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 글쓰기 강의 나눔터
2008.02.22 22:36:29 (*.151.38.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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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1 - 달콤,쬰득한 빠리
폭이 40센티미터 정도 될까? 빠리행 밤기차 매트리스는 사람이 밤새 누워 가기에는 너무나 가혹했다. 우리가 탄 칸은 아래, 위 4개의 매트가 있었는데 딸과 내가 아래층이었고 이탈리아 사람인 듯한 남자가 2층에 들어왔다. 화장실을 가다가 다른 칸을 살펴보니 아예 통째 비어있는 칸도 있고 4명이 꽉 찬 칸도 있었다. 골고루 편하게 갈 수 있도록 해 주면 좋을 텐데 표파는 사람들은 그런 걸 전혀 고려치 않은 듯 했다. 적어도 내가 본 만큼의 유럽에서는 공공 서비스가 우리에 비하면 엄청나게 뒤떨어진 것 같았다.
아무튼 밤 11시 35분에 출발한 기차는 밤새 달렸고 우리는 팔, 다리가 거의 마비될 지경이 된 채 아침 8시 30분에 빠리 리용역에 도착했다.
지도를 보니 우리가 묵을 호텔은 빠리 북역 근처였는데 그곳은 몽마르뜨와 물랭루즈가 가깝다고 되어 있었다. 니콜 키드먼의 창백한 연기가 인상적이었던 영화 물랭루즈. 딸은 제일 먼저 그곳의 빨간 풍차를 보러 가자고 했다. 천천히 걸어서 도착한 물랭루즈를 보는 순간 역시 실망이 앞섰다. 영화에서의 그 애잔한 퇴폐의 분위기와 아름다운 무희의 숨넘어가도록 절망적인 사랑의 느낌은 온데간데 없이 그저 평범한 술집 지붕에 빨간 풍차만 멈춘 채 서 있었다.
한 달 동안 너무 많이 걸어서 그런지 이제 조금만 걸어도 골반이 아팠다. 몽마르뜨 언덕으로 가는 비탈길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음으로 미루며 발길을 돌렸다.
새벽에 빠리 근교의 벼룩시장을 찾아 갔다. 기분좋을 만큼의 쌀쌀한 날씨에 한적한 거리를 걸어 찾아간 방브시장은 참 즐거웠다. 끝도 없이 늘어선 노점을 따라 두 시간이 넘도록 돌아다니며 이것 저것 만져보며 구경을 했다.
10장 묶음으로 파는 지하철 표를 두 묶음 사놓고 너무 많이 산 것 같아 후회를 했는데 나중에는 그것도 모자라 더 샀다. 빠리는 그만큼 가 볼 곳이 여러 곳으로 흩어져 있고 또 많았다. 개선문에서 콩코드 광장에 이르는 넓은 거리가 샹젤리제 거리이다. 서울에서 산 지 삼십년, 어느새 도시의 밝음에 익숙한 탓인지 샹젤리제 거리를 걸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차도보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더 넓고 중간 중간에 벤치도 놓여있었다.
콩코드 광장에서 오페라 극장을 찾아 가는 길에 눈에 띈 서울오페라 식당. 한글간판이 눈물날 만큼 반가웠다. 딸은 거리 구경을 더 하겠다고 해서 혼자 식당으로 들어가니 조그만 식당에 프랑스사람들이 제법 앉아 있었다. 김치콩나물 국밥을 시켜 땀을 뻘뻘 흘리며 먹었다.
한 그릇에 2만원. 비쌌지만 맛나게 먹고 나니 배가 벌떡 일어나는 것 같았다. 여행 중 몇 번 우리 음식을 먹었지만 이곳이 제일 깔끔하고 맛있었다.
비가 조금씩 내리는 거리를 걸어 루브르 궁전으로 갔다. 광장을 중심으로 사방에 고색창연한 궁전이 빙 둘러 서 있고 광장의 한 가운데 영화 다빈치코드의 마지막 장면, 톰 행커스가 발견한 비밀의 장소였던 곳인 유리 피라미드가 있었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길은 줄이 길었다. 참을성 없는 우리로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미술품을 보려고 그 긴 줄을 감당할 수 없었다.
광장옆 계단에 앉아 쉬면서 그저 풍경을 봤다. 네모난 액자 속에 담긴 명품보다 내 눈에 비치는 실제 풍경이 더 좋다고 생각하면서. 저녁 어스름, 조금씩 희미해 지는 하늘빛과 사람들의 모습과 대비해서 빛바랜 궁전은 하나씩 불이 켜지면서 우아하고 엄숙한 모습이 되어갔다.
사진을 찍느라 광장을 돌아다니는 딸을 눈으로 따라다니는데 왠 남자가 딸에게 다가서는 게 보였다. 벌떡 일어나 가까이 가니 남자가 나를 돌아봤다. 나이가 꽤 있어 보였는데 딸이 내 손을 잡으며 엄마라고 말하자 이내 구경 잘 하라며 돌아서 갔다. 쳇! 이쁜 건 알아가지고. 어린 동양 여자가 혼자 돌아다니니 수작을 걸 셈이었던 모양이다.
다음날은 오르세 미술관에 갔다. 미술관으로 가는 길은 한적하고 중후했다. 그러나 우울하지 않고 고즈넉했다. 오르세에서도 잘 모르는 그림을 애써 볼 생각이 없었으므로 인상파 그림만 봤다. 애잔하면서도 왠지 슬픈 고흐의 그림 앞에서는 오래도록 발길을 돌리기 싫었다. 구불텅 거리며 흘러가는 구름도, 불안정하게 비스듬히 서 있는 집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도 모두 슬프다. 에드가의 음울한 분위기와 고갱의 강렬한 갈색, 그리고 르느와르의 분홍빛까지 실컷 보았다.
잠시 쉬려고 로비에 섰더니 큰 창문으로 세느강 건너 루브르 궁전이 보였다.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 배 불렀다!
나폴레옹이 묻혀 있다는 앵발리드, 황금색으로 빛나는 돔을 찾아 오르세에서부터 걸었다. 길이 참 좋았다. 모처럼 청명한 하늘아래 얼굴을 스치는 쌀쌀한 바람이 기분 좋았다. 넓고 한적한 길을 딸의 손을 잡고 걸었다. 가다가 샌드위치 가게에 들러 샌드위치와 커피로 요기를 하고 앵발리드를 스쳐 지나 에펠탑을 향해 또 걸었다.
사실 멀리서 본 에펠탑은 그게 왜 거기 있을까 싶을 정도로 생뚱맞게 보였다. 그러나 가까이 갈 수록 명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저 그런 물건을 쓰다듬고 갈고 닦아 빛나게 만드는, 결국 사람의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철탑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여러 대의 엘리베이터가 쉬지 않고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작은 꽃밭과 오솔길이 나 있고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고 조깅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들은 에펠탑을 사랑하는 것 처럼 보였다. 탑에서부터 사관학교까지 길게 이어진 잔디밭에는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공을 가지고 노는 청년들도 보였다.
빠리는 사람다니는 길이 넓어 사람에게 부대끼지 않고 걸어다닐 수 있었다. 긴 여정에 진이 다 빠진 우리 모녀에게는 더할 수 없이 고마운 일이었다. 걷다가 쵸코바 하나를 사서 나눠 먹었다. 달콤함과 쬰득함이 빠리의 느낌같았다.
빠리에서의 마지막 날, 아니 우리 여행의 마지막 날 우리는 노트르담 사원을 찾았다. 지하철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가니 마리 앙뜨와네트가 갇혀 있었다는 꽁시에르 쥬리가 나왔다. 저 아름다운 건물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대기실이었다니 역사의 비극이지 싶었다.
강변을 따라 빙 돌아가니 성당이 보였다.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노틀담의 곱추에서의 그 컴컴하고 견고해 보이던 성당, 지난 해였던가 역시 딸과 함께 보았던 뮤지컬 노트르담 드 빠리에서의 격정적인 춤과 노래를 떠올리며 찾아간 사원은 뜻밖에 조촐했다. 서울의 여의도 같은 섬, 시테. 타원형으로 생긴 도심의 섬에 성당이 있었고 주변으로 세느강이 흐르고 유람선이 떠 다녔다.
마침 일요일이라 미사가 있었는데 상관없이 관람객들은 안으로 들어가 구경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성당 안이나 밖이나 사람이 꽤 많았는데도 조용했다. 음울하고 괴괴한 모습으로 상상했던 까닭이었는지 소박한 모습의 성당은 훨씬 더 아름다웠다.
몽마르뜨 언덕에 가 보고 싶었다. 더 이상 다닐 수 없다는 딸을 겨우 달래서 삐갈역에 내렸다. 나는 힘들지만 걸어서 샤크레쾨레 성당이 있는 언덕까지 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삐갈역에서 몽마르뜨를 한 바퀴 도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곡예운전을 하며 골목을 누벼 성당앞에 잠시 섰다. 그 위에서 바라본 빠리 북쪽의 풍경도 아름다웠다. 오래전 가난한 화가들이 저 풍경을 그리느라 이 높은 언덕을 오르내렸겠지 싶어 마음이 찡 했다. 동네가 동네이다 보니 골목마다 독특한 가게들이 눈에 띄었다. 이쁘다, 이쁘다 하면서도 꼼짝않고 버스에 앉아 있는 딸을 보니 어지간히 지쳤나 보다 싶어 내리자는 말을 못했다. 아쉬움이야 언제나, 어디서나 있는 것. 지나친 것 보다 조금 모자라는 편이 낫다고 우기며 딸의 손을 잡고 돌아왔다.
공항으로 갈 여비만 남기고 남은 돈을 다 털어 저녁도 맛나게 먹고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과일도 사서 호텔로 돌아와 짐을 꾸렸다. 한 달 동안 잘 썼던 여행용 담요에게 작별을 하고 내 속을 풀어줬던 인스턴트 된장국도 남은 것은 버렸다. 밤늦도록 여기 저기서 샀던 조그만 기념품들을 꺼내놓고 아쉬워하는 딸을 보며 나도 따라 아쉽고도 즐거웠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그런데 보는 만큼 알게 되기도 한다. 사람은 제 나름대로 살아온 만큼의 세상을 보고 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또 순간에 지나지 않을 시간이지만 내 인생에서 이번 여행은 커다란 선물이었다. 또 다시 찾아올까 바람이야 늘 갖겠지만 혹 그럴 수 없다 해도 오래도록 되씹고 곰씹을 충분한 에너지가 되지 싶어 마음이 충만하다.
집에 돌아와 보니 혼자 알뜰하게 잘 살아준 남편이 더 고맙고 죽을 듯이 기뻐 날뛰는 우리 강아지들이 애틋하다. 그리고 군에 있으면서 제딴엔 혼자 남은 아버지를 전화로, 편지로 위로하느라 애쓴 아들이 기특해 눈물이 날 지경이다.
폭이 40센티미터 정도 될까? 빠리행 밤기차 매트리스는 사람이 밤새 누워 가기에는 너무나 가혹했다. 우리가 탄 칸은 아래, 위 4개의 매트가 있었는데 딸과 내가 아래층이었고 이탈리아 사람인 듯한 남자가 2층에 들어왔다. 화장실을 가다가 다른 칸을 살펴보니 아예 통째 비어있는 칸도 있고 4명이 꽉 찬 칸도 있었다. 골고루 편하게 갈 수 있도록 해 주면 좋을 텐데 표파는 사람들은 그런 걸 전혀 고려치 않은 듯 했다. 적어도 내가 본 만큼의 유럽에서는 공공 서비스가 우리에 비하면 엄청나게 뒤떨어진 것 같았다.
아무튼 밤 11시 35분에 출발한 기차는 밤새 달렸고 우리는 팔, 다리가 거의 마비될 지경이 된 채 아침 8시 30분에 빠리 리용역에 도착했다.
지도를 보니 우리가 묵을 호텔은 빠리 북역 근처였는데 그곳은 몽마르뜨와 물랭루즈가 가깝다고 되어 있었다. 니콜 키드먼의 창백한 연기가 인상적이었던 영화 물랭루즈. 딸은 제일 먼저 그곳의 빨간 풍차를 보러 가자고 했다. 천천히 걸어서 도착한 물랭루즈를 보는 순간 역시 실망이 앞섰다. 영화에서의 그 애잔한 퇴폐의 분위기와 아름다운 무희의 숨넘어가도록 절망적인 사랑의 느낌은 온데간데 없이 그저 평범한 술집 지붕에 빨간 풍차만 멈춘 채 서 있었다.
한 달 동안 너무 많이 걸어서 그런지 이제 조금만 걸어도 골반이 아팠다. 몽마르뜨 언덕으로 가는 비탈길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음으로 미루며 발길을 돌렸다.
새벽에 빠리 근교의 벼룩시장을 찾아 갔다. 기분좋을 만큼의 쌀쌀한 날씨에 한적한 거리를 걸어 찾아간 방브시장은 참 즐거웠다. 끝도 없이 늘어선 노점을 따라 두 시간이 넘도록 돌아다니며 이것 저것 만져보며 구경을 했다.
10장 묶음으로 파는 지하철 표를 두 묶음 사놓고 너무 많이 산 것 같아 후회를 했는데 나중에는 그것도 모자라 더 샀다. 빠리는 그만큼 가 볼 곳이 여러 곳으로 흩어져 있고 또 많았다. 개선문에서 콩코드 광장에 이르는 넓은 거리가 샹젤리제 거리이다. 서울에서 산 지 삼십년, 어느새 도시의 밝음에 익숙한 탓인지 샹젤리제 거리를 걸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차도보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더 넓고 중간 중간에 벤치도 놓여있었다.
콩코드 광장에서 오페라 극장을 찾아 가는 길에 눈에 띈 서울오페라 식당. 한글간판이 눈물날 만큼 반가웠다. 딸은 거리 구경을 더 하겠다고 해서 혼자 식당으로 들어가니 조그만 식당에 프랑스사람들이 제법 앉아 있었다. 김치콩나물 국밥을 시켜 땀을 뻘뻘 흘리며 먹었다.
한 그릇에 2만원. 비쌌지만 맛나게 먹고 나니 배가 벌떡 일어나는 것 같았다. 여행 중 몇 번 우리 음식을 먹었지만 이곳이 제일 깔끔하고 맛있었다.
비가 조금씩 내리는 거리를 걸어 루브르 궁전으로 갔다. 광장을 중심으로 사방에 고색창연한 궁전이 빙 둘러 서 있고 광장의 한 가운데 영화 다빈치코드의 마지막 장면, 톰 행커스가 발견한 비밀의 장소였던 곳인 유리 피라미드가 있었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길은 줄이 길었다. 참을성 없는 우리로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미술품을 보려고 그 긴 줄을 감당할 수 없었다.
광장옆 계단에 앉아 쉬면서 그저 풍경을 봤다. 네모난 액자 속에 담긴 명품보다 내 눈에 비치는 실제 풍경이 더 좋다고 생각하면서. 저녁 어스름, 조금씩 희미해 지는 하늘빛과 사람들의 모습과 대비해서 빛바랜 궁전은 하나씩 불이 켜지면서 우아하고 엄숙한 모습이 되어갔다.
사진을 찍느라 광장을 돌아다니는 딸을 눈으로 따라다니는데 왠 남자가 딸에게 다가서는 게 보였다. 벌떡 일어나 가까이 가니 남자가 나를 돌아봤다. 나이가 꽤 있어 보였는데 딸이 내 손을 잡으며 엄마라고 말하자 이내 구경 잘 하라며 돌아서 갔다. 쳇! 이쁜 건 알아가지고. 어린 동양 여자가 혼자 돌아다니니 수작을 걸 셈이었던 모양이다.
다음날은 오르세 미술관에 갔다. 미술관으로 가는 길은 한적하고 중후했다. 그러나 우울하지 않고 고즈넉했다. 오르세에서도 잘 모르는 그림을 애써 볼 생각이 없었으므로 인상파 그림만 봤다. 애잔하면서도 왠지 슬픈 고흐의 그림 앞에서는 오래도록 발길을 돌리기 싫었다. 구불텅 거리며 흘러가는 구름도, 불안정하게 비스듬히 서 있는 집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도 모두 슬프다. 에드가의 음울한 분위기와 고갱의 강렬한 갈색, 그리고 르느와르의 분홍빛까지 실컷 보았다.
잠시 쉬려고 로비에 섰더니 큰 창문으로 세느강 건너 루브르 궁전이 보였다.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 배 불렀다!
나폴레옹이 묻혀 있다는 앵발리드, 황금색으로 빛나는 돔을 찾아 오르세에서부터 걸었다. 길이 참 좋았다. 모처럼 청명한 하늘아래 얼굴을 스치는 쌀쌀한 바람이 기분 좋았다. 넓고 한적한 길을 딸의 손을 잡고 걸었다. 가다가 샌드위치 가게에 들러 샌드위치와 커피로 요기를 하고 앵발리드를 스쳐 지나 에펠탑을 향해 또 걸었다.
사실 멀리서 본 에펠탑은 그게 왜 거기 있을까 싶을 정도로 생뚱맞게 보였다. 그러나 가까이 갈 수록 명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저 그런 물건을 쓰다듬고 갈고 닦아 빛나게 만드는, 결국 사람의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철탑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여러 대의 엘리베이터가 쉬지 않고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작은 꽃밭과 오솔길이 나 있고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고 조깅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들은 에펠탑을 사랑하는 것 처럼 보였다. 탑에서부터 사관학교까지 길게 이어진 잔디밭에는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공을 가지고 노는 청년들도 보였다.
빠리는 사람다니는 길이 넓어 사람에게 부대끼지 않고 걸어다닐 수 있었다. 긴 여정에 진이 다 빠진 우리 모녀에게는 더할 수 없이 고마운 일이었다. 걷다가 쵸코바 하나를 사서 나눠 먹었다. 달콤함과 쬰득함이 빠리의 느낌같았다.
빠리에서의 마지막 날, 아니 우리 여행의 마지막 날 우리는 노트르담 사원을 찾았다. 지하철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가니 마리 앙뜨와네트가 갇혀 있었다는 꽁시에르 쥬리가 나왔다. 저 아름다운 건물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대기실이었다니 역사의 비극이지 싶었다.
강변을 따라 빙 돌아가니 성당이 보였다.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노틀담의 곱추에서의 그 컴컴하고 견고해 보이던 성당, 지난 해였던가 역시 딸과 함께 보았던 뮤지컬 노트르담 드 빠리에서의 격정적인 춤과 노래를 떠올리며 찾아간 사원은 뜻밖에 조촐했다. 서울의 여의도 같은 섬, 시테. 타원형으로 생긴 도심의 섬에 성당이 있었고 주변으로 세느강이 흐르고 유람선이 떠 다녔다.
마침 일요일이라 미사가 있었는데 상관없이 관람객들은 안으로 들어가 구경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성당 안이나 밖이나 사람이 꽤 많았는데도 조용했다. 음울하고 괴괴한 모습으로 상상했던 까닭이었는지 소박한 모습의 성당은 훨씬 더 아름다웠다.
몽마르뜨 언덕에 가 보고 싶었다. 더 이상 다닐 수 없다는 딸을 겨우 달래서 삐갈역에 내렸다. 나는 힘들지만 걸어서 샤크레쾨레 성당이 있는 언덕까지 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삐갈역에서 몽마르뜨를 한 바퀴 도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곡예운전을 하며 골목을 누벼 성당앞에 잠시 섰다. 그 위에서 바라본 빠리 북쪽의 풍경도 아름다웠다. 오래전 가난한 화가들이 저 풍경을 그리느라 이 높은 언덕을 오르내렸겠지 싶어 마음이 찡 했다. 동네가 동네이다 보니 골목마다 독특한 가게들이 눈에 띄었다. 이쁘다, 이쁘다 하면서도 꼼짝않고 버스에 앉아 있는 딸을 보니 어지간히 지쳤나 보다 싶어 내리자는 말을 못했다. 아쉬움이야 언제나, 어디서나 있는 것. 지나친 것 보다 조금 모자라는 편이 낫다고 우기며 딸의 손을 잡고 돌아왔다.
공항으로 갈 여비만 남기고 남은 돈을 다 털어 저녁도 맛나게 먹고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과일도 사서 호텔로 돌아와 짐을 꾸렸다. 한 달 동안 잘 썼던 여행용 담요에게 작별을 하고 내 속을 풀어줬던 인스턴트 된장국도 남은 것은 버렸다. 밤늦도록 여기 저기서 샀던 조그만 기념품들을 꺼내놓고 아쉬워하는 딸을 보며 나도 따라 아쉽고도 즐거웠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그런데 보는 만큼 알게 되기도 한다. 사람은 제 나름대로 살아온 만큼의 세상을 보고 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또 순간에 지나지 않을 시간이지만 내 인생에서 이번 여행은 커다란 선물이었다. 또 다시 찾아올까 바람이야 늘 갖겠지만 혹 그럴 수 없다 해도 오래도록 되씹고 곰씹을 충분한 에너지가 되지 싶어 마음이 충만하다.
집에 돌아와 보니 혼자 알뜰하게 잘 살아준 남편이 더 고맙고 죽을 듯이 기뻐 날뛰는 우리 강아지들이 애틋하다. 그리고 군에 있으면서 제딴엔 혼자 남은 아버지를 전화로, 편지로 위로하느라 애쓴 아들이 기특해 눈물이 날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