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등 논술 강의 나눔터
ㅡ 인간은 환경과 어떤 관계일까?
주체라는 철학적 용어의 시작은?
질문으로 시작을 연 첫 수업,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원시시대부터 그리스 고전기까지의 철학사를 선생님 덕분에 맥락있는 흐름으로 듣게 되어 참 좋았습니다~~^^
ㅡ수업설계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언급된 수업목표설정을 오늘은 내내 되새기면서 수업했습니다.
ㅡ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이렇게 웃으면서 공부할 수 있다니 ' 박장대소 했습니다.
철학사의 대가를 들었다놨다하시는 선생님 ㅋ
ㅡ김동인의 감사를 주체성의 회복이라는 관점으로 저도 생각했었는데 선생님께서도 그 관점을 언급하셔서 좋았습니다
깊으면서도 잼나는 수업 감사드립니다~~~^^ - 김은*
복녀의 패악스러움이 남자등장인물들의 패악스러움보다 더없이 불편하게 다가왔던 부분을 인지하게 되면서 환경의 지배영역에 대해 재차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끝까지 신념을 지키려 했던 모습또한 삶에서 끝까지 주체이고자 했던 소박해 보이지만 거대한 욕구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수업후 복녀의 모습과 오버랩되어 여운이 오래 가더라구요. 무엇보다 니 자신을 알라는 말의 깊이가 해결안됐던 것이 즉자적 해석에 머물러있어서였다는 발견이 오늘 수업중 제게는유래카였습니다. 내가 소크라테스를 좋아하는 이유, 그리고 내가 복녀에게 화가났던 이유가 어쩌면 본성인 주체성의 부분이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SF에 1도 관심없는 제게 안드로이드 이야기 신선했습니다. 담주에 뵈어요 - 김정*
수업안에 대해 말씀해주실 때 많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의 적극적인 참여~그리고 아이들이 주체가 되는 수업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대주제-중주제-소주제로 로 연계성있도록 짜야 한다는 것도 새겼습니다
저는 인간이 환경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분명 주체적인 인간은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나가고 환경을 만들어 나간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에서의 행동지침이나 정부의 정책에 따라 달라지는 삶을 느낄 때는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복녀는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이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있었기에 자신만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며 읽었는데요 환경의 영향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너무 읽고 싶은 대로 읽지는 않는지 또 성찰했습니다
호모 에티쿠스 책이 궁금해졌습니다 저의 얕은 지식을 메우고 싶구요
아~~세계사 공부도 해야 겠구나 싶었습니다
자극이 되는 강의 감사드립니다^^ - 장선*
'감자"를 읽으면서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고 단순하게만 생각했었는데 '환경의 지배'가 참으로 포괄적인 내용들을 지녔음을 알게됐습니다. 또 복녀가 타락한 게 아니라 주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일 수 있다는 가상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을 보는 시각이 곧 철학적 시각의 핵심이다. " 인간과 철학이라!
철학에 문외한이라 들을 땐 알 것같으나 돌아서면 뭐였지?
그러기에
오늘 수업에선 선생님 입을 통해 무엇이 쏟아져 나오는지 계속 주시하게됐습니다.
원시부터 그리스철학사를 쭉 듣다보니 가장 또렷한 인물은 단연 소크라테스. 삶보다 죽음이 낫다고 한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철학 모토를 지키며 죽음을 맞이 했다는걸 생각하면 진정한 사상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너에게 무엇이 선이 될지 알고 있느냐?'라는 말이었다는 것 또한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윤리와 인간에 대한 성찰이, 사상의 변천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다면 그들 사상에 우리가 지배당하고 있음이 아닐까.
수업안 작성 방법을 듣고 그동안 편협한 방법으로 수업했던 것에서 탈피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오늘 수업은 저에겐 생소하고 쉽지 않았습니다. 좀 더 귀 기울여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감사합니다.^^ - 유은*
☆ 인간은 환경에 지배 받는 존재인가요, 아니면 환경을 지배하는 존재인가요?
이 질문에 저는 제일 먼저 슈타이너의 다음 글이 생각났습니다.
《의지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유를 자신의 소유라 주장할 수 있는지, 아니면 이 자유가 자연현상처럼 인간의 의지가 매달려서 조종되는 필연성이라는 끈을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막연한 환상인가 하는 질문이다.》
- 자유의 철학 중에서 -
환경의 지배라는 것이 외부로부터 오는 자극이라 한다면 인간은 외부의 자극에 대해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위하는 자유로운 존재인가, 그렇지 않은 존재인가?
그 질문에 대한 슈타이너의 글을 다시 정독하며 읽어보았습니다.
《한 인간의 행위가 무엇을 통해서 그의 윤리적 의지에서 솟아나는지 파악하고자 한다면, 이 의지가 행위에 대해 지니는 관계를 먼저 보아야 한다. 이 관계가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행위를 일단 주목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중에 나 혹은 타인이 그 행위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에 고려되는 윤리 원칙이 드러날 수 있다. 내가 행위를 하는 동안에는, 내 내면에 윤리 원칙이 직관적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한에서만 나를 움직인다. 이는, 윤리 원칙이 내가 행위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객체에 대한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에 나는 누구에게도, 어떤 법칙에도 “제가 이 행위를 해야 할까요?” 하고 묻지 않는다. 나는 그 행위에 대한 관념을 파악한 즉시 실행에 옮긴다. 오로지 그렇게 행하는 것만 내 행위다. 어떤 사람이 특정 윤리 규범을 인정하기 때문에만 어떤 일을 한다면, 그 행위는 그의 도덕법전에 들어 있는 원칙에서 나온 결과일 뿐이다. 그는 그 원칙을 집행하는 자일 뿐이다. 그는 고차적인 자동 기계다. 행위를 위한 계기를 그 사람 의식 속에 집어넣으면, 즉시 그 사람이 알고 있는 도덕 원리의 톱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기독교적인 행위나 인도적인 행위를, 혹은 사리사욕이 없어 보이는 행위를, 혹은 문화 역사적 진보를 위한 행위를 완수하기 위해 법칙적인 방식으로 돌아간다. 객체에 대한 사랑을 따를 때에만, 오로지 그렇게 할 때에만 나는 행위를 하는 그 자체다. 이 윤리 단계에서 나는 내 위에 있는 어떤 주인을 인정하기 때문에 행동하는게 아니다. 이 단계에서 나는 어떤 외적인 권위도, 이른바 내적인 소리도 따르지 않는다. 나는 내면에서 행위 근거를, 즉 행위에 대한 사랑을 발견했기 때문에 외적인 원칙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내 행위가 선한지 악한지 이성적으로 검사하지 않는다. 내가 그 행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저 완수할 뿐이다. 사랑으로 적셔진 내 직관이 직관적으로 체험되는 세계 연관성 속 한복판에 올바른 방식으로 들어있다면, 내 행위는 ‘선한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악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내 위치에 있다면 어떻게 할까?” 하고 묻지도 않는다. 특별한 개인으로서 내가 원하도록 부추겨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고, 그렇게 알아본 대로 행할 뿐이다. 나를 직접적인 방식으로 행위로 이끌어가는 것은 일반적인 관습, 일반적인 통례, 보편적으로 인간적인 원칙, 윤리 규범 등이 아니라 행위에 대한 내 사랑이다. 나는 어떤 강제성도 느끼지 않는다. 본능에 따른 행동에서 처럼 자연적 속박도 느끼지 않는다. 윤리적 계율이 씌우는 굴레도 느끼지 않는다. 내 내면에 놓인 것을 그저 실행하고자 할 뿐이다.
일반적인 윤리 규범을 수호하는 사람은 이런 의견을 들으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의도만 펼치려 하고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하려고 한다면, 좋은 행위와 범죄를 전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사기를 치려는 내 의도도 보편적인 선에 봉사하는 의도와 똑같이 펼쳐질 권리가 있는게 아닌가? 관념에 따라 어떤 행위를 주목한다는 것은 윤리적 인간으로서 나한테 기준이 될 수 없다. 중점은 그 행위가 선한지 악한지 검토하는 것이고, 선하다고 판명되는 경우에만 실행하는 것이다.”
수긍이 가기는 해도 이 책에서 의미하는 바를 오인하는 경우에만 생겨나는 이 이의에 필자는 다음과 같이 응수하겠다. “인간 의지의 본질을 인식하고자 하는 사람은 두 가지를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그 첫 번째는, 의지를 특정 정도까지 발달하도록 이끌어가는 길이다. 그 두 번째는 의지가 그 목표에 접근하는 동안 띠게 되는 특성이다. 목표를 향하는 길에서는 규범이 그 역할을 하고, 이는 정당하다. 하지만 목표는, 순수하게 직관적으로 파악한 윤리 목표를 실현하는 데에 있다. 이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일단 인간이 직관적 세계 관념내용으로 뛰어오를 능력이 있어야 하고, 바로 그 만큼만 가능하다. 개별적인 의지 속에는 대부분 다른 것이 원동력이나 동기로서 그런 윤리 목표에 섞여 있을 것이다. 그래도 직관적인 것이 인간 의지 속에서 결정하는 것 혹은 함께 결정하는 것일 수 있다.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의무가 행위로 펼쳐지도록 무대를 내준다는 것이다. 자신의 행위라 함은, 그 자체 그대로의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솟아나도록 한 것이다. 이때 동인은 완전히 개인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진실에서 보자면 직관에서 솟아난 의지 행위만 개인적인 것일 수있다. 범행, 즉 악행도 순수한 직관이 구체화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개인성이 전개되는 것이라 한다면, 이는 눈 먼 본능도 인간 개인성에 속한다고 간주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하지만 범행을 저지르도록 몰아대는 눈먼 본능은 직관적인 것에서 유래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에서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일반적인 것에 속한다. 이 일반적인 것은 모든 개인에 똑같은 정도로 유효하며, 인간이 개인성을 통해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것에 속한다. 나에게서 개인적인 것은 충동과 느낌을 수반하는 내 유기체가 아니다. 그것은 내 유기체 속에서 빛나는 몇몇 관념세계다. 내 충동, 본능, 욕망은 내가 일반적인 종種으로서 인간에 속한다는 것 이상으로는 아무 것도 내 내면에 확립시키지 않는다. 내 충동과 욕망과 느낌 속에서 관념적인 것이 특별한 양식으로 펼쳐진다는 상황이 내 개인성을 확립시킨다. 충동과 본능 등을 통해서 나는 열두 명이 모이면 한 다스가 되는 인간이다. 그 한 다스 사람들 중에서 나를 나/Ich라고 칭하게 만드는 특별한 관념 형태를 통해서 나는 개인이다. 내 다양한 동물적 천성에 따라서는 나한테 낯선 존재만 타인으로부터 나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사고를 통해서는, 달리 말해 내 유기체 속에서 관념적인 것으로서 펼쳐지는 것을 능동적으로 파악할 때에는 내가 타인으로부터 나 자신을 구분한다. 그러므로 범행도 관념에서 생겨난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그렇다. 범행의 특성은 다름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관념 외적인 요소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행위는 내 개인 존재 중에서도 관념적인 부분에 그 근거를 두는 한에서만 자유로운 것으로 느껴진다. 그와 다른 부분에 근거를 두는 행위는 자연의 속박 때문에 하든 윤리 규범의 강요 때문에 하든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느껴진다.
인생에서 매 순간 자신을 따를 상태에 있는 한에서만 인간은 자유롭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자유로운 것이라고 명명될 수 있을 때에만 윤리 행위가 곧 내 행위가 된다. 여기에서 일단 거론하는 것은, 원해진 행위가 어떤 조건 하에서 자유로운 것으로 느껴지는가 하는 것이다. 순수하게 도덕적으로 파악된 자유의 관념이 어떻게 인간 존재 속에서 실현되는가 하는 것은 이어지는 설명에서 드러날 것이다.
자유에서 나오는 행위는 윤리 규범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포용한다. 그러므로 단지 규범에 의해 강요된 행위에 비해 그런 행위는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판명될 뿐이다. 인류 공익에 헌신해야 한다고 의무로 느끼기 때문에, 오로지 그 이유 때문에 하는 행위에 비해 사랑에서 우러난 행위가 공익에 덜 기여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단순한 의무 개념은 자유를 배제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일반적인 규범에 복종하도록 개인에 강요하기 때문이다. 행위의 자유는 오로지 도덕적 개인주의의 관점에서만 생각될 수 있다.
그런데 각자가 자신의 개인성을 정당화하려고만 한다면 어떻게 공생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이로써 잘못 이해한 도덕주의에서 나오는 이의가 설명된 것이다. 이런 도덕주의는, 사회가 구성원들이 함께 확립한 윤리 제도를 통해 하나로 뭉칠 때만 공동체로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므로 관념세계의 일치성을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내 내면에서 활동하는 관념세계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니고 바로 타인 내면에서 활동하는 바로 그 세계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 일치는 세계 경험에서 나온 결과일 뿐이다. 관념세계는 그런 것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세계가 관찰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 인식되는 것이라면, 그 영역에서는 개인적인 체험이 아니라 일반적인 규범이 정당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성은 각자가 개인적인 관찰을 통해서 타인에 관해 어떤 것을 아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나와 내 옆사람이 구분되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정신세계에서 살고 있어서가 아니라, 공통의 관념세계에서 그는 나와 다른 직관을 받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자신의 직관을 펼치고자 하고, 나는 내 직관을 펼치고자 한다. 우리 둘다 정말로 관념에서 퍼내고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외적인 동인은 전혀 따르지 않는다면, 결국 같은 지향성에서, 동일한 의도에서 만나도록 되어있다. 윤리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들 사이에는 윤리적인 오해와 충돌이 일어날 수 없다. 받아들인 의무규범 혹은 본능적 성향을 따르는 윤리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사람만 바로 그 본능이나 규범을 따르지 않는 타인을 배척한다. 행동을 위한 사랑 속에 살고, 타인의 의지를 이해 속에 살도록 함이 자유로운 인간의 근본 원칙이다. 자유로운 인간은 자신 의지를 직관적인 조화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것 외에 다른 의무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특별한 상황에서 어떤 행위를 원하게 되는지, 이는 그의 관념 능력이 그에게 말해준다.
조화를 이루려는 근본 바탕이 인간 본질에 들어있지 않다면, 어떤 외적인 법칙을 통해서도 그것을 새겨넣을 수 없을 것이다! 개인들 모두 같은 정신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오로지 그렇기 때문에 역시 함께 나란히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사람은 자유로운 타인도 자신과 함께 같은 정신세계에 속하고, 의도에 있어 서로 조우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산다. 자유로운 사람은 타인에게 일치를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일치가 인간 천성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리라 기대한다. 이로써 이러저러한 외적인 제도와 조직에 존재하는 불가피성이 아니라 의향을, 영혼 성향을 암시한 것이다. 바로 이 성향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존중하는 타인들 사이에서 자신을-체험하면서 인간 존엄성에 가장 적합하게 된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그리는 자유로운 인간 개념, 그런 것은 환상일 뿐 어디에서도 실현될 수 없다. 우리는 현실에 인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애착과 경향을 따르지 않고 윤리적 사명을 의무로 파악하고 규범을 따를 때에만 윤리성을 기대할 수 있다.” 필자는 이 생각을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 장님이나 의심할 것이다. 하지만 만일 이 생각이 최종적인 것이라야 한다면, 윤리에 관한 온갖 위선은 내다버리고 그냥 다음과 같이 말하라! “인간 천성은 자유롭지 않은 한 행위를 하도록 강요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이 물리적 수단이나 도덕률로 억압되어 자유롭지 못하든, 한정없는 성욕을 따를 수밖에 없거나 관습적 도덕의 족쇄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든, 특정 관점에서 보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단, 그런 사람이 어떤 행위를 자신의 것이라고 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하지 말기 바란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낯선 위력에 의해 행위를 하도록 몰아대지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법률적 강제, 관습, 종교 등으로 불리는 쓰레기 더미에서 자신 스스로를 발견하는 자유로운 정신, 즉 인간은 강요하는 규범을 뚫고 나와 우뚝 솟아오른다. 인간은 오로지 자신 스스로를 따르는 한 자유롭다. 복종하는 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중에 누가 모든 행위에 있어서 진정으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지만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더 심원深遠한 존재가 살고 있으며, 그 존재 안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말하고 있다.
우리 인생은 자유로운 행위와 자유롭지 못한 행위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인간 천성의 가장 순수한 특색으로서 자유로운 정신을 참작하지 않고는 인간이라 하는 개념을 끝까지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자유로운 한에서만 참된 인간이다.》
- 자유의 철학 중에서 -
"우리 중에 누가 모든 행위에 있어서 진정으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 하지만 인간 천성의 가장 순수한 특색으로서 자유로운 정신을 참작하지 않고는 인간이라 하는 개념을 끝까지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자유로운 한에서만 참된 인간이다."
학습목표에 맞게 40차시 수업안 짜는 일이 재미있을 것 같아 머릿속으로 몇가지를 이미 짜보았습니다.
솔직히 철학사 전반을 훑어주시는거는 날숨 없이 지속적으로 들숨만 쏟아져 들어오기에 저에겐 힘든 시간이었지만,
현대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펴보시려는 취지로 알아들었기에 잘 버텨보겠습니다. ^^;;
다음 시간에 뵐께요~ - 정연*
“김동인의 『감자』에서 복녀는 환경에 의해 지배받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작가의 이러한 견해에 찬성하십니까? 반대 하십니까? 인간은 환경에 지배받는 존재인가요, 아니면 환경을 지배하는 존재인가요?”
김동인의 『감자』에 등장하는 복녀는 오늘 이 질문을 받기 전까지 그냥 복녀였는데, 오늘 김형준 선생님의 질문으로 복녀는 환경과 인간의 상관관계라는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나에게 새롭게 나타났다.
쉬운 듯 하지만 결코 쉽지 않고, 나와 내 주변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지는 시간이였다. 이제 감자는 감자가 아니고 복녀는 복녀가 아니다.
독해의 힘이 무엇인지? 어떻게 읽어야하는지? 무엇을 생각해야하는지? 머리에 돌 맞은 기분이다.
앞으로도 무수한 돌들이 날아와 나의 머리를 맞추고 그때마다 아프겠지만 아픔을 견디며 따라가보려고 한다. - 조세*