사진기를 들고 무언가 열심히 찍고 있었다. 아는 척을 할까하다가 딸이 잡아당기는 바람에 그냥 돌아섰다.
밤새 기차에서 시달려 그런지 몸과 생각이  따로 노는 듯 무얼 먹어도, 무얼 봐도 종일 몽롱했다. 생각해 보니 이틀 동안 세수도 못하고 다녔던 터라 일찍 숙소로 돌아왔다.
몹시 피곤했는데도 잠이 통 오지 않아 뒤척이다 늦잠을 잤다. 늦잠이라고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니고 이 호텔도 아침밥을 주지 않으니 시간을 맞출 필요가 없어 마냥 뒹굴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씻고 밖으로 나갔다. 일상을 벗어나 낯선 세계로 떠나 왔지만 이 또한 반복되는 일상이다. 어디 출근하는 사람마냥 일어나 단장을 마치면 어디론가 가서 돌아다니다 저녁이면 들어와 잠을 잔다. 그런데 새로운 풍광을 만나는 일은 즐거우나 뜻밖에 지루함도 함께 따라다닌다. 생산과는 거리가 먼 소비만 있는 일상, 풍경만 있고 사람과의 교류가 없는 생활은 사람을 쉽게 지치게 하는 것 같다.
이번에는 걸어서 다녀 볼까하고 산타루치아 역 앞의 다리를 건너갔다. 골목을 들어서자 사방이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길 천지였다. 겁많은 우리 모녀는 조금 가다가 자신이 없어 되돌아 나와 바뽀레또를 타고 사원 앞에 내렸다. 그곳을 기점으로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건물 모퉁이에 붙은 이정표를 보며 골목을 돌아다녔다. 막다른 골목 같았는데 돌아서면 조그만 광장이 나오고 예쁜 가게들이 있고, 길이 있을 것 같아 돌아가면 물이 찰랑이는 소운하가 나왔다. 혼란스럽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오이같이 생긴 곤돌라가 줄을 지어 소운하를 다녔다. 일행이 여럿이면 한번 타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단 둘이 타기에는 멋쩍은 듯해서 남이 타는 것을 구경만 했다.
어제 눈여겨 봐둔 광장의 카페에 갔는데 무슨 일인지 조용했다. 음악도 없고 카페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우리가 문 앞을 왔다 갔다 하니 종업원이 나와서 들어오라 했다. 커피는 비싸기만 했지 맛은 그저 그랬다. 나는 카푸치노, 딸은 에스프레소를 시켰는데 에스프레소를 내 앞에 놓았다. 여행 내내 그랬다. 물건을 살 때나 길을 물을 때나 언제나 우리 딸이 말을 하는데도 대답하는 사람은 한결같이 나를 보고 말했다. 딸이 화장도 하지 않고 머리를 질끈 묶고 다녀서 많이 어리게 본 듯 했다. 나는 대강 알아듣긴 해도 말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게 되니 좀 무안한 일이었다.
이골목, 저골목 가다보니 리얄토 다리가 나왔다. 산모로코 광장에서 어느 골목을 헤매도 가다보면 이 다리가 나오게 되어 있었다. 대운하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다리는 수도 없이 많았는데 이 다리가 가장 유명한 듯 했다. 책에는 몹시 우아한 모습이라고 했는데 직접 보니 그저 그렇다. 우선 다리의 길이가 짧고 다리 위에는 가게들이 지저분하게 늘어서 있었다. 다리 아래쪽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점심겸 저녁을 먹었다. 골라먹는 뷔페라 딸이 따뜻한 라쟈냐와 피자 따위를 가져와서 먹었는데 아주 맛있었다.  
이 아기자기한 도시에서는 괜히 즐거웠다. 우선 날씨가 맑아 파란 하늘과 빛나는 해를 볼 수 있었고 작은 도시에 관광객이 많아서 인지 제각기 바쁜 듯 서로 신경쓰지 않아 좋았다. 좁은 골목을 돌다가 같은 사람을 몇 번씩 보게 되는 일도 재미있었고 가게마다 점심시간에는 문을 닫는데 무려 서너 시간씩 되는 것도 우스웠다. 그리고 음식도 맛났고 물 위를 오가는 배와 그 배를 타고 가면서 보는 그림같은 풍경이 오래 봐도 좋았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피렌체행 기차표를 예매했다. 베네치아를 시작으로 이탈리아 반도에 점을 찍기 시작했는데 즐거운 날들이 될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여행기 8 - 피렌체, 비 젖은 아르노 강변

비엔나는 춥더니 베네치아, 피렌체로 가면서 날씨가 점점 따뜻해 졌다. 지중해의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 마치 가을같은 날씨였다. 차창을 스쳐 지나가는 집들도 동유럽의 뾰족지붕이 아니라 경사가 훨씬 완만한 것이 우리나라의 지붕과 비슷했다. 들판에는 초록빛도 드문드문 보였다.
베네치아에서 기차로 세 시간 정도 걸려 늦은 오후에 피렌체에 도착했다. 역을 나오니 여기도 어둡고 우중충한 거리에 사람과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뒤섞여 정신이 없었다. 비까지 질금질금 내리는 거리를 가방을 끌고 한참을 걸어 호텔에 들어섰다.
이곳을 떠날 때까지 도무지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8일부터 12일 까지 -우리가 이곳에 있을 기간- 피렌체에 무슨 행사가 있는지 방값이 엄청나게 비쌌다. 그걸 알았을 때는 이미 앞, 뒤의 일정을 다 짠 상태라 어쩔 수 없이 싼 방을 찾아 인터넷을 샅샅이 훑어 찾아낸 호텔이었다.
산타마리아노벨라역에서 우리 걸음으로 거의 20분 정도를 걸어 들어간 건물은 우리가 묵었던 호텔 중에서 가장 무례한 곳이었다.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사흘 동안 청소도, 시트, 수건도 갈아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방안에는 반투명 유리로 된 샤워 부스와 세면대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아무리 모녀간이지만 서로 샤워하는 모습을 봐야 하는 게 몹시 민망했다. 어쩜 방을 그렇게 만들어 놨는지...... 화장실은 복도를 나가 공동으로 쓰는 거였는데 가뜩이나 예민한 우리 모녀는 사흘 동안 화장실 때문에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몸과 마음이 몹시 불편한 상태였지만 그나마 음식이 맛있었다. 길가다 들린 그저 그런 레스토랑에서도 괜찮은 음식을 먹을 수가 있었다. 특히 가지와 파프리카를 버터인지 올리브유인지에 구운 듯한 것은 정말 맛나서 몇 번을 먹었는데 이담에 집에 가면 꼭 해 먹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딸은 본젤라또 아이스크림에 반해 날마다 사 먹었다.
두오모는 지붕이 돔으로 되어 있는 성당을 말한다. 이탈리아 대부분의 도시에는 두오모가 있다. 기억에 남는 것은 피렌체의 두오모와 밀라노의 두오모이다. 두 도시가 다 두오모가 시가의 중심에 있고 관광은 물론 쇼핑가도 두오모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피렌체도 작은 도시여서 차를 탈 필요도 없었다. 걷다보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정말 조그만 도시였다. 우리는 많은 것을 빠르게 보려고 욕심을 내지 않았으니 마냥 걸었다. 걸어서 찾아간 두오모는 아름다웠다. 하긴, 신전은 어디서나 다 아름다웠다. 밝고 아름다운 도시에서는 장엄한 모습으로 아름다움을 뽐내고 이곳처럼 우중충하고 좁은 거리에서는 그래서 신전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슬프게 아름답다. 피렌체의 두오모는 단정한 느낌이 드는 건물이었다. 다른 곳처럼 셈세한 조각도 있고 복잡한 장식도 있었지만 그것이 흰색과 녹색의 줄무늬와 잘 어우러져 그런 느낌을 주는 듯 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았는데 역시 소박하고 근엄해서 사원다웠다.
단테가 살았다는 단테의 집을 찾아 갔다. 마침 집 앞 조그만 광장에서 어떤 배우가 비를 맞으면서 1인극을 하고 있었다. 아마 신곡의 한 부분일 거라 생각했는데 목소리가 어찌나 절절한지 한참을 서서 봤다. 또 한참을 가니 갑자기 넓은 광장이 나오고 사방에 엄청난 조각상들이 서 있었다.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도 있었다.
딸은 열심히 사진을 찍고 나는 그저 멍하니 서서 조각들을 감상하고 있는데 우리말이 여기 저기서 들렸다. 비가 오고 있어서 인지 깃발이 아니라 우산을 푯대처럼 배낭에 꽂고 다니는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열심히 설명을 듣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슬며시 그들 옆으로 가서 잠시동안 귀동냥을 했다.
광장 옆 노천 카페는 겨울이라 비닐막을 쳐 놓았다. 그 속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광장의 수많은 조각상과 오가는 관광객들을 바라봤다. 명품로고가 쓰인 쇼핑백을 어깨에 맨 사람도 있고, 카메라로 무언가를 열심히 찍는 사람도 있고 진지한 표정으로 가이드의 우산을 따라 조각상을 쳐다 보는 사람도 있고...... 이탈리아 반도 중간, 이 작은 도시의 무엇이 저 많은 사람들을 불렀을까? 그들이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조상들이 남겨놓은 유산을 보러 저절로 사람들이 와서 돈을 쓰고 가지 않는가. 문득 '피렌체는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오모를 중심으로 방사선 처럼 길이 뻗어 있고 그 길마다 가게들이 있었다. 딸은 들어가도 될 가게와 아예 들어가지도 않을 가게들을 잘도 골라내어 나를 이끌었고 나는 어벙벙한 채로 따라 들어가 구경을 했다.
놀라운 것은 이곳 사람들은 개를 데리고 쇼핑을 했다. 가게 안에 데리고 들어가서 문 옆에 두면 개들은 주인이 볼일을 다 끝내고 나올 때까지 꼼짝도 않고 기다렸다. 작은 개들은 그냥 서서, 큰 개들은 전혀 사람들에게 위협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발을 꿇고 매우 공손한 자세로. 심지어 음식점에도 데리고 들어갔다. 개 두 마리와 같이 살면서 어디 데리고 갈 때 무지하게 스트레스를 받는 나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문 앞에 커다란 개가 있어도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들을 보고도 놀랐지만 무엇보다 개들이 놀라웠다. 유럽 개들은 학교에서 따로 공부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쇼핑거리를 지나자 아르노 강이 나왔다. 피렌체는 이 강을 사이에 두고 둘로 나뉘어져 있다. 아르노 강, 예쁜 이름과는 달리 이 강은 우중충한 물빛과 넓지 않은 강폭, 그저 도시의 한 가운데를 고요히 흐르는 강이다. 양쪽을 이어주는 많은 다리들 가운데 여기도 베키오 다리가 제일 유명하다. 다리 위에 조그만 가게들이 있기 때문이라 했다. 멀리서 볼 때는 그림이 괜찮았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옛날 우리 청계천처럼 몹시 낡고 허술했다.
베키오 다리를 건너면 미켈란젤로 광장이 나온다고 했다. 그곳에 가면 피렌체 시가를 다 내려다 볼 수 있다고 했으니 아마 언덕에 있는 모양이었다. 가 볼까 잠시 망설이다 길을 바꿔 강변을 걷기로 했다. 딸이 그 길에 엔틱 숖이 있다며 나를 끌었기 때문이었는데 고분고분 말을 잘 들은 덕분에 나는 아름다운 풍경을 얻었다.
베키오 다리를 지나 우피치 미술관에 이르는 강변의 긴 회랑은 참 멋졌다. 아르노 강에는 비가 내리고 오가는 사람이 드문 회랑은 비에 젖어 고즈넉했다. 딸과 손을 잡고 그 고요한 길을 걷다보니 회랑 구석 담위에서 한 소녀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동양 소녀 같았는데 피렌체에 와서 그림 공부를 하고 있는 유학생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녀의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나중에 시간이 많이 흘러 기억이 다 잊혀질 즈음 누가 나에게 피렌체가 어땠냐고 물으면 나는 단박에 이 풍경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피렌체에 가거든 아르노 강변의 긴 회랑을 천천히 걸어보라고 말할 것이다. 아마 햇살이 빛나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