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 글쓰기 강의 나눔터
2008.05.28 04:12:41 (*.151.3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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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우리 결혼 할 때도 상견례 했어?"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재벌집과 소시민이 결혼하느라 한바탕 에피소드가 벌어지는 것을 보고 남편이 묻는다.
아득한 기억 저 너머에서 엄마의 야윈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여름이었다. 종로 어느 일식집에서 두 집 부모님이 만났는데 낡은 모시저고리를 입은 엄마가 허수아비처럼 헐렁헐렁해 보였다. 내가 스물 여섯이었으니까 엄마는 쉰 여섯, 뼈다귀만 남은 시골 양반 품위 하나로 일생을 버티어 온 탓이었겠지만 기름기 하나 없는 모습이 만지면 바스라 질 것 같았다. 복사꽃처럼 뽀얗고 오동통한 시어머님과 마주 앉은 엄마가 어찌나 위태로워 보였던지 그 기억만 또렷할 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다 잊었다.
그때, 우리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 형편에 아이들을 대학보낼 생각을 했는지 우리 엄마도 참 대책없이 눈만 높은 사람이었나 싶다. 속곳까지 팔아치우다 시피해서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날마다 애간장을 태웠다. 특히 없는 형편에 딸까지 대학을 보낸다며 주위의 비웃음도 많이 샀다.
큰 오빠는 엄마가 믿을 만큼 힘이 되지 못했고 공부 잘 하고 사려깊어 마음으로 기대었던 작은 오빠가 유학을 떠난 직후여서 엄마가 더 그래 보였을 것이다.
대학 공부만 시켜놓으면 아들, 딸이 집안을 일으키리라 막연하게 기대도 했을 터인데 아들은 더 높은 곳에 뜻을 두고 훌쩍 유학을 떠나 버리고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번듯한 직장을 갖지 못하고 어영부영하다가 결혼해야겠다며 남자를 데려왔으니 엄마 속이 어떠했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허수아비같은 모습의 엄마와 아무것도 없이 큰소리만 치시던 바람잡이 아버지가 상견례를 무사히 치러준 덕에 나는 그 해 초겨울 결혼을 했다. 나는 혼수란 걸 해 가지 못했다. 둘째 올케가 시집올 때 해 온 이불을 그대로 싸서 가져갔다. 접시 하나 사 가지 못했다.
산업체부설학교에 근무하면서 몇 달간 넣었던 적금을 깨니 단돈 오십만원이었다. 그 돈을 봉투에 넣어 시아버님 앞에 내밀며 알아서 해 달라고 했다. 아버님은 두 말 않고 알았다고 하셨고 신혼 방에 넣을 장롱까지 알아서 준비해 주셨다. 그렇게 결혼을 했다. 결혼 후에도 시집살이 하느라, 나 사느라 친정은 그리울 새도 없었다.
말 할 수 없이 쪼그라든 궁핍에도 굴하지 않고 아래 두 동생을 끝까지 공부시킨 우리 엄마는 생각해 보면 거의 초인이다. 무능한 아버지 옆에서도 다섯 자식을 다 잘 키워냈는데 지금은 그 다섯 자식이 어머니 한 분 모시는 게 어떤 때는 힘에 버거우니 자식들이 못났기 짝이 없다.
올해, 여든 하나. 귀가 좀 어두울 뿐 그런 대로 건강하게 잘 지내신다. 아버지 가신 지가 십년째인데 홀로 씩씩하게 사셔서 고마울 뿐이다.
남편이 여전히 드라마에 빠져 떠든다. 평소엔 잘 보지도 않더니 감정이입이 예사롭지 않다.
"어우, 난 저런 자리 쑥쓰러워서 못나갈 것 같아. 여보, 우리 애들 결혼 할 때는 저런 거 하지 말자,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해"
세월이 살같이 흘러 우리 아이들이 어느새 청년들이 되었다. 남편의 걱정처럼 좀 있으면 상견례에 나오랄 지도 모르겠다. 저 어색한 자리에 나를 대입시켜 보니 나도 싫다. 부모란 참 손해보는 자리다. 싫은데도 할 수 없이 해야하는 일이 날마다 생긴다.
그 때 우리 엄마는 얼마나 싫었을까?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드라마를 보면서 속절없이 슬프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재벌집과 소시민이 결혼하느라 한바탕 에피소드가 벌어지는 것을 보고 남편이 묻는다.
아득한 기억 저 너머에서 엄마의 야윈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여름이었다. 종로 어느 일식집에서 두 집 부모님이 만났는데 낡은 모시저고리를 입은 엄마가 허수아비처럼 헐렁헐렁해 보였다. 내가 스물 여섯이었으니까 엄마는 쉰 여섯, 뼈다귀만 남은 시골 양반 품위 하나로 일생을 버티어 온 탓이었겠지만 기름기 하나 없는 모습이 만지면 바스라 질 것 같았다. 복사꽃처럼 뽀얗고 오동통한 시어머님과 마주 앉은 엄마가 어찌나 위태로워 보였던지 그 기억만 또렷할 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다 잊었다.
그때, 우리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 형편에 아이들을 대학보낼 생각을 했는지 우리 엄마도 참 대책없이 눈만 높은 사람이었나 싶다. 속곳까지 팔아치우다 시피해서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날마다 애간장을 태웠다. 특히 없는 형편에 딸까지 대학을 보낸다며 주위의 비웃음도 많이 샀다.
큰 오빠는 엄마가 믿을 만큼 힘이 되지 못했고 공부 잘 하고 사려깊어 마음으로 기대었던 작은 오빠가 유학을 떠난 직후여서 엄마가 더 그래 보였을 것이다.
대학 공부만 시켜놓으면 아들, 딸이 집안을 일으키리라 막연하게 기대도 했을 터인데 아들은 더 높은 곳에 뜻을 두고 훌쩍 유학을 떠나 버리고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번듯한 직장을 갖지 못하고 어영부영하다가 결혼해야겠다며 남자를 데려왔으니 엄마 속이 어떠했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허수아비같은 모습의 엄마와 아무것도 없이 큰소리만 치시던 바람잡이 아버지가 상견례를 무사히 치러준 덕에 나는 그 해 초겨울 결혼을 했다. 나는 혼수란 걸 해 가지 못했다. 둘째 올케가 시집올 때 해 온 이불을 그대로 싸서 가져갔다. 접시 하나 사 가지 못했다.
산업체부설학교에 근무하면서 몇 달간 넣었던 적금을 깨니 단돈 오십만원이었다. 그 돈을 봉투에 넣어 시아버님 앞에 내밀며 알아서 해 달라고 했다. 아버님은 두 말 않고 알았다고 하셨고 신혼 방에 넣을 장롱까지 알아서 준비해 주셨다. 그렇게 결혼을 했다. 결혼 후에도 시집살이 하느라, 나 사느라 친정은 그리울 새도 없었다.
말 할 수 없이 쪼그라든 궁핍에도 굴하지 않고 아래 두 동생을 끝까지 공부시킨 우리 엄마는 생각해 보면 거의 초인이다. 무능한 아버지 옆에서도 다섯 자식을 다 잘 키워냈는데 지금은 그 다섯 자식이 어머니 한 분 모시는 게 어떤 때는 힘에 버거우니 자식들이 못났기 짝이 없다.
올해, 여든 하나. 귀가 좀 어두울 뿐 그런 대로 건강하게 잘 지내신다. 아버지 가신 지가 십년째인데 홀로 씩씩하게 사셔서 고마울 뿐이다.
남편이 여전히 드라마에 빠져 떠든다. 평소엔 잘 보지도 않더니 감정이입이 예사롭지 않다.
"어우, 난 저런 자리 쑥쓰러워서 못나갈 것 같아. 여보, 우리 애들 결혼 할 때는 저런 거 하지 말자,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해"
세월이 살같이 흘러 우리 아이들이 어느새 청년들이 되었다. 남편의 걱정처럼 좀 있으면 상견례에 나오랄 지도 모르겠다. 저 어색한 자리에 나를 대입시켜 보니 나도 싫다. 부모란 참 손해보는 자리다. 싫은데도 할 수 없이 해야하는 일이 날마다 생긴다.
그 때 우리 엄마는 얼마나 싫었을까?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드라마를 보면서 속절없이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